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그동안 서우진은 똑같은 일상을 보냈다.
아침, 점심, 저녁 수련.
아일린, 이지아와 함께 땀을 쭉- 빼고는 잠자리에 든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김다혜가 그 수련에 끼어들었다는 것이다.
“저도 낄래요.”
머뭇거리며 말을 걸어오는 김다혜를 받아주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K-2를 쏴보고 싶다는 생각도 조금 있었고.
결국 유홍설은 합류하지 않았지만, 서우진에겐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온실 속의 화초로 계속 살고 싶다는데, 굳이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아카데미 공식 일정이 시작되기 하루 전.
평소처럼 격한 수련을 마친 뒤 잠시 쉬고 있는데, 이지아가 은근슬쩍 다가와 물었다.
“아저씨는 왜 이렇게 강해요? D급 맞아요? 난 A급인데, 왜 계속 내가 지지?”
이지아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니었다.
서우진의 몸에 난 수많은 상처를 보고도 모른다면, 그건 그냥 바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등급과 레벨은 절대적이다.
이지아가 수도 없이 들어온 말일 것이다.
그게 이 세계의 상식이기도 했고.
그 상식에 동의하지 않고, 서우진을 굴려댔던 반 슬레인이 이상한 것이다.
“너도 계속 수련하다 보면 강해질 거야.”
서우진이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사실 D급이 아니라 ‘측정불가’ 등급이라고 말을 해줄 순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등급이 절대적이라는 말도 틀린 건 아닌가?’
모르겠다.
그런 복잡한 생각은 별로 하고 싶지도 않고.
그런 걸 고민할 시간에 검을 한 번 더 휘두르는 게 나았다.
“그래도 스킬 쓰면 내가 이길 거 같긴 한데…….”
이지아는 아직 승복하지 않았다.
자신이 A급 용사라는 것에 자부심도 있었고, 대련에 제한이 많다는 사실도 그 생각에 한몫했을 것이다.
“다음에 하자, 다음에.”
하지만 스킬까지 사용해서 대련을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무리 서우진이라고 하더라도, 스킬을 쓰는 이지아를 쉽게 제압하긴 힘들 테니까.
‘많이 다치겠지.’
손속에 사정을 두는 것도 불가능해질 테니, 정말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지금은 이렇게 실전 감각에 익숙해지는 것에 집중할 때였다.
“저는요?”
그때, 김다혜가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너는… 음.”
그녀와의 대련은 조금 달랐다.
애초에 몸을 쓰는 직업도 아니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능력이 조금 애매하긴 했다.
직접 본 것들은 그려서 소환할 수 있지만, 제한이 있었다.
“레벨을 올리는 것에 올인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소환수의 능력은 김다혜의 레벨에 비례한다.
그러니 이지아와는 달리, 무식하게 레벨만 미친 듯이 올려도 된다는 뜻이었다.
직접 싸우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 대련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짧은 시간 동안 꽤나 많은 활용법을 익혔지.’
김다혜와의 대련에선 스킬을 허용했다.
‘화공’의 특성 상 스킬을 제한하면 죽도 밥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김다혜는 이전보다 유연하게 스킬을 활용할 수 있었다.
죽어가는 몬스터를 앞에 두고 소환만 하는 게 아니라, 전투 중에 능동적인 반응이 가능해진 것이다.
“틈틈이 그려두는 것도 잊지 마.”
“알았음요.”
전투 중에 매번 그림을 그릴 사이가 어디 있을까?
서우진은 전투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미리 그려둔 뒤,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것을 소환하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했다.
김다혜는 그것을 받아 들였고, 스스로 그림책이라 명명한 스케치북에 매일 그림을 그려 저장했다.
“그런데 넌 전투스킬은 하나도 없어?”
“있음요. 근데 별로 효과는 없어서.”
스킬은 보통 직업에 어울리는 것들이 부여된다.
하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라서, 마법사에게 ‘일도양단’ 같은 게 나올 때도 있었다.
김다혜 역시 ‘화공’임에도 검술 스킬 몇 가지가 있었다.
“그거 활용할 수 있는 방법도 한 번 생각해 보자. 여차하면 펜을 휘둘러야 할 때도 있을 테니까.”
펜은 칼보다 강하다.
대표적인 대유법이었지만, 김다혜는 용사다.
실제 펜으로 칼을 꺾어버릴 힘이 있는.
“오오.”
김다혜는 뭔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쟤도 참 특이해.’
뭔가 항상 멍하게 있다가, 가끔씩 뜬금없는 행동을 하기도 한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애가 그래도 착해.’
모난 부분도 하나 없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기특함도 있다.
‘그래도 특이한 건 사실이지만.’
약을 바르곤 비명 한 마디 지르지 않고, 굼벵이처럼 땅을 기어 다니던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네에. 안 그래도 내일부터는 아카데미 공식 일정이 시작되니까요.”
이지아의 말에 서우진은 얼마 전 아카데미에서 나눠준 교육 커리큘럼을 떠올렸다.
‘괜찮을까?’
제국에서도 용사들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는듯했다.
하긴, 몇 번이나 해온 일이었으니 부작용을 모른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때문에 교육의 대부분이 대련이나 몬스터의 사냥에 맞춰져 있었다.
그 외에는 직업특성화 교육 정도?
단계에 맞게 전투경험을 쌓으며, 실력을 높이겠다는 의도인 것 같았다.
만약 매시브 가디언에서 서우진이 했던 수련만큼만 한다면, 용사들의 전력은 일취월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쉬울까?
정확한 건 교육을 받아봐야 하겠지만, 솔직히 서우진은 회의적이었다.
용사들의 태도만 봐도 훤했다.
지구에서도 기껏해야 주먹질 몇 번 하는 싸움이 전부인 인생을 살았을 터였다.
이곳에 소환되어서도 마찬가지.
밥상을 차려주다 못해 떠먹여 주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는 이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목숨을 건 전투라는 것에 과연 익숙해질 수 있을까?
‘그래도 전쟁에선 이기겠지만.’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용사들만으로도 잘만 막아왔다.
그런데 이번엔 100명이니, 충분히 막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희생이야 크겠지만…….
저들의 입장에선 용사가 몇이 죽어나가든 신경쓰지 않을 확률이 컸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이 세계니까.
용사들은 고마운 존재이긴 하지만, 소모품인 것도 사실이었다.
‘뭐,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습지.’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지금 제 코가 석 자인데.
서우진은 그냥 지금처럼 지내면 된다.
괜히 전쟁에서 개죽음 당하지 않도록 강해지는 것.
그리고 주변의 이목을 크게 끌지 않는 것.
후자는 이미 좀 틀어진 것 같긴 하지만,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다.
계속 평범하게 살면 존재감도 흐릿해지겠지.
“맞다, 아저씨. 제가 어제 기사 아저씨들 얘기하는 거 슬쩍 들었거든요? 우리 조만간 몬스터 토벌에 투입될 것 같대요.”
몬스터 토벌이라는 말에, 서우진과 아일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어디더라? 제국 서쪽에 어디쯤인데, 몬스터들이 출몰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토벌이랑 훈련을 겸해서 우리가 거기로 갈 것 같던데요?”
이지아는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그녀의 입장에서 몬스터는 툭- 치면 죽는 나약한 생명체였다.
언제나 그런 놈들만 잡아왔으니까.
실제 전투가 쉽지 않을 거란 사실을 머리로는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게 실감은 나지 않을 것이다.
서우진도 그랬다.
몬스터, 몬스터, 이름만 들을 땐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드레이카스와 스노울을 만났을 때 어땠던가?
하마터면 바지에 오줌을 지릴 뻔했다.
지금이야 스노울 무리쯤은 혼자서 도륙을 낼 수 있겠지만…….
‘과연 다른 용사들도 그럴까?’
어떤 몬스터이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언제쯤 출발하는지 들었어?”
“네, 물론이죠! 제가 또 누구예요. 그런 소문, 아니, 정보쯤은 놓치지 않고 모두 들어왔지요!”
음하하- 하고 웃는 이지아의 모습에 조금 머리가 아파왔지만,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언제래?”
“내일이요.”
“아니, 무슨. 일 진행을 번갯불이 콩 구워먹듯이 이렇게 해?”
“갑자기 몬스터 토벌이라니?”
“내 힘을 보여줄 때가 왔구나!”
이지아의 정보는 놀랍게도 사실이었다.
덕분에 용사들은 혼란스러워 했다.
갑작스런 토벌에 긴장과 두려움을 지닌 이도 있었고, 쌓아왔던 자신의 힘을 자랑할 때라며 신나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지아는 후자였다.
안 그래도 자신만만했는데, 서우진과 수련을 하며 더욱 자신감이 붙었다.
그리고 서우진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겁을 먹지도, 신나지도 않았다.
그저 토벌에 앞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을 뿐이었다.
“오랜만이네요.”
그런 서우진의 뒤에서 아일린이 말을 걸어왔다.
“그러게. 거의 1년만이지?”
“네. 시온에서도 이제 슬슬 시작할 때가 됐고요.”
공교롭게도 매시브 가디언의 토벌과 일정이 비슷하게 겹쳤다.
“긴장되세요?”
아일린이 물었다.
“조금.”
아예 긴장이 되지 않는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몬스터와 질리도록 싸워봤음에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번엔 지킬 사람도 없어요.”
병사는 없다.
오로지 용사와 기사들만 떠나는 토벌이다.
굳이 서우진이 나서지 않아도, 스스로의 생명 정도는 지키기에 충분한 이들이었다.
‘부상 정도는 당하겠지만.’
제국의 기사들이 결코 용사의 죽음을 보고만 있진 않을 것이다.
“어떤 녀석들일까?”
서우진은 말을 돌렸다.
“이 시기에 제국령에서 출몰할 만한 몬스터는 그리 많지 않아요.”
기껏해야 고블린이나 오크 정도.
“그리고 와이번이 있겠네요.”
“와이번?”
유명한 놈이었지만, 북방에서는 보지 못한 놈이었다.
“아룡종이에요. 드레이카스와는 달리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사냥을 하죠.”
매서운 눈보라가 매일 날리는 북방에서는 살기 힘든 신체구조였다.
“많이 강해?”
“저도 직접 싸워본 적은 없지만, 강한 것보단 까다롭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어요.”
하긴, 하늘을 날아다니는 놈과 싸우려면 기사들로선 골치가 아플 것이다.
“그래도 여긴 마법사가 많으니까, 나타나도 걱정하진 않아도 되겠네요.”
용사들 중엔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직업이 많았다.
대표적으로는 마법사 계열이 있을 테고, 정령이나 활 따위의 무기를 쓰는 이도 있다.
“딱히 위협이 되는 놈들은 아니네?”
“그러니까 제국에서도 토벌을 보낸 거겠죠.”
처음부터 강한 놈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몰아넣는 또라이 같은 곳이…….
‘아, 매시브 가디언이 있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서 살아 나온 건 천운이었다.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함이겠죠.”
이런 자잘한 전투부터 시작해 감정을 둔화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사실 그게 정석이기도 했고.
서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살폈다.
잔뜩 들뜬 표정의 용사들이 수다를 떠는 모습이 보였다.
토벌이 아니라, 수학여행이라도 가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서우진은 무겁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용사님들은 호명하는 순서대로 대열을 갖춰주십시오!”
제국의 행정관 중 한 명이 마법을 이용해 크게 소리쳤다.
그제야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가시며,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서우진의 두 번째 몬스터 토벌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