* * *
찰싹.
찰싹, 찰싹, 찰싹.
자꾸만 뺨을 때리는 느낌에, 카이사르는 힘겹게 눈을 떴다.
“아, 일어났다.”
깨어나 보니, 눈앞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중 한 명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흠뻑 젖고 흙투성이가 되어 꾀죄죄한 몰골이었지만.
“……레지나.”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으며 카이사르가 입을 열었다.
“어디 다친 곳은?”
“괜찮아요.”
레지나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대답과 달리 그녀는 분명 여기저기 찰과상이 있었다.
‘뭐, 어디 부러지거나 한 것 같진 않지만. 그나마 다행이군.’
아니, 안심하긴 이른가.
카이사르는 피에 젖은 자신의 왼쪽 다리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탈에서 떨어질 때 어딘가에 걸려 찢긴 모양이었다.
‘무기도 없고, 비 때문에 체온은 자꾸 떨어지는데 다리는 이 모양이고……. 이런 상황에 기사들보다 적들이 우릴 먼저 발견하면 골치 아파지겠는데.’
카이사르가 이런저런 생각에 말이 없으니, 레지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카이사르를 쳐다보았다.
“아바마마. 추워요?”
“응?”
“레지나가 옷 벗어 줄까요?”
이런.
어린 딸을 걱정하게 만들어 버렸다.
카이사르는 일부러 환하게 미소 지으며 레지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고민 중이었을 뿐이야.”
“걱정 마세요! 레지나가 아바마마를 지켜 줄 거야!”
레지나의 말에 카이사르가 쓰게 웃었다. 레지나의 말이 기쁘기도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왜 내가 사랑하는 아가씨들은 다들 지켜 주는 것밖에 모르나 몰라.”
그렇게 중얼거린 카이사르가, 레지나에게 양팔을 벌렸다.
“자, 이리 오련.”
카이사르가 말했지만, 레지나가 우물쭈물거렸다.
다친 카이사르에게 안겨 들어도 좋을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겨우 네 살이지만 이상하게 이런 쪽으로는 눈치가 빨랐다.
“무서울 거 없어. 알고 있지? 레지나의 아빠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기사 삼촌들과 싸워도 아빠가 다 이기잖아.”
“그치만 어마마마는 못 이기잖아.”
“그건 별수 없지. 엄마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그러면 어마마마가 나쁜 놈들 다 물리치고 우리 구하러 와 줄까요?”
“그럼. 그러니까 그때까지는 아빠가 레지나를 지켜 줄게.”
그제야 레지나가 안심한 표정으로 카이사르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품에 안긴 따뜻하고 작은 덩어리에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네 살 어린애가 오기를 부리며 겁먹지 않은 척하려 한 게 마음이 쓰였다.
정작 카이사르의 품에 안긴 레지나는 눈에 띄게 떨고 있었다.
“미안해요. 레지나 때문에 아바마마가 다쳐서.”
카이사르의 품에 안기니 안도가 된 것일까. 레지나가 그제야 훌쩍훌쩍 울면서 중얼거렸다.
“괜찮아. 레지나 잘못이 아니야.”
카이사르는 레지나의 체온이 떨어지지 않게 자신의 겉옷을 벗어 레지나에게 걸쳐 주었다.
“레지나 때문에 아픈데 왜 괜찮은 거예요?”
“그야 널 사랑하니까.”
카이사르가 레지나를 품에 꽉 끌어안으며 속삭여 말했다.
“넌 나와 헬레나가 가장 사랑하는 소중한 딸이야.”
레지나가 카이사르의 옷자락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카이사르는 레지나를 추슬러 안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갈 셈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왼쪽 다리에서 끔찍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참았다.
“레지나도 어마마마랑 아바마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레지나가 부끄러운 듯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레지나의 그 말을 들으니, 아픈 것도 어떻게든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밀턴도 조금, 아주 조금 좋아.”
“그렇구나.”
카이사르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돌아가면 해밀턴에게 상으로 과중 업무에 시달리게 만들어 줘야겠다고 결심하면서.
‘그나저나…….’
사랑의 힘이란 정말 위대하구나.
숨이 끊어질 만큼 아픈데도, 이 애를 위해서라면 정말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카이사르는 작게 웃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그저, 자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이 작고 여린 여자아이가 못 견디게 사랑스러울 따름이다.
* * *
비적 떼에 들어온 지 2년.
처음에는 부도덕에 대한 죄책감과 불안함이 멘델을 괴롭혔지만, 그건 딱 반년 갔다.
상인들의 마차도 털고, 귀족가의 마차도 털었다. 귀족들은 호위가 있어 털기 어렵지만, 막상 털면 수익이 상당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사람도 서슴없이 죽였다. 그러고 나면 한동안은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없이 살았다. 돈이 떨어지면 또 사람을 죽이면 됐다.
비적질에 나설 때 멘델은 ‘갑’이었다. 아무리 지체 높은 나으리라 해도 자신에게 목숨을 구걸하며 돈을 갖다 바치는 게 좋았다.
그러던 것이, 설마 자신이 습격하려던 자들에게 되려 당하게 될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심지어는 드레스를 차려입은, 어느 모로 보나 곱게 자란 듯한 아가씨에게 말이다.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여자는 자신의 공언을 지켰다.
정말 세 명만 남기고 모조리 숨통을 끊어 버린 것이다.
멘델은 어떻게든 세 명 안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아예 초장부터 바닥에 납작 엎드려 목숨을 구걸했다.
모두 쉽게 고꾸라져 죽는 꼴을 보니, 결과적으로는 잘한 짓이었다.
“도망친 놈은 없나?”
여자가 기사에게 물었다. 어딘가 뺀질거리게 생긴 기사가, 생긴 것과 달리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없습니다. 남은 놈은 이 셋이 전부입니다.”
“우리 중에 비탈 아래 지형을 아는 이는?”
“지도가 있긴 합니다만, 다들 이 지역에 대해 자세히 아는 이는 없는지라…….”
“어이, 거기 셋.”
기사와 대화를 나누던 여자의 푸른 눈동자가, 포박당한 세 명의 비적들에게 날카롭게 꽂혔다.
“비탈 아래의 지리에 대해 잘 아는 놈이 누구냐.”
셋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나서는 게 나은 건지, 모르는 척하는 게 나은 건지 판단하기 어려웠으니까.
“셋 다 모르는 건가? 별수 없군. 쓸모없어졌으니 다 죽여.”
“제, 제, 제가 압니다!”
비정한 여자의 명령에, 멘델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남은 두 놈이 타이밍을 놓쳐 아깝다는 듯 ‘칫’ 하고 혀를 찼다.
“네놈이 안다고?”
“네! 제가 압니다요! 여기 산속 지리는 홀든가의 기사들보다 훤합죠!”
멘델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듯 소리쳤다. 여자는 멘델의 말이 사실인지 가늠하듯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말에서 내려 멘델의 앞으로 다가왔다. 포박을 풀어 주려는 건가 싶어 멘델은 한층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멘델의 앞에 다가온 그녀는, 구둣발로 멘델을 힘껏 걷어차 버렸다.
“크어억!”
치아가 빠질 정도로 호되게 얻어맞은 멘델이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졌다.
“아는데 바로 말하지 않은 건 아직도 살 궁리나 하고 있단 소리로군. 내 남편과 아이가 저 아래 떨어져 생사도 모르는데, 네놈은 자기 살 궁리 찾느라 간을 보고 있었어. 감히, 말이야.”
“사, 사, 살려 주십시오! 잘못했습니다! 하라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네놈들이 전부일 리 없다. 네놈들의 본거지가 어디냐.”
여자가 이를 갈며 협박하듯 말했다. 그토록 분노가 꽉꽉 담긴 목소리를, 멘델은 처음 들었다.
여자의 말에, 나머지 두 놈 중 한 명이 기다렸다는 듯 냉큼 답했다.
“홀든 영지에 있는 숲입니다! 거기 남아 있는 동료, 아, 아니, 비적 놈들이 있습니다!”
“호크.”
“네, 명하십시오.”
“너는 몇을 이끌어 저자를 끌고 본거지로 가.”
“존명. 따르겠습니다.”
“페레스카 경. 아고트. 그리고 몇 명은 저 아래에서 우릴 기다리고 계실 우리의 주군을 찾으러 간다. 나머지는 여기서 대기하도록.”
“존명!”
여자의 날카로운 명령에 기사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사실 멘델은 저들이 본거지로 간다는 말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멘델이 속한 비적 떼는 제법 규모가 있었고, 이들 전부가 가더라도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존명을 외치는 순간, 공기가 떨리는 감각을 깨달은 멘델은 어쩌면 자신이 착각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진짜 다 쓸어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머릿수 같은 건 무의미하게 말이다.
“앞으로 또 허튼수작 부린다면, 그때마다 네놈의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 내 줄 것이다.”
여자의 얼음장 같은 협박에, 멘델은 열심히 고갤 끄덕거렸다.
왜일까. 일이 잘 해결되어도 이 여자는 자신을 죽이겠구나 하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진 남자와 계집아이가 무사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야 이 여자에게 약간이나마 자비를 청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 * *
비를 그을 수 있는 커다란 돌 밑으로 몸을 피한지 얼마 후. 하늘에 구멍이 난 듯 쏟아졌던 폭우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러나 해가 저물면서 공기는 더욱 서늘해지기만 했다.
카이사르는 추위에 몸을 떠는 레지나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이러다가 감기 걸리겠는데.’
그러잖아도 비에 흠뻑 젖은 채다.
그렇다고 섣불리 장소를 떠나기도 여의치가 않다. 지리를 모르는 산속에서는 길을 잃기 십상인 데다, 다리를 다쳐 움직이는 것도 쉽질 않았다.
‘누구든 얼른 찾으러 안 오나.’
차라리 적이라도 나타났으면 싶다.
한둘쯤이면 어떻게든 때려눕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녀석들을 협박하여 길을 물을 수 있지 않을까.
“윽…….”
“아바마마. 많이 아파요?”
카이사르가 가느다란 신음을 내뱉자, 레지나가 파드득 놀라 고갤 들었다.
“아니야. 아프지 않아.”
“어마마마가 거짓말하면 나쁜 거랬어요.”
“엄마 말이 다 맞는 건 아닐걸.”
카이사르가 쓰게 웃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네 살 어린애한테 농담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니나 다를까 레지나는 불퉁한 얼굴로 카이사르를 노려볼 뿐이었다.
“레지나가 가서 시종들 있나 찾아볼까요? 도와 달라고 해 볼까요?”
“위기의 상황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줄 아는 점은 몹시 훌륭하구나, 딸아. 그런데 이 근처에는 시종들이 없을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해요? 아바마마는 계속 아픈데? 아바마마 죽어요?”
레지나가 울먹울먹한 눈으로 물었다.
네 살 어린애의 ‘죽음’에 대한 개념은 생각보다 가볍다. 그 어처구니없는 발언에 카이사르는 놀라긴커녕 도리어 웃음이 터졌다.
“아바마마는 황제 폐하라서 안 죽어.”
“진짜로요?”
“물론이지.”
“어……, 그렇구나.”
레지나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은색 머리카락에 맺힌 물방울이 고갤 끄덕이니 몇 방울 바닥으로 떨어졌다.
네 살 헬레나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코웃음을 치면서 ‘시시한 농담 할 거면 입 다물어 줄래?’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을 했더니 다시 웃음이 터졌다.
아무래도 위기의식이 없는 건 어린 딸이 아니라 자신 같다.
그때, 어둠 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다.
“아바마마! 누가 오나 봐요!”
레지나도 느낄 정도로 확실한 인기척이었다. 레지나는 반가운 마음에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레지나를 끌어당겨 도리어 품에 안았다.
“쉬잇. 레지나, 안 돼.”
“왜요?”
“나쁜 놈들인지도 모르잖아.”
그 말에 그제야 레지나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기 입을 막았다.
“레지나. 여기 숨어서 눈 감고 마음속으로 딱 100초만 세고 있을 수 있겠어?”
“무, 무서워요.”
나름 의연했던 레지나가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막상 나쁜 사람들이 다가왔다고 생각하니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아빠가 지켜 줄 테니까. 아무도 내 딸 못 건드려.”
카이사르는 부드럽게 웃으며 레지나의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아빠 믿니?”
레지나가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붉은색 눈동자가 나름 결연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공포를 누르고 카이사르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좋아. 그러면 시작.”
카이사르의 말에 레지나가 몸을 쪼그리고 앉아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후, 카이사르는 발소리를 죽여 그 자리를 떠나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인기척이 다가오는 쪽을 주시했다.
한 손에는 미리 골라 두었던 나뭇가지를 쥐었다.
‘상대가 적이라면, 두들겨 팬다. 호크라면, 음……, 역시 두들겨 팬다.’
그 자식들, 감히 군주도 제대로 못 지키고 말이야. 뭐, 마차에서 내렸던 자신의 불찰도 있겠지만.
‘헬레나라면, 춥고 무서웠다고 안겨서 울어야지.’
어린애 같은 상상을 하며 카이사르는 피식 실소했다. 덕분에 긴장은 좀 가셨다.
그사이 인기척도 점점 다가와, 이제 어둠 너머로 어슴푸레하게 실루엣이 보였다.
자, 와라.
적이냐.
아군이냐.
그리고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이는.
“……헬레나?”
이런. 정말 품에 안겨서 울어야 할 판이잖아.
“카이사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기사들을 이끌고 나타난 헬레나였다.
카이사르는 흡사 지옥에서 악마들을 끌고 올라온 지옥의 여신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만큼 헬레나에게서 감도는 분위기가 날카롭고 살벌했다. 거치적거리는 게 있으면 그게 뭐든 상관 않고 베어 버릴 기세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카이사르를 발견한 헬레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울먹거리는 얼굴이 되어 카이사르에게 달려왔다.
“폐하를 찾았다!”
“무사하십니까?”
따라오던 기사들도 한껏 안도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안도할 만도 하지. 만약 카이사르나 레지나가 잘못됐다면 그들 모두 모가지였을 것이다. 비유적인 의미로도, 실질적인 의미로도.
“카이사르. 다쳤어요? 아파? 세상에, 이 피 좀 봐! 괜찮은 거야? 무사해요?”
“헬레나. 반말을 할지 존댓말을 할지 한 가지만 해 줄래?”
어쩐지 헬레나가 더 당황하고 겁먹은 것 같아서, 카이사르는 일부러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헬레나의 푸른 눈동자에 울컥 눈물이 고였다.
“놀랐잖아요, 이 바보야!”
음. 아무래도 레지나의 괴이한 경어는 헬레나에게서 배운 게 분명한 듯싶다.
“공주님도 무사합니다!”
아고트가 숨어 있던 레지나를 품에 안아 들며 소리쳤다.
레지나는 그제야 긴장이 탁 끊긴 듯, 아고트의 목을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앙! 무서웠어! 무서웠어, 아고트!”
“늦게 와서 죄송해요, 공주님. 그래도 용감하게 폐하를 지켜 주셨군요?”
“하늘에서 떨어졌어! 아바마마가 피가 나서! 죽었어! 그런데, 살았어! 으아아앙! 아아아아앙!”
“뭔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 잘하셨어요. 기특하셔요.”
아고트가 레지나를 어르며 달랬다. 한참 울던 레지나는 기운이 쑥 빠졌는지, 이내 훌쩍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그사이 레너드가 카이사르의 상처를 살폈다.
다른 기사들 역시, 카이사르의 주변에 우르르 몰려와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심정을 토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무사하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아니, 이 세계를 구하셨습니다!”
“아니……, 다들 무슨 소리인가. 너무 놀라서 머리가 어떻게 됐나? 알아듣게 설명 좀 하게.”
카이사르가 당황하여 말했더니, 레너드가 쓰게 웃으며 해명했다.
“마마께서 실로 무섭게 돌변하셨었거든요. 행여나 두 분이 잘못되면 세계 멸망이라도 일으키실 것 같았습니다.”
“세, 세계 멸망 같은 거 하는 방법도 몰라요. 모함하지 마세요, 페레스카 경.”
헬레나가 붉어진 얼굴로 변명했다. 그러나 그 말에 기사들은 도리어 경악할 따름이었다.
“방법을 알면 정말 저지르실 작정이셨습니까?”
“시끄러워! 주군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녀석들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아?! 너네 다 감봉이야!”
헬레나가 버럭 화를 내자, 기사들 모두 깨갱 하며 고갤 숙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처벌이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감봉이면 차라리 다정하게 느껴질 정도다.
“폐하, 제가 업겠습니다.”
응급 처치를 끝낸 레너드가 카이사르에게 말했다. 그러자 카이사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모양새가 안 좋은데.”
“모양새를 따지다니, 정말 무사하신 것 같아 도리어 안심이네요.”
헬레나가 미간을 좁혀 웃으며 말했다. 카이사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후, 기사들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일어난 것도 잠시, 카이사르는 핏기 없는 얼굴로 헬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미안.”
“네?”
“무사한 게 아니었네.”
갑자기 일어났더니 현기증이 핑 돌았다.
피를 너무 많이 쏟았고, 비를 맞아 체온도 떨어진 상황에, 갑자기 고도가 높아진 탓이다.
“……카이사르!”
결국 카이사르는, 농담 같은 말만을 유언처럼 남기고선 그대로 뒤로 고꾸라졌다.
만약 이게 정말 유언이 되면 창피해서 죽어버릴 거야.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