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뭐지?”
서우진은 검을 뽑아 들며 주변을 경계했다.
분명 다른 사람들과 같이 들어온 것 같은데…….
“이것도 무슨 마법적인 현상 같은 건가?”
유적 밖에서 헤맨 것처럼, 이번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둘째치고, 자신의 팀원들은 아직 미숙한 점이 많았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지아나 유홍설, 진태성은 조금 낫다.
그들은 전투 계열 직업이었으니까.
하지만 김다혜와 강병규는 아니다.
만약 이곳에서 그들이 감당하지 못할 몬스터라도 만나게 되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었다.
“일단 다른 팀원들부터 찾는 게 우선이겠어.”
방법은 지금부터 찾아봐야만 했다.
자신에겐 강병규와 같은 스킬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돌아다니다 보면, 언젠간 마주치지 않을까?
서우진은 일단 앞으로 전진해 보기로 했다.
오래된 벽돌로 만들어진 기다란 복도는,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중간중간 횃불이 걸려 있어 어둡지는 않았지만, 마경 특유의 분위기 덕분에 음침했다.
뚜벅- 뚜벅- 뚜벅-
들리는 소리는 오직 자신의 발자국뿐.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서우진은 문득 자신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봤다.
“……없어?”
길이 없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암흑뿐.
단순히 횃불이 꺼져 깜깜해진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모든 것이 사라져,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공간이었다.
고개를 돌린 채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자신이 딛고 있던 곳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서우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치고받는 것은 익숙하다.
셀 수 없이 많은 몬스터들과 전쟁도 치러봤고, 반 슬레인을 비롯한 기사에게 검을 배웠으니까.
하지만 이런 마법, 혹은 신비에 가까운 현상에는 문외한이었다.
솔직히 좀 무서웠다.
탁탁탁-!
서우진은 걸음을 빨리했다.
혹여나 저 무의 공간이 자신을 삼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던 것이다.
발은 점점 빨라지고, 이윽고 뜀박질에 가까운 속도가 되었다.
다행히 길은 자신의 움직임에 맞춰 사라졌다.
느리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게.
정확하게 서우진의 걸음에 맞춰서.
“젠장, 차라리 몬스터가 나타나는 게 낫지.”
그것을 깨달은 서우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적어도 몬스터는 자신이 ‘죽일’ 수 있었으니까.
그때였다.
“꺄아아악!”
앞쪽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팀원들 중 한 명인가 싶었지만,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였다.
그래도 누군가가 주변에 있다는 사실에, 서우진은 앞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 저리 가요!”
비명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마 여자도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서우진은 조금 더 속도를 냈다.
그러자 이내, 앞에서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에 있는 몬스터의 모습도.
검은색 피부에 검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검은색 날개까지.
몬스터라기보단, 악마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마에 난 두 개의 뿔 덕분에 더욱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서우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이해도 하지 못할 괴상한 현상 따위보단, 저런 놈이 더욱 상대하기 쉬웠으니까.
“숙여요!”
서우진이 여자에게 외친 후, 검을 휘둘렀다.
“아, 아? 꺄악!”
다행히 여자는 서우진의 말을 알아들었다.
비명이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그의 말대로 거의 자빠지듯 앞으로 몸을 숙인 것이다.
스아악-!
기다란 머리카락 몇 올과 함께 악마 같은 놈의 가슴에 기다란 검상이 새겨졌다.
제법 깊은 상처.
하지만 서우진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더욱 심각해졌다.
‘느낌이 없어.’
마치 허공을 벤 것처럼, 손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스, 스킬을 써야 해요! 일반 공격은 안 토, 통해요!”
그 말에 서우진은 곧장 스킬을 발동했다.
“흑염.”
검에서 ‘오러’와는 다른, 검은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불꽃을 머금은 흑검이 다시 한 번 놈의 몸을 갈랐다.
그러자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다.
키에에에엑-!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피부가 불타올랐다.
그것이 끝이었다.
악마의 형상을 한 몬스터는, 그 공포스러운 외형에 어울리지 않게 단 일격에 불살라지며 잿더미로 변했다.
서우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검을 내려 보았다.
뭔가 느낌이 좀 이상했다.
하지만 그것을 깊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서우진에게 구함을 받은 여자가 주저앉은 채, 허리를 숙이며 감사인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고, 고맙습니다.”
‘응?’
그제야 얼굴이 보인다.
분명…….
“엘리트 친구들?”
“네?”
“…아닙니다.”
여자는 다섯 명의 엘리트 친구 중 한 명이었다.
싸가지 없는 그 ‘성녀’가 아닌.
‘드래곤 테이머였었나?’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안경은 그녀의 인상을 더욱 순박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용은 없네.’
몇 번 보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어깨에는 항상 용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고작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에 불과했지만, 용은 용이다.
아룡종인 드레이카스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할 것이 분명했다.
“저, 저기…….”
서우진이 가만히 서서 쳐다보고만 있자 여자, 임태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죄송합니다. 뭐 좀 생각하느라.”
“뭐라고 하, 하는 건 아니고요.”
손가락을 꼼지락 거린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습니까?”
가만있다가는 얼굴이 폭발할 것 같았기에, 서우진은 말을 좀 돌렸다.
“아, 그게. 여기 드, 들어오자마자 모두 사라졌어요. 제 ‘용가리’도 없어졌고…….”
용의 이름을 ‘용가리’라고 지은 건가?
귀엽고 순진한 얼굴과는 다른, 파멸적인 작명센스였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는 얼마나 있었죠?”
자신이 밖에서 헤맨 시간까지 합치면 두세 시간 정도 흘렀을 것이다.
그런데 임태은의 몰골을 보면, 일주일 이상 지났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꾀죄죄했다.
“10일… 정도요?”
그 말에 서우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확실한가요?”
“네, 네.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체감 상 그 정도의 시간은 흐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 유적은 공간뿐만이 아닌, 시간에도 이상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서우진은 다시 한 번 자신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봤다.
“…있네.”
길이 존재했다.
언제 사라졌었냐는 듯, 길게 쭉 뻗은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다만 다른 것은.
평범한 벽돌로 만들어졌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붉은색의 고깃덩어리가 복도를 이루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역겨운 광경이었다.
“여긴 계속해서 길이 바뀌어요. 저, 저렇게 변하기도 하고, 마, 막 갈림길도 생기고.”
단순한 미로 따위가 아니었다.
이런 현상은 듣도 보도 못했기에, 서우진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해결할 수도 없다.
잠시 한숨을 내쉰 서우진은, 다시 앞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임태은도 그렇게 만났으니, 이렇게 가다 보면 다른 사람들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일단 계속 저쪽으로 움직…….”
아직 주저앉아있는 임태은을 일으켜 세우려던 서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없어졌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던 임태은이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몬스터가 죽으며 남긴 잿더미도 사라졌다.
다시 혼자가 된 것이다.
“이건 또 뭐냐?”
어느새 길도 변했다.
이번엔 매끈한 흰색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서우진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한참 동안이나.
* * *
김다혜는 어려서부터 특이한 아이였다.
어딘가 항상 멍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상한 아이.’
‘어딘가 모자란 년.’
김다혜가 세상을 자각한 뒤부터, 꼬리표처럼 따라붙은 말이다.
덕분에 그녀는 가족을 포함해 그 누구와도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하지만 김다혜는 괜찮았다.
어차피 그녀는 외로움이나 고독감 따위의 감정은 느낄 수 없었으니까.
아니, 세상 모든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누군가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추는 삶을 살았다.
그런 김다혜가 유일하게 흥미를 느끼는 것은 바로 그림이었다.
남들과는 다른 눈으로 본 세상을 한 장의 스케치북에 옮겨오는 일은, 감정의 기복이 없는 그녀에게도 퍽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이 세계에 소환되었을 때, ‘화공’이라는 직업 적성을 얻게 되었을 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등급은 C급에 불과했지만, 그런 건 애당초 그녀에겐 별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저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러다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유독 말이 많은 이지아 덕분이었다.
그녀는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김다혜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며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그녀는 이지아가 이끄는 손에 끌려다녔고.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를 꺼리는 것이 느껴졌다.
특이하다 못해 이상할 정도의 성격이었으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김다혜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들이 이해해 주길 바라지도 않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달라졌다.
‘재밌어.’
그림을 그리는 것도 재밌고, 그것을 소환하는 일도 재밌었다.
몬스터를 사냥하며 레벨을 올리는 일도 나름대로의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하지만 제일 재밌는 건, 자신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이었다.
서우진과 훈련을 하고, 스킬에 대해 고민하고, 조금이라도 강해지기 위해 노력하고.
김다혜가 처음 겪어보는 경험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유적에 입장하는 것과 동시에,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김다혜는 두렵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신비로운 장소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소환.”
스케치북에 ‘저장’되어 있던 K-2 한 자루를 소환했다.
나름대로의 커스텀도 된 소총은, 이지아의 취향이 듬뿍 담겨 핑크색의 리본까지 달려 있었다.
손에 든 총을 잠시 내려다본 김다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찾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어두운 복도를 걸을 때였다.
“응? 너는……?”
누군가 앞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얼굴.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순백의 사제복.
그리고 누구라도 내려다보는 듯한 오만한 눈빛.
‘성녀’ 성유라였다.
“참나, 뭐야 너?”
그녀는 김다혜를 발견하자마자 썩은 표정을 지으며 쏘아붙였다.
“안 들어온다면서? 몰래 우리 뒤 따라 들어왔니?”
하지만 김다혜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무슨 말 좀 하지? 아니다, 됐다. 내가 너 따위랑 무슨 말을…….”
“몬스터.”
“……뭐?”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말을 끊은 김다혜가 총을 들며 앞을 가리켰다.
“몬스터 등장요.”
동시에 김다혜의 K-2가 불을 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