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6-5화 (15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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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와 헬레나의 요리에 대한 소식은 그날 저녁쯤에는 온 공작저에 퍼졌다.

헬레나의 요리 실력을 진작부터 알고 있던 공작저 사람들은, 결국 수프를 바닥까지 비우고 배탈이 나 드러누운 카이사르의 참사랑에 감동했다.

공작 부처는 ‘헬레나를 향한 폐하의 사랑이 정말 진실하구나!’라며, 사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수프를 조금씩 맛보았던 기사들 역시, 자신들을 살리려 한 주군의 결정에 감동받아 눈물까지 흘렸다.

자신을 희생하여 아랫사람들을 구원한 주군을 향해, 그들의 충성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고 높아졌다.

카이사르의 희생 덕분에, 공작저는 오늘도 평화롭고 안전한 일상을 보낼 수 있게 됐다.

그 평화의 진상에 대해 눈치채지 못한 것은, 카이사르가 가장 사랑하는 두 명의 여성뿐이었다.

* * *

공작저는 레지나에게 그야말로 꿀 같은 장소였다.

지나치게 예의 바른 아들과 데면데면한 성격의 딸만 겪어 왔던 페레스카 공작 부처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뛰어다니며 말썽을 피우는 레지나가 마냥 사랑스러웠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등에 업은 레지나는, 해밀턴의 잔소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신나게 뛰어놀 수 있었다.

뭐, 그것도 며칠 동안이었지만.

“……이건 무슨 놀이인지 물어봐도 될까, 딸아?”

장맛비가 시작된 늦은 밤, 장의자에 기대어 앉아 책을 읽던 카이사르는 자신을 찾아온 딸의 모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레지나는 머리에 냄비를 쓰고, 이불로 망토를 만들고, 손에는 나무 검을 쥔 채였다.

“도무지 취침용 복장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비가 오는 날은 위험해요.”

“미끄러질까 봐?”

“귀신이 나온대요.”

“귀신?”

“그거 아세요? 이 저택 지하실에는 비만 오면 파란 옷을 입은 여자 귀신이 나온대요.”

“저런. 누가 그런 얘기를 해 준 거지?”

“해밀턴이요.”

레지나의 표정은 몹시 진중했다.

카이사르는 미소 짓는 표정을 유지한 채로, 머릿속으로는 내일 해밀턴을 어떻게 괴롭혀 줄까 재빨리 계획을 탐색해야 했다.

“일단, 으음…….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엠마가 알고 있니?”

“잘 모르겠어요. 몰래 도망쳐 왔거든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들은 왜 이리 독립심이 강한 것일까.

카이사르는 지금쯤 혼이 빠져 저택을 뒤지고 있을 엠마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유모를 골탕 먹이면 안 된다고 말했을 텐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이 저택은 전혀 안전하지 않아요! 내가 어마마마랑 아바마마를 지켜 줘야 하잖아요!”

레지나가 주먹 쥔 손을 위아래로 붕붕 흔들며 소리쳤다.

“그러니까 오늘은 어마마마 아바마마랑 같이 잘 거예요!”

지켜 주겠다는 건 핑계고, 무서우니 같이 자고 싶다는 게 정답이로군.

카이사르는 제 딸의 귀여운 말장난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번졌다.

그는 읽던 책을 잠시 옆에 내려놓고, 양팔을 벌려 레지나를 불렀다.

레지나는 기다렸다는 듯 카이사르에게로 도도도도 달려가 그 품에 안겼다.

“그 마음은 갸륵하지만, 어쨌든 유모 말을 듣지 않고 말썽을 피우는 건 잘못한 거야.”

“엠마가 레지나를 미워하게 되나요?”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면 어마마마랑 아바마마도?”

레지나가 겁먹은 표정으로 카이사르를 쳐다보았다.

“엄마랑 아빠는 레지나가 어떤 사람이든 레지나를 사랑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기왕이면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딸이었으면 좋겠어.”

“……잘못했어요. 이젠 엠마를 속이고 따돌리거나, 엠마가 앉는 의자에 방귀 인형을 놓거나 하지 않을게요.”

방귀 인형은 또 뭐지. 왜 자꾸 엠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솟는 것일까.

카이사르는 쓰게 웃으며 레지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이 저택은 전혀 위험하지 않아.”

“귀신이 나오는데도요?”

“그 귀신은 해밀턴한테만 보이는 거니까 괜찮아.”

“정말로?”

“그럼. 그리고 엄마랑 아빠가 있으면 거기가 어디든 안전한 곳이야.”

“귀신도 이겨요?”

“당연하지.”

카이사르가 빙긋 웃으며 냉큼 대답했다. 솔직히 헬레나라면 귀신도 때려잡고도 남을 것 같았다.

그때 노크와 함께 방문이 열리고 레너드가 들어왔다.

레너드를 발견한 레지나가 화들짝 놀라더니, 카이사르의 겨드랑이 사이에 제 머리를 감췄다.

“엠마가 혹시 레지나 공주님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지 물어봐서 들른 것입니다만…….”

레너드가 불뚝 솟은 레지나의 엉덩이를 확인하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에 답하듯, 카이사르가 한쪽 어깨를 으쓱했다.

“이렇게 됐네.”

“네. 엠마에게 전해 줘야겠군요. 어두워졌는데 도통 보이시질 않는다며 넋이 나간 얼굴로 찾아다니고 있었거든요.”

“오늘은 나랑 같이 잘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줘.”

“알겠습니다.”

레너드가 꾸벅 인사를 한 후 방을 나갔다. 방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레지나가 고개를 빼꼼 들었다.

“자, 레지나. 들었지?”

엠마가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이제는 걱정 끼칠 일은 하지 말라는 의미였지만.

“네! 오늘은 아바마마랑 같이 자는 거 맞죠?!”

레지나는 세상 해맑은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네 살이로구나. 잔소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틀렸다. 귀여워서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카이사르는 항복을 표하듯 긴 한숨을 내쉰 후 레지나를 번쩍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오늘은 레지나에게 가장 안전한 곳에서 같이 자자.”

“신난다!”

아무래도 자신은 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너무 약한 것 같다. 뭐, 안다고 고칠 수도 없고, 고칠 생각도 없긴 하지만.

* * *

공작저 사람들과 회포를 풀고 침실로 돌아와 보니, 먼저 온 사람이 둘이나 있다.

헬레나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팔짱을 끼고 자신의 침대 위를 쳐다보았다.

카이사르와 레지나가 넓은 침대 정 가운데에 서로를 꼭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레지나가 오늘 카이사르와 잘 거라는 얘길 레너드에게 듣긴 했지만, 설마 그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침실에서 잠들어 있는 줄은 몰랐다.

‘나더러 어디에서 자라는 거야.’

침대에 올라갔다가 두 사람을 깨우게 될까 걱정이 된다. 특히 카이사르는 깊이 잠들지 못하는 성격이니까.

‘으음……, 손님 방에서 잘까.’

두 사람을 깨우는 건 역시 내키질 않는다. 결국 한참 고민하던 헬레나는 침대 앞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두 걸음을 떼기도 전에, 등 뒤에서 붙잡는 손길에 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어딜 가서 자려고?”

귓가에서 들리는 은밀한 목소리에, 헬레나는 문득 뒷덜미가 오싹해졌다.

목소리만이 아니라, 허리를 스르륵 훑으며 끌어 안는 것마저도 비밀스럽다. 하마터면 소리를 낼 뻔했다.

등 뒤에 바짝 붙은 거대한 남자의 몸집을 만끽하며, 헬레나는 천장을 보듯 고개를 들어 작게 속삭였다.

“나도 엄마한테 가서 자려고요.”

“곤란해. 헬레나가 없으면 난 잠을 잘 수가 없거든.”

“혹시 안 주무시고 있었던 건가요?”

“레지나가 잠들 때까지 내내 자장가를 불러 줬지.”

카이사르의 자장가라. 몇 번 들어 본 적이 있던 헬레나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카이사르의 입술이 헬레나의 목덜미에 쪽, 하고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러고는 헬레나를 번쩍 안아, 옆방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널찍한 카우치에 가서 살며시 내려놓는다.

“레지나는 어쩌다가 여기에?”

“해밀턴이 지하실 귀신 얘길 해 준 모양이야. 무서워서 같이 자겠다고 찾아왔더군.”

“저런.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흑역사가 떠오르네요.”

영영 기억 저편에 묻어 버린 사건이었건만, 굳이 떠오르게 만들다니. 내일이 되면 해밀턴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카이사르는 헬레나를 카우치 위에 눕힌 후, 자연스레 그녀의 네글리제 리본을 풀며 싱글싱글 웃었다.

“그때 헬레나가 조금만 더 어렸다면 무섭다면서 같이 자자고 내 침실로 달려왔을까?”

“만약 무서워서 같이 자자고 매달릴 생각이었다면, 폐하가 아니라 오라버니였겠죠.”

“음……, 헬레나가 귀신을 무서워하지 않는 용감한 어린이라 다행이었군.”

카이사르의 입술이 헬레나의 풀어헤친 가슴 위에 자국을 남겼다. 흰 피부 위로 붉은색 꽃잎 같은 자국이 점점이 피어올랐다.

헬레나는 카이사르의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카이사르 어린이는 제 침실에 꽤 여러 번 무단 침입했었죠. 안 그런가요?”

“창문으로 남의 침실에 무단 침입하던 어딘가의 괴도 어린이에게 배웠지.”

“아하. 그 괴도 어린이 이름이 H로 시작했던가요?”

“옛날엔 D로도 시작했던 것 같고.”

키득키득, 속삭이는 목소리와 잘은 웃음소리에, 두 사람의 호흡이 뒤엉켰다.

카이사르의 커다란 손이 헬레나의 다리 선을 덧그리듯 쓰다듬었다. 헬레나가 얄궂은 표정을 지으며 카이사르를 쳐다보았다.

“다친 다리는 괜찮으신 거예요?”

“그러면 언제까지 아프다고 징징거릴 줄 알았어? 딸을 감싸다가 다친 건 다친 것도 아니야.”

“미안해요. 내가 조금만 더 빨리 마차에서 내렸더라면, 추락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미안할 것 없어. 딸을 지켜 준 용감하고 멋진 아빠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거든.”

“목숨 걸고 보여 주셨네요.”

“내가 쉽게 죽을 리가 없지. 레지나가 어른이 되어 황위를 물려받을 그 날까지 살아 있을 생각이야.”

“그 후로도 오래오래 살아야지, 카이사르.”

헬레나가 카이사르의 뺨을 쓰다듬으며 명령하듯 반말로 말했다.

“황위는 얼른 큰 딸에게 물려주고, 우리는 함께 느긋한 여생을 즐기자.”

“여생이라. 하루 종일 빈둥거리면서, 여유롭게 하고 싶은 일이나 헤아리는, 그런 여생 말인가?”

“응. 나랑 같이.”

“그거 좋은걸. 모쪼록 그날까지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아야겠어.”

“며칠 전처럼 사고에 휘말리지도 않고 말이지?”

“휘말리게 되어도 내가 휘말릴 테니까, 헬레나는 안전한 곳에서 은퇴 후나 차근차근 계획하고 있으면 되겠군.”

이번엔 카이사르의 입술이 정확히 헬레나의 입술과 접했다. 헬레나는 카이사르의 목을 끌어안고 적극적으로 그와 키스를 나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호흡이 달릴 정도로 긴 입맞춤을 나눈 후에, 카이사르가 가볍게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큰딸’이라는 건, 둘째 셋째 자식도 태어날 예정이라는 건가?”

“미래는 알 수 없지. 500년쯤 전의 과거 일이라면 잘 알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헬레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다만, 오늘은 내가 좀 위험한 날인데.”

“이런.”

카이사르가 가볍게 혀를 차며 몸을 조금 일으켰다.

마치 큰일이라는 듯 말하고 있으나, 표정은 더없이 잘 됐다는 얼굴이었다.

“가끔은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것도 있어야 인생이 재미있지. 안 그래?”

“불과 몇 분 전에 안전을 얘기하셨던 분은 어디 계신지?”

헬레나가 짓궂게 고갤 갸웃하며 도발했다.

“오늘 하루만 같이 휘말리지, 뭐.”

그래, 좋지.

뭐든 함께 간다면, 그곳이 안전한 곳이든 위험한 곳이든 환영이다.

헬레나는 허락의 의미로 카이사르를 힘껏 끌어안았다.

밀착한 온몸으로 심장 뛰는 소리가 느껴졌다. 포개어진 그 소리는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에 어우러져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것이 새삼 놀라운 일이야.’

이전 것은 모두 지나가고, 다가오는 것은 새로운 것들뿐이다.

낯설고, 설레고, 기대되고, 두근거리고, 조금은 아슬아슬 위험한.

“너랑 같이 사는 건, 손끝에 맺힌 꿀처럼 달고 진귀해.”

헬레나의 그 고백에, 카이사르는 감격에 겨워 대답하듯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깊이, 깊이. 초를 세는 것조차도 열락에 휩쓸려 잊게 될 정도로 아주 깊이.

* * *

황가 일가의 휴가 기간 동안, 여기저기에는 진위 여부가 밝혀지지 않은 많은 소문이 왕왕 남았다.

홀든 영지에 원한 맺힌 여기사의 영혼이 부활하여, 무덤에서 깨어난 기사들을 이끌고 비적 떼를 싹쓸이했다든가.

그 영지를 둘러 돌아가는 길 어귀에서는, 비 오는 날이면 지키지 못한 주군을 목놓아 외치는 부하들의 절규가 들린다든가.

어느 비 오는 날, 공작저에서 정말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귀신과 마주친 해밀턴이 혼비백산하여 자신의 체험을 간증했으나, 거짓말쟁이 양치기처럼 아무도 그를 믿지 않았다든가.

그런데 그 귀신이 머리카락도 푸른색이었다든가. 해밀턴의 귀신 간증에 헬레나와 세 제자들이 가장 흡족해하며 놀려 댔다든가.

어떤 것은 진실이고. 어떤 것은 소문일 뿐이고. 어떤 것은 약간 왜곡된 진실이다.

크고 작은 위험한 일을 품고도, 모두의 세계는 오늘도 평화롭고도 안전하다.

내일은 반드시 올 것이고.

겪어 보지 못한 새로운 일은 아직도 잔뜩 남아 있고.

그리고 분명, 당신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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