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소환된 용사는 레벨 10이 되면 직업이 정해진다.
그전까지는 ‘적성’에 불과할 뿐.
진짜 직업은 그때 결정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소환된 용사 중에서는 그 적성과 다른 직업을 갖게 된 이들도 있었다.
지구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적성 검사에서 나온 결과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니까.
여기에선 그 적성이라는 것의 정확성이 말도 안 되게 높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그 직업을 얻게 되는 건 아니었다.
서우진은 그것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자신이 꼭 ‘마왕’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희망 말이다.
물론 계속해서 자신의 적성은 숨겨야겠지만 말이다.
만약 서우진의 적성이 밝혀진다면, 가장 위협이 될 사람은 누구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당연히 용사들이었다.
그들이 소환에 응한 것 자체가 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함이었으니까.
딱히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밝혀지는 즉시 목을 따기 위해 달려들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들은 멀리 떨어져 있다.
게다가 떼로 덤비지만 않는다면, 솔직히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거란 자신도 있었다.
정말 위험한 사람은 주위에 있다.
아일린, 테스테론, 푸른 방패의 기사들.
언제든지 자신의 목에 검을 꽂아 넣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깝고 강한 자들 말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일 위험한 건…….
‘반 슬레인.’
서우진의 고개가 서서히 뒤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예의 잘생긴 은발의 청년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충!”
갑자기 등장한 반 슬레인의 모습에 깜짝 놀란 아일린이 급히 군례를 올렸다.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준 그는, 서우진을 향해 물었다.
“그간 잘 지냈는가?”
입안이 바짝 말라왔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 1위에 주저하지 않고 뽑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아, 네네.”
서우진은 불안함을 최대한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정식으로 인사하도록 하지. 나는 반 슬레인이라고 한다네.”
‘압니다.’
이쯤 돼서까지 모른다면 그건 정말로 반푼이었다.
서우진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반 슬레인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금년의 추위가 평년에 비하면 꽤나 매섭네만.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군.”
‘잘 버티긴 개뿔.’
서우진은 속으로 울컥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덕분에요.”
마법이 걸린 옷을 가리키며 대답하자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제는 좀 믿음이 가는가?”
그의 물음에 서우진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첫 만남에서 사기꾼 취급을 했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땐 죄송했습니다.”
사실 서우진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지금 그에게 찍혀봐야 좋은 꼴을 볼 순 없을 테니 일단 사과부터 했다.
“사과는 내가 해야지. 그날 놀라게 해서 미안했네.”
반 슬레인이 손을 내저었다.
“그나저나 남의 집 종살이를 하려던 계획은 이제 포기한 겐가?”
“…누구 덕분에요.”
서우진은 아일린과 반 슬레인을 슬쩍 번갈아 노려봤다.
그 시선을 확인한 반 슬레인이 껄껄 웃었다.
“눈치를 챘군?”
“모를 수가 없죠. 갑자기 그렇게 노골적인 감시가 붙었는데.”
물론 당시엔 그가 고자질을 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말이다.
“이해하게. 내 입장에선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용사가 도망치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지 않은가?”
그 말에 서우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소중한 용사?’
소환된 이후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처음엔 환대를 받긴 했지만, 자신을 D급이라 소개한 이후에는 언제나 냉대를 받아왔으니까.
어찌 보면 병사들보다 서우진을 고깝게 볼 사람이 반 슬레인이었다.
그는 매시브 가디언을 지킬 의무가 있는 총사령관이자 영주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서우진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존중을 해주었으면 해줬지.
‘왜 그러지?’
자신을 우호적으로 대해주는 사람은 처음 봤기에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일린.”
하지만 서우진이 고민을 이어가기도 전에, 반 슬레인의 음성이 정신을 일깨웠다.
“말씀하십시오.”
“그간 고생 많았네.”
“과한 말씀이십니다. 고생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 사람을 계속해서 지켜본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지.”
서우진은 둘의 대화를 들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감시 대상이 된 장본인 앞에서 저런 말을…….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명을 받듭니다.”
아일린은 절도 있는 모습으로 군례를 올렸다.
“그리고…….”
반 슬레인이 이쪽을 쳐다봤다.
왜 그러나 싶어 눈을 끔뻑이고 있는데, 그가 서우진의 손을 붙잡았다.
“자네는 나를 좀 따라오지.”
다짜고짜 이끄는 손에 서우진은 속절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어, 어디를 가는 겁니까?”
왠지 모를 불안감 속에 서우진이 물었지만, 그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숙영지와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서우진은 조금씩 차오르는 불안감에 힘을 줘보았지만, 레벨 1의 그가 반 슬레인의 힘을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반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끌려간 종착지는, 숙영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위였다.
그곳에서 본 아래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과 그것을 반사시키고 있는 끝없이 펼쳐진 하얀 대지.
그 위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사들.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장엄한 모습이었다.
서우진이 잠시 넋을 놓고 있자, 반 슬레인은 그제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멋있지 않은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멋이 있긴 했으니까.
“그런데 왜 여기에……?”
단순히 이 광경을 보여주기 위함은 아닐 터였다.
장관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딱히 웅심 같은 게 일어나거나 하진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춥지.’
감탄도 잠시.
엄습해 오는 얼음 바람에 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D급의 검병이라 들었네.”
서우진의 안색이 살짝 굳어졌다.
‘빌어먹을.’
호인처럼 보이던 그도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나 싶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정말 등급이라도 조금 높여서 말할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대를 탓하자는 게 아니라네.”
서우진의 표정을 본 반 슬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간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내 이미 짐작하고 있네.”
그는 미안함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서우진을 위로했다.
‘음…….’
솔직히 말하자면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이런 말 한마디로 풀릴 정도였으면, 애초에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마음 한쪽이 조금 편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옛이야기를 하나 해도 되겠나?”
누가 노인 아니랄까 봐, 반 슬레인은 다짜고짜 서우진에게 옛날이야기를 시작했다.
“세 번째 마왕이 강림했을 시절의 이야기네.”
너무도 오래전의 일이라 기록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시절.
“기록상으론 그때 소환된 용사의 수는 고작 두 명이었지.”
‘겨우?’
이번 소환이 특히나 성공적이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차이가 나도 너무 났다.
무려 98명이나 차이가 났으니 말이다.
“당시에도 꽤나 심각한 일이었다고 하네. 적어도 다섯 명 이상은 소환할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고작 두 명이었으니까.”
물론 숫자가 적으면 그만큼 집중적인 지원을 받으면 더욱 빠르게 성장하겠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두 명이면 적어도 너무 적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중 한 명이 D급이었던 게지.”
“아…….”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아왔는지를 생각해 보니, 당시의 용사가 너무도 불쌍해졌다.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려왔다.
“그런데 말일세.”
반 슬레인이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서우진을 바라봤다.
“마왕의 목을 벤 것은 그 D급 용사였다네.”
서우진의 눈이 커졌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D급은 타 등급에 비해 성장 속도도 느리고, 성장의 폭도 좁다.
처음엔 비슷할지 몰라도,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생긴다는 뜻이었다.
같은 레벨 100이라 하더라도, D급과 S급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차이가 난다.
그러니 선입견이 생길 수밖에.
한데 그런 D급이 마왕의 목을 베었다니, 서우진이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서우진은 당연히 대답하지 못했다.
반 슬레인 역시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는지, 곧바로 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자네들이 버스라 부르는 것.”
서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반 슬레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버스를 타서 가능했다는 말인가? 그건 지금도 하고 있다며?’
정작 자신은 그 편한 길을 걷지 못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서우진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D급의 용사는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성장을 했다네.”
서우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물론 각 왕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성장을 한다면, 매우 빠르게 강해질 수 있겠지.”
그러라고 타는 버스였으니까.
기사들이 몬스터를 상대하고, 용사들은 뒤에서 기다리다 빈사 상태가 된 몬스터에게 막타를 친다.
그럼 게임처럼 경험치가 들어오고, 레벨이 오르는 성장 방식.
이것보다 안전하고 빠른 길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서우진은 단번에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게임에서도 똑같지.’
엄청난 현질을 한 뒤 게임을 시작하는 지갑 전사.
그들은 빠르게 아이템을 파밍하고 레벨을 올리기 위해 돈을 주고 버스를 탄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남는 건 무엇일까?
숙련 코스프레의 줄임말인 일명 숙코 취급을 받으며 파티의 기피 대상이 되지 않던가?
게임 실력은 없고, 공략법도 모르며, 그저 레벨만 높고 아이템만 좋은 뉴비.
결국은 마을 한가운데 서서 자신의 캐릭터를 자랑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물론 버스를 탄 이후에 노력을 해서 게임에 잘 적응하는 이들도 많긴 했지만…….
‘이걸 말하는 걸까?’
쉽고, 편하고, 안전하게만 성장한 용사들과 목숨을 걸고 처절하게 성장한 용사.
만약 같은 레벨이라면 누구의 실력이 더 좋을지는 뻔했다.
“하지만 등급의 차이는요?”
생각을 정리한 서우진이 물었다.
안 그래도 등급이 낮아 성장도 느릴 텐데, 거기에 버스도 타지 않았다면 그 속도는 현저히 뒤처질 터였다.
아무리 실전 경험이 압도적이라고 해도, 등급과 레벨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반 슬레인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당시의 기록은 대부분 유실되어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으니.”
서우진은 김이 팍 새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진짜 D급은 아니었지만, 만약 그 용사가 성장한 방식을 알게 된다면?
‘측정 불가’ 등급인 자신은 더욱 강해질 수 있었을지도…….
“그래도 하나는 확실하다네.”
실망감을 느낀 탓일까?
반 슬레인은 서우진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용사들은 굴리면 굴릴수록 더욱 강해진다는 사실 말일세.”
서우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자신을 개처럼 굴려먹겠다는 뜻 아닌가?
“걱정하지 말게. 내 자네를 100명 중 가장 강력한 용사로 만들어줄 터이니.”
인자한 그의 미소가, 서우진의 눈에는 왠지 마왕의 그것처럼 보였다.
그 반응에 반 슬레인이 껄껄- 웃으며 몸을 돌렸다.
“이제 내려가세.”
무엇이 그리 신난 것인지 웃음을 터트리며 언덕 밑으로 걸음을 옮기던 반 슬레인은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드레이카스가 서우진의 앞에서 겁을 먹고 멈춰 섰던 그 장면을 말이다.
‘자네가 감추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군.’
반 슬레인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강하게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