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7-2화 (153/156)

* * *

로위나의 결혼 소식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 직후 황후궁에 도달하기까지는 세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황후궁의 주인이 보인 반응은, 카이사르가 보인 반응과 놀랄 만큼 똑같았다.

“……뭐야?!”

기사단 훈련병 커리큘럼을 수정하던 헬레나가 기어코 펜을 떨어뜨렸다.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시종들 역시, 그 믿기 어려운 소식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농담이겠지. 무슨 중간 과정도 없이 갑자기 결혼이야?”

간신히 침착함을 되찾은 헬레나가 쓰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러나 소식을 가져온 아고트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갤 저어 헬레나의 추측을 부정했다.

“아뇨. 확실해요. 어디더라, 델……, 무슨 상단의 상단주와 결혼할 거래요.”

델로 시작하는 상단이면, 최근 급부상한 델만드인가. 헬레나는 언젠가 본 적 있는 해당 상단의 젊은 상단주를 떠올렸다. 분명 로위나보다 연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정략적인 결혼이야?”

“자유연애라던데요.”

히이이익! 주변에 서 있던 시종들이 호러 소설의 하이라이트를 접한 것처럼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실제로 호러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끝내 시종들은 헬레나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저들끼리 숙덕대기 시작했다.

“황성에서 나가시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수로 연애를 하셨을까요?”

“대체 어떻게 연애를 했는데 여태껏 티가 안 났지? 비결이 뭐람?”

“흑기사단의 가론 경이랑 친하게 지내시길래, 그분이랑 결혼할 줄 알았는데.”

“전 오히려 남자 안 좋아하시는 줄 알았어요. 두 분 정말 ‘친하게만’ 지내셨잖아요?”

“그 상단주라는 사람도 대단하네. 어떻게 에버그린 님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가론 경보다 잘생겼나?”

“성격이 좋은가? 삼대에 걸친 원수도 용서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시종들의 토론은 사그라들기는커녕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게 이렇게 불타오를 만한 일인가는 일단 제쳐 두고라도 말이다.

결국 참지 못한 시종 중 하나가 아고트에게 손짓을 해 물었다.

“아고트. 그 상단주의 어디가 마음에 들어 결혼한다는 말은 없었니?”

“왜 없었겠어요? 다들 그것부터 묻던걸요.”

“세상에. 뭐가 마음에 들었대?”

아고트가 일급비밀을 몰래 가르쳐 주는 사람처럼 한 손을 입 옆에 대고 소리를 죽여 말했다.

“그 상단주,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대요.”

여기저기서 대번에 ‘아아, 그거라면…….’ 하고 납득하는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덕분에 헬레나는 다른 사람들이 로위나를 어떤 식으로 보고 생각하는지 확실하게 알게 됐다.

그녀는 시종들끼리 떠들라고 내버려 두고, 턱을 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단주와의 결혼식이면 규모가 꽤 크겠지. 초대 손님도 많을 테고.’

사업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규모가 작은 결혼식은 아닐 것이다. 로위나가 결혼식을 이유로 상단 본부로 가는 것만 봐도 예측 가능했다.

하지만 로위나의 주변인들은 대부분 황성에 몰려 있었다.

그녀가 연애를 했다는 사실에 다들 경악할 만큼, 황성에서 일하는 것 외에 개인 시간을 거의 보내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황제나 황후를 초대하긴 어려웠을 거고. 그러면 남는 건 해밀턴 정도? 하지만 해밀턴은 휴가 때 우리랑 동행하기로 했으니까 못 가겠지.’

더군다나…….

“그나저나 에버그린 님은 가족이 없는데, 결혼식 때 누가 가족석에 앉아 있어 주는 걸까요?”

헬레나가 고민하던 것을, 아고트가 소리 내어 말했다.

그 말에 떠들썩하던 시종들도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에버그린가는 발레르가의 계략으로 오래전에 멸문당했다. 로위나에게 살아남은 가족은 없었다.

친지들은 있는 모양이지만, 가문이 멸문당했을 때 로위나를 외면한 이들뿐이라 지금은 연을 끊고 지내는 모양이었다.

“으음. 머릿수에서 밀리겠는데.”

헬레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시종 하나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싸우러 가는 게 아니에요, 마마.”

“아니, 그렇지만……. 상대방 손님만 많고 로위나 손님은 하나도 없는 파티면 좀 싫지 않아?”

헬레나의 질문에 시종들 모두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파티장을 상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들 비슷한 상상을 했는지, 표정이 썩 좋지 않게 일그러졌다.

그때까지 가십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듯 한마디도 안 하던 셀즈가, 드디어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차라리 파티는 괜찮습니다, 마마. 북적대고 정신없이 지나갈 테니까요.”

“그럼 뭐가 문제죠?”

셀즈는 서러웠던 옛일이 떠오르는 듯, 드물게 분한 표정을 꾹꾹 누르며 설명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쪽은 상단주라 하니, 동업자나 사업 관련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축하 선물을 받겠지요. 하지만 에버그린 씨는 어떤가요? 다들 결혼한다는 사실조차 이제 막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헉, 그러고 보니……!”

헬레나는 카이사르와 약혼 후 결혼을 앞두기까지, 거의 매일같이 저택 로비에 쌓여 있던 선물들을 떠올리며 탄식했다.

상단주 쪽에서는 매일같이 그런 선물이 쌓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위나는 아니겠지.

“하지만 에버그린 님이 그런 걸 신경 쓰실 것 같진 않아요.”

“신경 쓰는 분이었으면 결혼하신다는 걸 이제야 밝혔을 리가…….”

시종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며 고갤 끄덕였다.

헬레나도 그들의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로위나는 매사에 계획적이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허례허식에 치여 자존심이 꺾일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서러움은 남는다.

헬레나는 그걸 잘 알았다.

너무나도 잘 알았다.

* * *

“잠이 안 오는 모양이지?”

늦은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의 무늬를 헤아리고 있는데, 옆에 누워 있던 카이사르가 말을 걸어왔다.

헬레나는 깜짝 놀라 그가 누운 방향으로 고갤 돌렸다. 카이사르는 아예 헬레나 쪽으로 몸을 돌려 누운 채, 잔잔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무시는 거 방해할까 봐 조용히 있었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난 헬레나가 숨 쉬는 소리만 들어도 알아.”

“뭐예요, 그게. 난 아무리 폐하가 숨 쉬는 소리를 들어도 모를 것 같은데.”

“괜찮아. 그런 일에 둔감한 게 헬레나다워서 좋아.”

카이사르가 작게 웃으며 헬레나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넘겨 주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어떤 고민이 생긴 거야? 브란테 백작이 수놓은 걸 가지고 또 놀리기라도 했어?”

카이사르의 말에 헬레나가 ‘끄응’ 하고 작게 신음을 삼켰다. 불과 일주일 전, 자신이 수놓은 검은 고양이를 보고 ‘아, 참 멋진……, 흑요견이네요, 마마.’라며 말을 더듬던 율리카의 얼굴이 떠오른 탓이다.

정말 얄밉다니까. 아무렴 자신이 마수를 수놓겠는가. 심지어 그게 놀릴 목적이 아니라, 정말 어떻게든 칭찬할 구석을 찾아보려는 노력이었다는 걸 알기에 더 울컥한다.

“브란테 백작 때문은 아니에요.”

“좋아. 한번 맞혀 볼까? 레지나가 또 태피스트리에 낙서를 했나 보군.”

“그건 따끔하게 혼냈더니 더는 안 하더라고요.”

“음, 그러면 뭐지? 호크처럼 골치 아픈 수련병이 들어왔다거나?”

“호크를 능가할 만한 수련병은 다시 없을걸요.”

헬레나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웃으니 그제야 카이사르도 안심한 눈빛이 됐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로위나 에버그린에 대한 문제겠군.”

“실은, 그래요.”

헬레나가 카이사르를 향해 돌아누웠다.

“좀 야속하다고 생각했어요. 결혼은 작은 일도 아닌데, 왜 미리 알려 주지 않은 걸까요?”

“난 좀 알 것 같기도 해. 로위나는 아마 결혼이라는 행사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 거야.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말이지.”

“그런 걸 어떻게 이해하시는 거예요?”

“으음, 제국 황실의 결혼을 앞두고도, 귀찮으니까 간소하게 하자고 주장하던 게 누구였더라?”

“저였네요. 죄송해요. 제가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렸군요.”

두 사람이 동시에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옛날 생각이 좀 났어요.”

“옛날? 얼마나 옛날?”

“단테의 황제 즉위식 때요.”

“500년쯤 옛날을 말하는 거였군.”

“그때 사실 좀……, 외로웠던 것 같아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부모는 죽었고, 형제는 죽였다. 가족 하나 없는 외로운 즉위식이었다. 하긴, 가족이 있었다 해도 ‘내 편’은 아니었으니, 별 소용은 없었겠지만.

귀족들 역시 어디 하나 자신의 편은 없었다. 그저 권력 앞에 고개를 숙였을 뿐. 자신을 향한 그들의 눈빛에서, 품위라고는 없는 사생아 출신의 여자를 향한 경멸의 감정을 읽었다.

‘에레즈가 없었다면 꽤 서러웠을 거야.’

둔감하고 무심한 자신조차, 그날의 기분은 아직까지도 선명히 기억에 남아 있다.

헬레나는 로위나가 그런 기분을 느끼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번 생에서 많은 걸 누렸어요. 내가 뭘 하든 지지해 줄 가족도 있고, 축하해 줄 사람도 있고…….”

헬레나는 카이사르의 손을 잡으며 미소 지었다.

“……영원히 내 편이 되어 줄 사람도 있고.”

카이사르가 대답하듯 마주 잡은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로위나에게도 그런 것을 느끼게 해 주고 싶은 건가?”

“그럴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녀가 부담스러워할까요?”

“글쎄. 하지만 잘됐어.”

“뭐가요?”

“실은 나도 오늘 내내 헬레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정말요?”

“가족이 없는 서러움은, 내가 아무리 제국에서 두 번째로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잘 알아.”

그러고 보니, 그렇다.

카이사르 역시 남은 가족이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물론 지금 그에게는 헬레나가 있고, 레지나가 있지만 말이다.

헬레나는 짓궂게 웃으며 고갤 갸우뚱했다.

“두 번째로 강한 사람이라는 건 무슨 뜻이죠?”

“첫 번째는 지금 내 눈앞에 누워 계신 스승님이거든.”

“아, 참. 내가 제일 강했지.”

가벼운 농담이 오고 갔다.

헬레나는 이런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했다. 애쓰지 않아도 되고,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 노력하지 않아도, 발버둥 치지 않아도 괜찮다.

무위하게 시간을 낭비해도 옆에 있는 이 사람이 자신을 떠날 일은 없을 테니까.

“로위나는 나에게 더없이 중요한 인재야. 그런 그녀가 한 순간이라도 주눅 들게 만들 수야 없지.”

“맞아요. 로위나에게 그런 건 어울리지 않아요. 무엇보다 전 아주 좋은 복수의 기회라고 생각해요.”

“복수?”

“폐하의 성인식 때며 결혼식 때며……, 제가 귀찮으니 관두자고 하는데도 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꾸며 준 게 누구였게요?”

카이사르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헬레나는 카이사르의 반응이 얄밉다는 듯 괜히 그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

그녀에게 로위나를 붙여 준 게 카이사르였으니, 사실상 공범이나 마찬가지니까.

“잘됐군. 당한 건 반드시 갚아 주는 게 도리지.”

“그렇죠?”

“그러면 내일부터 복수의 계획을 한번 세워 볼까?”

“거국적으로.”

“그래. 거국적인 스케일로.”

헬레나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 거절하지 않을 카이사르이지만, 이번만은 그것과 상관없이 의견이 적극적으로 일치했다.

마치 부부 사기단이라도 된 듯, 두 사람은 짓궂은 일을 꾸미는 악당처럼 한참을 키득거리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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