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7-3화 (154/156)

* * *

황가의 업무에서 벗어난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델만드 상단의 본부로 향하는 마차 안. 로위나는 마차의 작은 차창을 열어 바람을 쐬며 오랜만에 여유를 만끽했다.

“이러니 폐하께서 자꾸 농땡이 치고 놀러 다니시는 건가…….”

휴가를 얻어도 딱히 할 일이 없어, 밀린 업무나 하러 집무실로 향하는 인생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가족이 없으니 텅 빈 집에 멍하니 홀로 있는 것이 막막했던 것 같다. 쉬는 시간이 주어져도 뭘 하며 쉬어야 할지 잘 몰랐다.

특히 마리안느 발레르가 죽은 후에는, 자신을 채찍질하고 끌어당기던 긴장감이 툭 끊어진 느낌이었다.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우왕좌왕했다.

그런 차에 델만드가 청혼을 해 왔다. 돈이 많고 안정된 직장이 있다는 것도 물론 마음에 들었지만, 청혼할 때 그의 말을 듣고 마음을 확정했다.

“더는 그대가 텅 빈 집으로 귀가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그대가 올 집에서 내가 기다리겠습니다.”

“전 평생 일만 하던 사람이라 살림은 하나도 못 합니다.”

“뭐 어떻습니까? 저도 못 합니다.”

“둘 다 못 하면 어떻게 하죠?”

“걱정하지 마십시오. 살림은 제 금고의 돈이 할 것입니다.”

그 말에 로위나는 감격이 흘러넘쳐 입을 틀어막았다. 역시 돈이 최고다. 그 돈을 쓸 줄 아는 남자는 더욱 최고…….

……으음. 역시 돈 때문에 이 결혼을 선택한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렴 어때.’

평생 결혼 따위 안 하고 혼자 살 줄 알았는데, 어쨌든 결혼을 하게 됐다는 점을 기꺼워하도록 하자.

집 한 채 없는 지평선을 가로질러 한참을 달린 마차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덧 도시로 들어섰다.

얼마 가지 않아 마차는 델만드 상단 본부의 대문을 지나, 광장만큼 넓은 본부 마당에 멈춰 섰다.

로위나가 마차에서 내리니, 기다렸다는 듯 델만드가의 시종들이 그녀에게 달려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들 모두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로위나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나이가 정정한 집사가 앞으로 한 걸음 나아오며 대답했다.

“이제 막 도착하셨는데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두 분의 결혼 축하 선물이 로비에 쌓여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로위나는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끄덕이긴 했지만, 솔직히 이들이 이렇게 호들갑 떠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델만드는 손에 꼽을 정도로 큰 상단이었다. 그 상단주의 결혼인데, 선물이 많이 들어오리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명령을 내려 주시면, 말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음, 글쎄요. 저보다는 델만드 씨에게 물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군요.”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으니, 로위나는 아직 이 델만드가의 안주인이 아니었다. 델만드 앞으로 온 선물을 자신이 나서서 처리하는 건 아닌 일일 것 같았다.

로위나의 말에 시종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집사가 더욱 난감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상단주님 편으로 도착한 선물이라면, 어제 이미 정리가 끝났습니다.”

“……네?”

“에버그린 님 편으로 도착한 선물들입니다.”

응?

로위나의 눈썹이 팔자 모양으로 변했다. 자신이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럴 리가요? 전 가족도 없고 친구도 많지 않아서 그렇게 많은 선물이 올 만한 곳이 없습니다. 더구나 결혼을 하는 것도 주변에 알리지 않았고…….”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더욱 멋대로 처리할 수가 없었던 거고요. 하지만 이제 정말이지, 로비에 둘 자리가 없을 만큼 포화 상태라…….”

“제, 제가……, 일단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뭔가 일이 꼬였거나, 이들이 잘못 알고 있거나, 오해가 있거나. 하여튼 로위나는 그것들이 자신의 선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델만드가 친가 하나 없는 로위나를 배려하여 일부러 로위나 편으로 선물을 주문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본인이 받은 선물보다 많은 양을 주문했을 리는 없을 테니, 역시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수밖에…….

“……으음.”

그러나 로비에 들어선 순간, 로위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로비에는 계단 양쪽으로 온갖 선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마차 수십 대의 분량쯤은 될 것 같았다. 많은 수준을 넘어, 과했다.

로위나는 쌓여 있는 선물의 탑에 다가가, 상자 몇 개의 발신처를 살펴보았다.

[그레이가 에버그린의 결혼을 축하하며]

[페레스카 공작가 드림]

[브란테 백작 드림]

[헬레나 페레스카와 그의 남편이 로위나 에버그린에게 사랑을 담아]

[제국 흑기사단 일동]

[해밀턴 녹트 자작, 친애하는 업무 동지를 위하여]

“……제 것 맞네요.”

이 인간들, 설마 이렇게 선물 폭탄을 보내오면 감동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황가를 떠나왔는데, 왜 일이 더 늘어난 기분이 들지!’

이 엄청난 작당 모의를 누가 시작했을지 눈에 선하다.

로위나는 눈물 고인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허공에 헬레나와 카이사르, 그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륙 최강의 악당 부부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모습이 스르륵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돌아가면……, 두 사람 모두에게 엄청 빡센 스케줄을 짜 버릴 테다!

“음, 일단……. 모두 방으로 옮겨서 개봉하는 걸 도와주시겠습니까?”

로위나가 시종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종들의 눈빛이 존경과 부러움으로 빛나고 있다는 것을.

시종들만이 아니다. 본부에 머무는 상단 관계자들 역시, 하나같이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럴 만하다. 몰락한 가문. 변변한 재산도, 땅도, 일가친척 하나 없는 여자. 델만드가 그런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염려하고 우습게 알았겠는가.

그런데 그 여자 앞으로 황가의 이름이며 고위 귀족가의 이름이 적힌 선물이 로비가 터져 나갈 수준으로 밀려드니, 놀랄 수밖에.

‘뭐……, 결혼식 직전에 싱숭생숭할 일은 없겠네.’

턱을 조금 치켜들며, 로위나는 괜히 큼큼 헛기침을 했다.

* * *

“후후, 로위나 에버그린……. 지금쯤 내 치밀한 복수에 정신 못 차리고 우왕좌왕하고 있겠군…….”

해안 도시에 위치한 황가 소유의 별장.

카드놀이를 하다 말고 갑자기 혼자 악당처럼 웃는 헬레나의 모습에 카이사르가 폭소를 터뜨렸다.

“즐거워 보이는군.”

“물론이죠. 로위나도 한번 당해 봐야 한다니까요. 아르핀 공방의, 목이 부러질 것처럼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목걸이를 보고 한번 경악해 보라지.”

지방에 작은 저택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을 정도로 묵직한 그 목걸이 말인가.

사실상 혼수로 집 한 채 보내 준 것과 다름없다는 걸 로위나가 모를 리 없을 테니, 경악을 하긴 할 것이다.

“헬레나가 선량하게 사악한 사람이라 나는 기뻐.”

“선량하다는 거예요, 사악하다는 거예요?”

“원래 인간이란 모순된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는 법이지.”

카이사르가 카드를 테이블에 엎어 놓고 헬레나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그는 헬레나를 품에 끌어안은 채 장난을 치듯 몸을 좌우로 흔들거렸다.

“헬레나가 무언가를 썰거나, 베거나, 찌르는 것 말고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게 있어서 참 다행이야.”

“제가 무슨 검에만 미친 사람인 줄 아세요?”

“물론 아니지. 나에게도 미쳐 있잖아?”

카이사르가 헬레나의 왼쪽 뺨에 입을 맞췄다.

“물론 내가 헬레나에게 더 많이 미쳐 있긴 하지만 말이야.”

이번엔 오른쪽 뺨에 입을 맞췄다.

그가 이런 식으로 장난치는 일이 예전에는 낯간지럽고 어색했다. 아니, 사람과 이렇게 치대는 일 자체가 헬레나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졌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것이, 딱 맞아떨어지는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춘 듯 안정적이고 편안하다.

그것이 모두 카이사르의 노력 덕분이라는 것을, 헬레나는 잘 알았다.

헬레나는 상체를 조금 돋우어, 자신이 먼저 카이사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누가 누구에게 더 많이 미쳐 있는지는 장담 못 하죠.”

“이런. 날 죽일 셈이야?”

“자랑스러워하세요. 이 헬레나 페레스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헬레나의 눈동자가 오만하게 빛났다. 카이사르는 그것이 못 견딜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앞에 있으면 자신이 황제라는 사실조차 무의미해진다.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그 발에 이마를 맞대며 경외하고 싶어진다.

이토록 강하고 아름답고 빛나는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니. 자랑스럽지 않으면 말이 안 되지.

“날 이렇게까지 행복하게 띄워 줘도 괜찮아?”

“왜요? 죽을 것같이 좋아요?”

“이미 죽었어.”

카이사르가 헬레나를 소파에 풀썩 눕히고 쇄골에 마구 키스를 퍼부었다. 헬레나는 간지러움에 큰 소리로 웃으며 카이사르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후다닥 몸을 일으켜 앉았다. 정말 아슬아슬한 타이밍으로 아고트가 방에 들어왔다.

“마마. 부르셨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아, 그래? 올라오시라고 해.”

헬레나가 허둥지둥 옷매무새를 고치며 말했다. 아고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카이사르를 쳐다본 후 방을 다시 나가니, 카이사르가 헬레나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며 물었다.

“부른 손님?”

“여기 오기 전에 미리 약속해 둔 사람이 있어요.”

“남자야?”

“어머, 질투해요?”

헬레나가 카이사르의 입가에 묻은 립스틱을 닦아 주며 놀렸다. 카이사르는 어린애처럼 얌전히 헬레나의 손길에 자신의 얼굴을 맡겼다.

“말하지 않았던가?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설령 무생물이라고 해도 헬레나가 정 주는 건 다 질투가 나.”

“자기가 내 첫 번째면서.”

“난 헬레나가 전부이니까.”

이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점이 기쁘고 무섭고 황홀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의 손님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말쑥한 차림에 정숙한 외모가 눈에 띄는 젊은 남자였다.

그는 예의 바르게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잘 배운 모범생 이미지가 풀풀 풍겼다. 융통성 없어 보이는 것이 딱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카이사르는 그를 한 번에 알아보았다. 동시에 헬레나가 왜 그를 불렀는지도 깨달았다.

“어서 오세요, 델만드 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헬레나가 그에게 의자를 권하며 생긋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카이사르는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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