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허공에 구멍이 뚫렸다.
지름은 고작해야 지름 10미터 정도.
하지만 그 안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저게 ‘나락’?’
서우진은 구멍 안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기운에 소름이 돋았다.
게랄드에게 전혀 뒤처지지 않는 존재감을 지닌 무언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온다!’
서우진이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구멍을 통해 검은 형체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상상했던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귀여웠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해파리와 비슷한 외형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수였다.
수십? 수백?
아니, 저건 도저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것들은 천천히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물속을 유영하듯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그것들은, 마치 검은색의 눈을 연상케 했다.
서우진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게랄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냐, 이건?”
그의 눈에 경계심이 서렸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여유로움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였다.
게랄드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너로구나?”
눈동자를 본 게랄드는, 저 정체모를 뭔가를 만들어낸 게 서우진이라 확신했다.
“말해라. 저게 무엇이지?”
“지옥이다, X발놈아.”
동시에 검은 형체가 게랄드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파파팟-!
해파리의 촉수처럼 생긴 것들이 갑자기 뻗어 나오더니 게랄드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감히!”
게랄드의 마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촉수는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가닥, 가닥 끊어졌다.
하지만 해파리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게랄드 주위에 있던 것들이 동시에 촉수를 뻗어댔다.
아니, 게랄드뿐만이 아니었다.
근방에 있는 고블린 대부락과 숲에서 몸을 감추고 있던 다크 엘프까지.
서우진의 ‘적’이라 할 만한 모든 존재에게 촉수가 향했다.
게랄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도끼를 휘둘러 그것들을 잘라냈다.
퍼퍼퍽-!
마기에 적중된 해파리들이 공중에서 폭파되며 형체를 감췄다.
그러나 그런 대응이 가능한 건 게랄드뿐이었다.
“크아아악-!”
“으르롸락-!”
“사, 살려-!”
고블린과 다크 엘프들은 그러지 못했다.
반항다운 반항은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촉수에 휘감겨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러곤 그대로 쥐여 짜졌다.
마치 방금 빤 걸레를 짠 것처럼, 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다.
무려 천오백 마리에 달하는 고블린과 200의 다크 엘프가 동시에 피를 쏟아내자, 피의 호수가 만들어졌다.
비유가 아니었다.
“네놈……!”
자신의 수족인 다크 엘프들이 순식간에 전멸당하자, 게랄드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서우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 외의 다른 행동은 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계속해서 촉수는 그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숨쉬는 것보다 쉽게 그것들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 게랄드는 점점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그 역시 쥐여짜진 걸레짝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도망갈 순 없었다.
오늘의 계획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썼던가?
크루시엘의 감시를 피해 저만큼의 고블린을 모으고, 제국령 내에 몰래 잠입시킨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만큼 제국의 감시망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몬스터로 유인해 용사들을 토벌에 투입시키는 일 역시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일이었다.
만약 흔적이 발견된다면, 제국에서는 절대 용사들을 보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치밀한 계획 속에 모든 일을 조심스럽게 진행했다.
그 결실이 눈앞에 있었다.
그러니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일을 그르치게 만든 네놈의 머리만큼은 가져가야겠다.”
게랄드는 힘을 폭발시켰다.
일순간 촉수들이 한 번에 밀려나며 틈이 생겼다.
게랄드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서우진에게 달려들었다.
적어도 수만 명의 피를 머금은 도끼의 날이 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X발.”
‘나락’을 사용해 상황을 어떻게든 반전시키긴 했는데, 자신이 죽는 것은 변하지 않을 듯했다.
옆에서 아일린이 사력을 다해 몸을 일으키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힘으로 게랄드의 마기를 이겨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냥 가만있어. 괜히 눈에 띄어 개죽음당하지 말고.’
아일린의 어깨에 손을 얹어 진정을 시킨 후, 게랄드를 노려봤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절대 비굴하게 죽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음?”
떨어져 내리던 게랄드의 도끼가 움찔- 했다.
“넌……!”
무엇을 본 것인지, 게랄드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나락’이 펼쳐졌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도끼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게랄드가 멈추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그렇게 도끼는 서우진의 목을 갈랐다.
아니, 가를 뻔했다.
콰앙-!
갑자기 나타난 검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낡은 철검.
서우진이 툭- 하고 쳐도 부러질 것만 같은 모습이었지만, 검은 놀랍게도 게랄드의 검을 막아냈다.
‘뭐, 뭐지?’
게랄드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다리엘!”
“시끄럽다, 다크 엘프.”
동시에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를 노인 한 명이 서우진의 옆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누구……?’
서우진은 노인의 얼굴을 확인해 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점점 눈앞이 흐릿해지고, 가까스로 부여잡고 있던 정신이 아득해져만 갔다.
‘안 되는데.’
지금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쏟아부은 서우진은, 결국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 * *
언제였을까?
서우진이 처음으로 여행이라는 것을 갔을 때가.
스무 살이었던 것 같다.
보육원에서 자라 여행이라고는 꿈도 꿔보지 못했던 자신이, 처음으로 가본 곳은 바로 속초였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난 동료들과 의기투합해 1박 2일의 일정으로 간 여행이었다.
바다라는 것도 처음 봤고, 술도 처음 마셔봤으며, 게임도 처음 해보았다.
재미있었다.
온통 처음 해보는 것투성이였다.
그러니 당연히 즐거울 수밖에.
그중에서도 서우진의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마피아 게임이었다.
서로 속이고, 설득하고, 의심하고.
다른 게임들도 재미있었지만, 이런 심리전이 좋았다.
서우진은 시민이나 경찰일 때보다, 마피아가 되었을 때가 더 재밌었던 것 같다.
마피아라는 사실을 걸릴까 봐 조마조마해 하는 것이 훨씬 더 스릴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친구들과 이런 게임을 평생 함께하면서 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마피아가 아니라 마왕이 되니까 재미가 없네.’
서우진이 정신을 차렸다.
오랜만에 옛날 꿈을 꾼 것 같았다.
친구들과 여행을 갔던 때의 꿈.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이런 개 같은 일은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벌써 몇 번째일까?
죽음의 위기를 넘긴 게.
만약 소환에 응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지금쯤 친구들과 술 한잔 기울이며 이상한 꿈을 꿨다며 낄낄거리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후회일 뿐.
지금 서우진에게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이제 추궁을 당할 땐가?’
‘나락’을 펼쳤을 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기사도 있었고, 용사도 있었다.
그들은 ‘나락’을 봤으니, 그 스킬의 정체와 서우진에 대해 캐물을 게 뻔했다.
그만큼 ‘나락’은 이질적인 스킬이었으니까.
서우진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정신 들어요?”
아일린이었다.
그녀는 침대 옆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가만히 앉아 서우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수련 도중 기절했다 깨어나면 항상 아일린이 이렇게 지켜봐 주었으니까.
“살아 있네.”
“다행히 검공께서 늦지 않게 오셨거든요.”
검공?
처음 들어보는 칭호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혹시 백발의 노인이야?”
정신을 잃기 직전, 게랄드의 도끼에서 자신을 구해준 사람.
“맞아요. 제국의 다섯 초인 중 일인이자, 대륙제일검이라고 칭송받는 분이죠.”
대륙제일검이라니.
서우진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런 사람이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다가 도움을 줬을 리는 없고.
“제국에서는 게랄드인지 지랄드인지 하는 놈이 나타날 걸 알고 있었나 보군.”
아일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미끼였던 건가?”
사실과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서우진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정신을 잃고 어떻게 됐지?”
“저도 자세하게는 모르겠어요. 마기에 침식될 때부터 사실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응?”
아일린의 말에 눈을 끔뻑였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하나도?”
“단편적인 장면은 떠오르지만, 정확히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서우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일린이 모른다면,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나락’을 사용한 건 아무도 모른다는 거지?’
‘검병’의 스킬이라고 우기기엔 너무도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정작 시전한 서우진조차도 놀랄 정도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 안에서 느껴지던 끔찍한 기운을 느낀 이는, 서우진이 용사가 아니라 마왕이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기억이 안 난다니, 조금은 안심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제가 들은 건 검공께서 나타나자, 게랄드가 싸우지도 않고 그냥 후퇴했다는 거예요.”
서우진은 살짝 놀랐다.
게랄드는 괴물, 그 자체였다.
공간을 조종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마기를 품고 있는 괴물.
그런 놈이 그냥 후퇴했다고?
싸워보지도 않고?
“검공이라는 양반은 강한가?”
존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투였지만, 아일린은 신경쓰지 않았다.
“대륙제일검이라 불린다고 말했잖아요.”
“그럼 우리 영주보다 강하다는 뜻이야?”
반 슬레인도 괴물이다.
그의 전력을 본 적이 없어 가늠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게랄드보다 약할 것 같지는 않았다.
“…글쎄요.”
아일린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반 슬레인에 대한 존경과 믿음은 확고했지만, 검공이라는 이름도 그 이상으로 드높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제국.
괜히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 여러 사람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었다.
“영주라 함은 반을 이야기하는 건가?”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백발의 노인이 들어왔다.
어깨까지 길게 늘어진 백발에 삭막하기 그지없는 얼굴의 노인.
분명 서우진이 기절하기 전에 보았던 그 얼굴이었다.
“검공!”
아일린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 그 아이가 벌써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군.”
‘우와.’
그 양반을 아이라고 부를 정도면 검공의 나이는 대체 몇이라는 걸까?
반 슬레인도 환갑을 넘긴 것으로 아는데.
게다가 그 양반은 육체의 재구성을 이룩해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왠지 나이 차이가 더욱 나 보였다.
“실언이었습니다.”
아일린은 순순히 사과했다.
괜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검공, 다리엘은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질책하자는 뜻이 아니었으니.”
그러곤 서우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단순히 걸어오는 것임에도 마치 검 한 자루가 날아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서우진이 마른침을 삼키며 그를 쳐다보는데, 다리엘이 물었다.
“네놈이구나, 게랄드가 말한 게.”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