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7-1화 (152/156)

○ 외전 7. 별

에버그린가는 카이사르의 친모였던 선황후의 측근으로, 사실 측근이라고 말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가문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사돈의 팔촌의 다섯째 아들네 집안 같은, 측근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게 영향력이 없었고, 그럼에도 ‘측근’이기는 했기 때문에, 마리안느가 권세를 휘두르기 시작할 무렵 가장 먼저 숙청된 가문이기도 했다.

황후를 모함하고 명예를 더럽히기 위해 사람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가문은 부지불식간에 몰락했다.

그때 로위나는 아직 미성년자였다. 아버지는 사망했고, 어머니는 자살했고, 동생은 행방불명됐다. 재산은 몰수당했고, 상냥했던 가솔들은 냉정하게 떠나갔으며, 친척들은 그녀를 쉽사리 외면했다.

간신히 어느 상단에 취업해 허드렛일을 하며 연명하긴 했지만, 어린 여자에게 제대로 몫을 챙겨 줬을 리가 없다. 정신을 차려 보니 오히려 빚만 생겨, 평생 상단에 득도 없이 묶여 있을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런 시궁창 같은 삶을 계속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을 하던 때에 그녀를 찾아온 것이―

카이사르였다.

“예전에 널 가르쳤던 사람으로부터 네 이야기를 들었어. 놀랄 만큼 영특하고 머리 회전이 빠르다며 칭찬하더군.”

로위나보다도 어린 나이였음에도, 카이사르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묵직했으며 날카로웠다.

베일 것 같은 그 목소리에 로위나는 다소 주눅이 들었다.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고급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그 자리가 몹시 불편했다.

“네가 원한다면 네게 집과 약간의 연금을 지급해 줄 수 있어. 이걸로 네가 잃은 것들을 다 보상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야.”

그는 선정을 베풀 듯 그렇게 말했다. 그 얼떨떨한 행운에 로위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또 무언가 속임수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말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네가 좋다면, 나와 함께 황성으로 가, 날 위하여 일할 수도 있어.”

그 말에, 그제야 고갤 숙이고 있던 로위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카이사르의 붉은 눈동자가 올곧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정치 싸움에 얼마나 치가 떨릴지 잘 알아. 그 탓에 넌 많은 것을 잃었으니까. 그러니까 강요하진 않을 거야. 대신 약속할 수는 있어.”

“약……, 속이요?”

“네게 마리안느 발레르가 몰락하는 것을 보게 해 줄게.”

그 말에 빛을 잃었던 로위나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되돌아온 빛은 이내 분노와 증오로 뒤엉켜 거세게 휘돈다.

“물론 녹록한 일은 아니야.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돼. 시간은 충분히…….”

“할래요.”

카이사르가 말을 마치기도 전, 로위나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녀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이사르의 앞에 다가가 무릎 꿇었다.

“당신을 위해 일할래요. 죽어도 좋아요. 어차피 이렇게 살아도 의미 없어요. 부디 제 삶에 목표를 주세요.”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이건 좀 더 심사숙고해야 할 일이야.”

“난 내 가문이 몰락하고 내 가족을 잃은 후부터 줄곧 심사숙고했어요. 부디 제게 더 오래 고민하는 괴로움을 주지 마세요.”

로위나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기쁨과 환희의 눈물이었다.

카이사르는 이런 상황을 예상치 못한 듯, 다소 난감한 표정으로 곁에 선 남성을 쳐다보았다.

큰 키의 남성은 카이사르와 눈이 마주치자,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갤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당장은 널 데려갈 수 없어.”

“제가 뭘 어떻게 해야……!”

“널 학교에 보내 줄게. 그러니 더 배워. 네가 황성에 들어왔을 때, 누구도 그 일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정도로.”

“배울게요. 악착같이 배울게요. 당신이 날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인재가 될 거예요.”

로위나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그 모습에 카이사르는 결국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기특했고, 또한 안타까웠다.

그때 줄곧 카이사르의 곁에 서 있던 남자가 로위나에게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에버그린 양. 저는 해밀턴 녹트 자작입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제가 자세히 설명해 드릴 테니, 저와 함께 가시죠.”

로위나는 해밀턴의 팔을 쥔 손을 덜덜 떨며 고갤 끄덕였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카펫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녀는 방을 나가기 직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카이사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착잡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가 어떤 이유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로위나는 알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지만.

“하나, 여쭈어봐도 될까요?”

로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굳이 저에게 이런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이유가 뭐죠?”

그녀는 지금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 ‘영특했다더라’라는 타인의 평가만 믿고 투자하기엔, 자신이 내세울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물며 그가 자신에게 굳이 집이나 돈을 제공해 줄 의무도 없다.

친지조차 돌보지 않은 힘 없는 여자아이에 불과한 그녀에게, 오로지 그만이 손을 내밀어 주었다.

로위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카이사르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허공으로 보내며 고갤 갸웃했다. 날카로웠던 그의 표정이 일순간 부드럽게 펴진 것은, 로위나의 착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스승님이 있어.”

카이사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스승님이 사람 줍는 게 취미라 말이야. 어디서 들고양이 같은 애를 하나 데려오셨더군. 내가 보기엔 갱생의 여지도 쓸모도 없어 보였는데 말이지. 그런데 그 애가 스승님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는, 나까지 위협을 느낄 정도로 검 실력이 미친 듯이 성장해 가는데…….”

거기까지 말한 후, 그는 가볍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로위나는 그에게서 처음으로 어딘가 애틋하고 그리운 표정을 보았다.

“스승님이 본을 보이셨으니, 그 제자는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어?”

로위나는 그 ‘스승님’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굉장히 키가 크고 풍채가 좋으며 여유와 무게를 동시에 가진 노인일 거라 생각했다. 세월을 관통하여 관록과 깨달음을 겸비한 그런 사람.

그 사람이 자비로운 사람이었던지라, 그 자비가 자신에게도 찾아왔다. 로위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스승님’에게 새삼 감사했다.

“실력이 있다면 과거도, 신분도 상관없어. 그러니 너도 내 곁에서 그걸 증명해 보이도록 해. 네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증명해 드리죠. 당신이 절 잊어버리기 전에, 최대한 빨리 당신 곁으로 갈 거예요.”

로위나가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다짐하듯 말했다. 그 말에 카이사르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 ‘스승님’이 자신보다 한참 연하였고, 여성이었고, 매사에 시큰둥했고, 감흥을 느낄 줄 모르고, 귀찮아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었으며,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늘 어떤 일에 얽혀 바쁘게 뛰어다니는, 자신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난 인물이었다는 건 굉장히 나중에 알게 되었다.

물론 그 사람과 자신이 얽히게 될 줄도 몰랐고.

마리안느가 문제가 아니라, 용을 때려잡는 대서사시를 펼치게 되리라는 것 역시 몰랐고 말이다.

* * *

“……허억!”

“폐하! 갑자기 왜 그러시죠?”

“심장이……, 아파……!”

“네?! 의사를 부를까요? 아니, 브란테 백작을……!”

“황후를……, 헬레나를 불러 줘……! 헬레나가 그리워서 심장이 쪼개질 것 같다……!”

“…….”

……그리고 그 카리스마 넘치던 남자가 이런 나사 빠진 팔불출의 이면을 가지고 있는 줄도, 정말정말 몰랐다.

진짜, 황제만 아니었어도 욕했을 것이다.

“로위나. 방금 입 모양으로 욕한 것 같은데.”

“잘못 보신 것이 아닌 것이 맞습니다, 폐하.”

잘못 봤다는 건지, 제대로 봤다는 건지, 카이사르가 혼란스러운 표정이 됐다.

로위나는 그가 그 문장을 해석해 내기 전에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본성을 나가 10여 분만 걸어가면 황후께서 계신 황후궁인데, 뭐가 그리 애가 타십니까?”

“물리적인 거리가 가까우면 뭐 하나! 그 황후궁에 꼬박 하루가 넘도록 못 가고 있지 않은가!”

“겨우 하루 야근하신 걸 가지고 뭘…….”

“겨우, 라니! 무려 하루가 넘게 헬레나 얼굴도 못 보고 목소리도 못 들었단 말이야!”

“그럼 어쩝니까? 가장 바쁜 연말에 폐하께서 가족 휴가를 가겠다고 우기시는 바람에 일정이 다 당겨져서 이렇게 된 걸요.”

“여름에도 일 많다고 아무 데도 못 갔지 않나! 황제는 휴가도 못 간단 말인가?!”

“그러니까 일 다 하고 가시라고요!”

결국 로위나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집무실에서 새어 나오는 고성에, 복도를 오가던 하인들이 몸을 떨었다. 아마 황제와 마주 보고 언성을 높일 만큼 간 큰 사람은 몇 명 없을 것이다.

로위나는 울컥 솟은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안경을 고쳐 썼다.

“일단 각처에서 올라온 보고서만이라도 검토가 끝나면 풀어 드리겠습니다.”

“풀어 주겠다니, 어감이 좀 그런데.”

“그럼, 석방해 드리겠습니다……?”

“다들 알아야 해. 황제의 업무가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혀 지내는 일이라는 걸……!”

카이사르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탄식했다.

“휴가 가서 두고 봐. 복수할 거야. 자네에게 휴가지 특산품을 종류별로 구해 오라고 명령을 내려 버릴 테니까 말이야.”

카이사르가 심통이 나 툴툴거렸다. 물론 로위나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서류를 살피며 대답했다.

“유감이군요. 저 연말에 휴가 받았습니다.”

“뭐?! 난 허락한 적 없는데!”

“새벽에 사인하신 예산 서류 중간쯤에 제 휴가계도 끼어 있었습니다.”

“이 사기꾼이……!”

설마 가장 믿었던 우군에게 뒤통수를 맞게 될 줄은! 카이사르는 배신감으로 몸을 떨었다. 로위나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승자의, 아니 악당의 미소를 짓는 바람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한편 의아하기도 했다.

지금껏 로위나는 정해진 휴가 외에 휴가를 따로 신청한 적이 없었다. 쉬어도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럴 시간에 돈 벌어야죠.’가 그녀의 지론이었다.

“며칠이나 쉴 예정인가?”

“보름입니다.”

“길군……. 어디 외국에라도 다녀올 생각인가?”

“아뇨. 나트렌으로 갈 겁니다.”

“나트렌이라면……, 근처에 황가 별장이 있는 도시로군. 기사단 합숙 때 이용하는 별장 말이야.”

그레이 초대 황제인 에레즈가 공작 시절 소유하고 있던 별장이 거기 있었다.

카이사르와 헬레나에게는 비밀스럽고 특별한 추억이 깃든 곳이기도 했다. 그리운 생각이 떠올라, 카이사르의 표정이 풀어졌다.

“하긴, 그 근방이 휴양지로 좋긴 하지. 원한다면 별장을 준비해 두라 하겠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머물 곳이 따로 있어서요.”

“그래? 어디인가?”

머무는 숙소로 미리 휴가 선물이라도 보내 둘까 하는 마음에 카이사르가 물었다.

“델만드 상단 본부입니다.”

“응? 휴양을 하러 가는데 웬 상단 본부……?”

“아, 휴양을 하러 가는 게 아니어서요.”

로위나가 너무나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 이번 휴가 때 거기 상단주와 결혼합니다.”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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