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왕으로 살아남는 법-61화 (62/116)

#61화.

“…이계마왕록?”

서우진이 마른침을 삼켰다.

제목부터 심상찮았다.

마치 서우진을 콕- 짚어 가리키는 것 같지 않은가.

‘이게 대체 뭐지?’

혹시 다른 용사들도 이런 게 있는 건가 싶었지만, 그런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레벨 업을 할 때 이 검은 공간조차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이지아와 김다혜의 말이었으니, 확실할 것이다.

오직 서우진.

그에게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그것이 ‘마왕’이라는 직업 때문인지, 아니면 ‘측정불가’ 등급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저 책을 보면 ‘마왕’ 직업 때문인 것 같은데.”

이계마왕록.

한글로 또박또박하게 박혀 있는 금빛 글자를 향해 서우진은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거 왜 이래?”

손은 책에 닿지 못했다.

마치 홀로그램인 것마냥 그대로 통과해 버린 것이다.

몇 번이나 손을 휘저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왠지 모를 허탈함에 서우진이 헛웃음을 짓고 있는데,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가 되■ 않■나?]

깊고 무거운 음성.

마치 노이즈가 잔뜩 낀 것처럼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사람의 음성이었다.

“누구냐!”

깜짝 놀란 서우진은 검에 손을 가져다 대려고 했지만, 헛수고였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밝은 빛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눈을 뜨자, 현실이었다.

“당신은……?”

가장 먼저 눈에 보인 것은 성유라였다.

방금 전의 전투가 꽤나 힘들었는지, 그녀가 입고 있던 순백의 사제복은 엉망진창이었다.

‘젠장.’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짜증나는 건, 검은 공간에서의 일이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었다.

‘꼭 볼일 보다 끊긴 느낌이야.’

너무도 찜찜했다.

검은 공간의 정체도 궁금했고, 책의 정체는 더욱 궁금했다.

‘그리고 목소리.’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그렇지만 서우진은 고민을 길게 이어갈 수가 없었다.

“당신이 왜 거기서 나오는 거죠?”

성유라의 날선 음성이 정신을 일깨웠던 것이다.

여전히 싸가지 없게 생긴 그녀의 얼굴을 한번 흘겨본 서우진은, 고개를 돌려 김다혜를 쳐다봤다.

“괜찮아?”

드디어 팀원 중 한 명을 만났다.

살덩이가 뚫어놓은 구멍을 이용하는 게 정답이었다.

“괜찮음요.”

김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피식-

평소와 똑같은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 그거 썼구나?”

혹시나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보던 서우진이 반색했다.

탄두가 분리되어 발사관만 덜렁 남아 있는 핑크색 알라의 요술봉이 눈에 들어왔다.

‘어쩐지 몬스터가 화상을 입은 상태더라니.’

서우진이 머리를 잘라낸 소대가리의 육체는 엉망진창이었다.

화염방사기를 사용한 건가? 싶었는데, RPG-7을 사용한 것이었다.

김다혜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기에, 서우진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다른 사람들 봤어?”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런데 의외로 김다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자요.”

“아…….”

질문이 잘못됐다.

팀원들이라고 물었어야 했는데.

서우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성유라를 쳐다보곤, 다시 질문했다.

“다른 팀원들은?”

“못봤음요.”

역시나 김다혜도 일행과 흩어진 것이다.

“저기요!”

그때, 성유라가 서우진을 불렀다.

“사람이 말을 걸면 대답은 하시죠?”

“그게 무슨… 아.”

그제야 떠올랐다.

조금 전, 성유라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딱히 대답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그녀보단 김다혜가 훨씬 중요했기에 무시했었는데…….

아무래도 그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듯 했다.

“뭘 물어보셨었죠?”

“당신이 왜 거기서 나오냐고요!”

“제가 그걸 가르쳐 줘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서우진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정중하게 물어도 가르쳐 줄까 말까인데, 저딴 식으로 나오면 대답을 해줄 필요가 없었다.

성유라는 서우진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고작 D급 따위가 지금 나한테 그딴…….”

“움직일 수 있겠어?”

히스테리를 부리려는 분위기가 풍기기에, 서우진은 그녀의 말을 끊곤 김다혜를 챙겼다.

“괜찮으면 다른 곳으로 가자. 여기는 좀 시끄럽네.”

명백한 무시.

괜히 엮여봐야 좋을 것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서우진은 성유라를 무시한 채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저쪽으로 들어갈 거야.”

방금 뚫고 들어온 벽면을 가리켰다.

“좀 불길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생각보다 이상하진 않으니까 괜찮을 거야.”

“괜찮음요.”

뻥 뚫린 구멍에 어둠만 가득한데도, 김다혜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좋아. 그럼 저기로 들어가서 다른 팀원들을 좀 더 찾아보자.”

서우진은 김다혜를 이끌고 그대로 구멍 밖으로 이동했다.

“이, 이……!”

혼자 남은 성유라는 이를 갈았다.

지금까지 자신을 이렇게 무시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지구에서든, 이 세계에서든.

그토록 잘난 백시우조차도 자신에겐 함부로 굴지 않았다.

그런데 고작 D급짜리 반편이가 자신에게 이딴 수모를 줘?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의 모멸감이 들었다.

평소의 성격대로라면, 주저 없이 몸을 돌려 서우진과 멀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10일이 넘는 시간.

그동안 이 기나긴 복도를 홀로 돌아다녔다.

김다혜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했지만,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저렇게 보낼 순 없었다.

더는 혼자 있고 싶지 않으니까.

빠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성유라가 발을 뗐다.

서우진과 김다혜가 들어간 구멍을 향해서.

*  *  *

“뭉치십시오!”

루데인이 소리치자, 이지아와 강병규, 유홍설이 그의 등 뒤로 붙었다.

“헬 프레임!”

동시에 진태성의 마법이 발동하며, 거대한 화염이 복도를 휩쓸었다.

“헉- 헉-!”

“바로 칩니다!”

루데인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검과 주먹이 폭사하며, 눈앞의 몬스터들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진태성의 마법을 맞은 놈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그대로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처리한 몬스터의 수가 약 30마리.

적은 수는 아니었지만, 세 명의 용사와 루데인이 포함된 이들에겐 위협거리가 되지 못했다.

아니, 되지 못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너, 너무 강해요.”

오죽하면 이지아가 특유의 수다를 멈출 정도로 말이다.

처음에는 쉬웠다.

전투 직업이 아닌 강병규도 칼질 한 방에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몬스터는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다.

아직까진 위험에 빠질 정돈 아니었지만, 언제 한계를 맞이하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며칠이나 됐죠?”

유홍설이 잔뜩 지친 음성으로 물었다.

“5일째입니다.”

강병규가 자신의 시계를 확인하고는 대답해주었다.

“…벌써 5일이나 됐군요.”

유적에 처음 들어왔을 때, 혼자 남게 되어 얼마나 당황했던가.

다행히 한 명씩 다시 만나 동행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진이랑 다혜는 어떻게 됐을까?”

강병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저씨야 강하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다혜는…….”

이지아는 김다혜를 걱정했다.

자신의 친구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더 잘 챙겨주려고 곁에 꼭 붙어 있던 것이고.

그런데 이렇게 흩어지게 되었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른 기사님들도 마찬가지예요.”

천만다행으로 루데인을 만났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기사들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루데인의 표정이 어두운 것은 그 탓도 컸다.

심혈을 기울여 키운 부하들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조금 쉬었으면 다시 이동하겠습니다.”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을 눈치챈 루데인이 애써 힘차게 말을 내뱉었다.

그 말에 이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심정으론 조금 더 쉬고 싶었지만, 계속 가만있다가는 사기만 더 떨어질 것 같았다.

가뜩이나 몸도 힘든데, 기분까지 가라앉으면 앞으로 더욱 힘들어질 게 뻔했다.

이지아와 루데인이 나서자, 다른 사람들도 이동할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다 전투 현장을 본 강병규가 문득 말했다.

“정말 경험치라도 많이 들어와서 다행이네요.”

“그러게요. 레벨 업이 아니었으면 벌써…….”

유홍설이 그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였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아무리 용사들이라도 체력과 마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유적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쏟아지는 몬스터와의 전투에서 모두 탈진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마실 물과 음식도 없었으니, 더욱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5일 동안 이렇게 무사히 버틸 수 있었던 건, 몬스터들이 주는 경험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었다.

한계에 도달할 때쯤 한 번씩 레벨 업을 한 덕분에, 육체가 최상의 상태로 회복된 것이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몬스터들에게 이미 먹혔을지도 몰랐다.

물론 정신적인 피로감은 계속해서 쌓여갔지만 말이다.

“더 버티기 힘들어지기 전에, 어서 다른 사람들을 찾고 여길 빠져나갈 방법을 알아내야 해요.”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아, 시간 됐어요.”

시간을 체크하고 있던 강병규가 말하자, 사람들이 주변으로 급히 모여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주변의 환경이 변했다.

“이번엔 숲길이네요.”

천장과 양옆이 막혀 있긴 했지만, 적어도 겉모습은 숲으로 이루어진 길처럼 보였다.

“그래도 저번처럼 내장 같은 길이 아니라 다행이죠, 뭐.”

그때는 정말 역겨워서 제대로 이동도 하지 못했는데.

“간만에 편한 길이 나왔으니까, 이 기회에 최대한 멀리 이동해 보도록 하죠.”

강병규가 말을 하곤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전투력은 낮았지만, 유적 탐사에는 그가 제격이었다.

약하게 풀내음마저 풍기는 길을 한참 동안이나 걷고 있는데, 갑자기 강병규가 걸음을 멈추었다.

“정지.”

뒤를 따르던 일행은 곧장 전투 준비를 했다.

“몬스터예요?”

이지아가 물었다.

“그게… 잘 모르겠네.”

강병규가 고개를 저었다.

분명 ‘탐색’ 스킬에 뭔가가 잡히긴 했다.

그런데 위치가 이상했다.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정면의 복도가 아닌, 옆이었던 것이다.

“오른쪽, 셋, 10미터.”

간결한 정보 전달에 루데인이 검을 뽑았다.

“벽 너머라고?”

지금까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현상이다.

미지는 곧 두려움.

일행은 긴장감을 잔뜩 끌어올리며, 다가올 정체불명의 존재를 기다렸다.

“6미터, 5미터… 곧 옵니다.”

루데인과 유홍설의 검에서 오러가 뿜어져 나오고, 이지아는 주먹에 마력을 담았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끝낸 그들의 옆에서, 수풀이 흔들렸다.

“공겨… 억?”

가장 먼저 뛰쳐나가 검을 휘두르려던 루데인이 급히 몸을 멈추며 눈을 부릅떴다.

“아저씨!”

모습을 드러낸 것은 놀랍게도 서우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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