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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으로 살아남는 법-24화 (25/116)

#24화.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을까?

서우진은 이를 갈며 생각했다.

“하체는 굳건히!”

스걱-!

반 슬레인의 음성과 함께, 허벅지에서 피가 튀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서우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움직임이 굳어버리기엔, 그동안 반 슬레인에게 당한 것이 너무 많았다.

“흐읍!”

두 다리를 대지에 단단히 고정시키고는 검을 내리 그었다.

공기가 갈라지며 흑색의 검신이 반 슬레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벼락과도 같은 참격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반 슬레인.

이 세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강자다.

웬만한 기사들은 제대로 된 반응도 하지 못하고 머리가 쪼개질 공격이었지만, 그는 슬쩍 고개를 젖히는 것만으로도 쉽게 피했다.

콰과과곽-!

서우진의 검끝에서 흘러나온 마력이 땅을 갈아엎었다.

“아직 힘을 낭비하고 있네. 집중!”

엄청난 위력이었지만, 반 슬레인이 보기엔 단순한 마력 낭비였다.

검에 응축되지 못한 마력의 찌꺼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온 것이다.

물론 이것도 대단한 일이긴 했지만, 반 슬레인은 더욱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때, 서우진의 검이 허공을 수놓았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움직임에 반 슬레인은 감탄했다.

토벌에서 돌아온 지 9개월.

그간 반 슬레인은 서우진을 혹독하게 가르쳤다.

검과 체술, 마력 운용법까지.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오직 수련에만 몰두시킨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급 기사들과의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까지 매일 이어졌다.

덕분에 서우진은 점점 강해졌다.

몬스터를 사냥하지 못해 레벨은 그대로였지만, 실력 자체는 토벌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능숙해진 것이다.

반 슬레인은 레벨이 강함의 절대적인 척도라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레벨 업을 할수록 강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마력이 많고, 스킬을 많이 가지면 무엇하나?

그것을 제대로 다룰 줄 알아야 진정한 강자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서우진에게 혹독할 정도로 검을 가르쳤다.

그 결과물이 이것이었다.

핏-!

‘대단하구나!’

반 슬레인은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자신의 은색 머리카락을 쳐다봤다.

아무리 힘에 제한을 두었다고는 하지만, 서우진의 검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베어낸 것이다.

테스테론, 아니, 시온의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걸 이제 검을 잡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애송이가 해냈다.

경이로울 정도로 빠른 성장이었다.

“여기까지만 하세.”

챙-!

맑은 쇳소리와 함께, 서우진의 검이 움직임을 멈췄다.

“후욱- 후욱-”

거친 호흡이 들렸다.

하긴, 무리도 아니었다.

지금 서우진은 반 슬레인과 무려 세 시간 동안 대련을 이어가고 있었으니까.

“이제 좀 봐줄 만해진 것 같군.”

“그, 그렇습니까?”

“물론이네. 아직 갈 길이 멀긴 하네만, 처음 봤을 때를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지.”

반 슬레인은 대견하다는 듯 칭찬했지만, 서우진은 전혀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무려 9개월이다.

그동안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수련에 매진했는데, 고작 머리카락 몇 올 잘라내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만족을 할 수 있을 리가.

하지만 많은 발전이 있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순 없었다.

“감사합니다.”

서우진은 반 슬레인을 향해 허리를 숙여 감사인사를 했다.

솔직히 그와 함께 수련을 한다는 사실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언제 실수해서 자신이 마왕이라는 걸 들킬지 몰랐으니까.

그럼에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수련을 시작한 건, 강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반 슬레인은 서우진의 스킬 같은 것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몸을 쓰는 것과 마력을 다루는 방법에만 집중한 것이다.

덕분에 서우진은 꽤나 큰 성장을 이루어냈다.

그 대가로 죽을 만큼 개고생하긴 했지만 말이다.

“아닐세. 오히려 군말 없이 따라와 준 자네에게 내가 더 고맙지.”

반 슬레인은 흐뭇한 눈으로 서우진을 바라봤다.

“자네가 이곳에 온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구만.”

정확히는 11개월이다.

“그동안 참 많이 변했어.”

육체도, 성격도, 마음가짐도.

“모두 도와주신 덕분이죠.”

“허허, 우리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반 슬레인이 손을 내저었다.

단순한 겸양이 아니었다.

실제로 시온의 지원은 타 왕국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왕국에 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단련시켜 주지 않았습니까?”

반 슬레인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서우진이 처음이었다.

매시브 가디언의 기사들조차도, 가끔 한마디씩 듣는 조언 정도가 전부였던 것이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이니…….”

반 슬레인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분위기를 바꾸려는 것인지, 말을 돌렸다.

“자네와 이렇게 검을 나누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군.”

“아…….”

서우진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벌써 그렇게 됐군요.”

모든 용사는 각 왕국에서 지원을 받아 성장을 한다.

그 기간은 1년.

그 후에는 제국으로 다시 돌아가 체계적인 훈련을 거치게 될 예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올해 토벌도 참여시킨 후에 보내고 싶었네만, 아쉽게도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군.”

토벌을 몇 달 앞당겼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병사들의 부담이 커진다.

반 슬레인의 입장에선 만반의 준비를 하고 토벌에 나서고 싶을 터였다.

그래야만 병사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죠.”

서우진 역시 살짝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한 번 더 토벌에 참가한다면 레벨을 꽤나 올릴 수 있었을 텐데.

“다른 녀석들은 벌써 20레벨을 넘겼다면서요?”

서우진을 제외한 대부분의 용사들은 20레벨을 넘긴 지 오래였다.

그중 빠른 이는 30레벨에 도달했다고 하니…….

고작 10레벨에 불과한 서우진은 상당히 뒤쳐졌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걱정되나?”

반 슬레인이 물었다.

그러자 서우진이 히죽- 웃었다.

“설마요.”

레벨이 다가 아니다.

지난 9개월간 뼈저리게 느꼈다.

서우진은 자신이 다른 용사들에 비해 부족할 것이란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

“그럼 되었네.”

자신 있는 서우진의 모습에 반 슬레인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과 내일은 쉬고, 모레쯤 출발하는 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딱히 정리라고 할 것은 없지만, 이곳에서 맺은 인연들도 있다.

그 수가 많진 않았으니, 하루면 작별인사를 하고 출발 준비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리고 아일린이 자네와 함께 가기로 했다네.”

“……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그녀와는 꽤나 친해졌다.

서로 데면데면했던 분위기는 함께 토벌을 하며 사라진 지 오래였고, 매일 검을 맞대며 훈련했으니 친해지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지금에 와서는 서로 말을 편하게 할 정도의 사이가 되었을 정도였다.

“아일린은 푸른 방패 기사단 소속이잖아요?”

“그렇지.”

“매시브 가디언을 떠나도 되는 겁니까?”

그것도 토벌이 다가오는 이 시기에?

“중급 기사 한 명이 빠지는 것이 좀 아쉽기는 하네만, 그 아이가 원한 일이라네.”

아일린은 그동안의 수련으로 중급 기사가 될 수 있었다.

서우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녀 역시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녀가 원한 일이라니?

누구보다 북방의 수호자라는 자부심이 있는 그녀가 매시브 가디언을 떠나는 게?

“거절하진 말게. 어차피 자네도 제국으로 향하려면 길잡이가 필요하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중급 기사가 길잡이라니.

이게 무슨 사치인지 모르겠다.

“휴우… 알겠습니다.”

본인이 직접 자원했고, 반 슬레인이 허락했는데 안 된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좀 의아했을 뿐이다.

“그럼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하게.”

반 슬레인은 서우진의 어깨를 두드리곤 몸을 돌려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제국이라…….’

잠시 아일린의 이야기로 빠졌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1년 만에 한자리에 모이는 100명의 용사.

그 사이에서 마왕인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그걸 고민해야 할 때였다.

작별인사는 짧았다.

사실 서우진이 인사를 건넬 사람이 그리 많진 않았으니까.

테스테론, 제라드, 조한.

그리고 생사를 함께했던 몇몇 병사.

그들과의 짧은 인사를 끝낸 서우진은 마지막으로 반 슬레인과 마주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처음엔 꺼려지는 양반이었다.

아니, 지금도 꺼려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

예전처럼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반 슬레인이 없었다면, 서우진은 아직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해도 지금처럼 강해지지는 못했을 테고.

여러모로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헤어짐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을 걸세.”

마왕의 강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확히 언제 전쟁이 시작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각국의 예측으로는 아무리 늦어도 5년 내.

빠르면 내일 당장에라도 마왕이 강림할 수도 있었다.

그때가 되면 서우진은 다시 한 번 반 슬레인과 마주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게 마왕군 대 용사군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서우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반 슬레인이 내민 손을 잡았다.

“최대한 천천히 왔으면 좋겠네요.”

여러모로 그게 좋을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랬으면 좋겠군.”

서우진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반 슬레인은 허허- 웃으며 넘겼다.

그러곤 아일린을 쳐다봤다.

아무런 말도 없이 서우진의 옆에 가만히 서서 대기하고 있는 그녀는, 처음 봤을 때의 싸늘한 모습 그대로였다.

“제국까지는 갈 길이 멀다.”

“알고 있습니다.”

이동하는 데만 한 달이라는 시간이 소모되는 머나먼 거리.

“네가 알아서 잘할 것이라 믿는다만, 그래도 몸 조심히 다녀오너라.”

반 슬레인의 말에는 걱정과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일린은 조금 머뭇거리다 군례를 올렸다.

송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성대한 행사도, 아쉬움의 이별도, 그 흔한 덕담도 없이.

늘상 있는 일이라는 듯이 그렇게 두 사람은 매시브 가디언을 떠났다.

그리 멀지 않은 재회를 기약하면서 말이다.

‘결국 다시 돌아가는구나.’

설렘과 기대보다는 걱정과 근심이 가득했다.

부디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라며, 서우진은 아일린과 함께 제국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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