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허억- 헉-!”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젠장.”
주르륵- 하며 한줄기의 붉은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더럽게 세네.’
서우진은 눈앞의 마수를 노려봤다.
두 발로 선 산양의 모습을 한 마수.
키는 연무실의 천장에 닿을 정도였고, 덩치는 구동환이 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했다.
위협적인 것은 외형뿐만이 아니다.
속도, 힘, 마기.
그 어느 것 하나 쉽게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대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서우진도 예상했던 바였다.
고르고 골라, 힘겹지만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소환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혈종’을 사용한다는 말은 없었잖아.”
제이로빈의 몬스터 도감에는 눈앞의 게데이아가 ‘마능’을 사용한다는 설명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것이 부르타엘이 갖고 있던 것과 같은 ‘혈종’이라는 것도 말이다.
마기에 물든 검은 핏물 수십 줄기가 마치 촉수처럼 허공을 넘실거렸다.
“그걸 알았으면 저렇게 다져 놓지 않았을 텐데.”
제이로빈의 수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서우진은 정보의 부재가 얼마나 큰 위험을 초래하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었다.
놈의 공격을 피하느라 폐가 터질 것 같이 부풀어 올랐지만, 조절해야만 했다.
다행히 진화한 육체는 빠르게 안정되었다.
‘이제 어쩐다?’
게데이아는 공격을 하지 않고 진중한 눈빛으로 서우진을 살피고 있었다.
상대가 결코 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우진 역시 섣불리 달려들 수 없었다.
놈은 상처를 입으면 입을수록 강력해지는 ‘혈종’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가장 좋은 건 한 번에 즉사시키는 건데.’
쉽지 않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 소환한 몬스터.
지난 세 번 동안 서우진은 무려 9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이제 32레벨이 된 것이다.
“쓸 만한 스킬은…….”
서우진은 ‘마왕’의 향기를 풍기는 스킬들은 사용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그것들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니 가장 많이 쓰는 검 관련 스킬들만 사용해 숙련도를 높이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위험해지면 어쩔 수 없이 써야겠지만.”
할 수 있을 때까진 최대한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새로 얻은 것들도 대부분 광역 스킬이 대부분이라 효과가 그리 좋지 못하고.’
아직 마력은 충분하다.
육체도 조금 지치긴 했지만, 움직이는 것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서우진은 ‘룬 데아’를 들어 놈에게 겨누며 빠르게 스킬을 훑었다.
하지만 결국 사용할 만한 건 정해져 있었다.
지금까지 서우진이 남들 앞에서도 사용했던 스킬들.
‘강격’, ‘폭주’, ‘가속’, ‘흑염’, 그리고 오러.
문제는 여태껏 이것들을 사용했음에도 게데이아를 쓰러뜨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쯧.”
서우진이 혀를 찼다.
“결국 이 방법밖에 없나?”
아직 시도하지 않은 것이 있긴 했다.
바로 대련에서 백시우를 쓰러뜨렸던 방법.
바로 스킬의 조합이었다.
‘흑염은 필수다.’
상처를 지져 출혈을 최소한으로 줄여줄 수 있었다.
‘그다음엔 ‘가속’.’
게데이아가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베어야만 했다.
‘그리고…….’
‘폭주’.
이번엔 백시우와 겨루었을 때 사용했던 ‘강격’이 아닌, ‘폭주’를 선택했다.
검은 불꽃이 ‘룬 데아’를 휘감았다.
오러와 합쳐진 ‘흑염’은 불길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가속’을 사용하자 몸이 한없이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폭주’를 사용했다.
마력이 들끓기 시작했다.
통제되고 있던 마력이 고삐 풀린 야생마처럼 날뛰었다.
으드득- 으드드득-!
쓰나미라도 일어난 것일까?
광폭한 마력의 폭풍이 전신을 휘감아 달렸다.
질기디 질긴 육체가 압력을 견디다 못해 비명을 질러댔다.
‘괜찮아.’
고통스럽긴 해도 이 정도는 아직 버틸 만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마력이 ‘룬 데아’를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심상찮음을 느낀 게데이아가 괴성을 지르며 돌진했다.
케게게게겍-!
듣기만 해도 역겨울 정도로 불쾌한 포효였다.
서우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허리를 비틀었다.
한계까지 근육이 순간적으로 풀리며 ‘룬 데아’가 공간을 갈랐다.
검은 선이 그어졌다.
쩌어억- 하는 소리와 함께 게데이아의 육체에 상하로 나뉘었다.
피가 쏟아졌다.
‘혈종’이 발동됐다.
폭포처럼 흘러내린 피가 거대한 창이 되어 서우진을 겨누었다.
화르르륵-!
그때였다.
한 박자 뒤에 상처에서 검은 오러가 타올랐다.
그리고 그 열기를 견뎌내지 못한 ‘혈종’의 피가 기화하기 시작했다.
끄에에에에-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게데이아의 비명소리는 애처로웠다.
하지만 서우진의 검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서걱-!
산양의 머리마저 잘려 나가 바닥을 굴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레벨 업 하셨습니다.]
화아악-!
자잘했던 상처와 지친 육신이 모조리 회복되었다.
“휴우, 어떻게든 끝냈네.”
무려 3레벨이 더 올라, 35레벨이 되었다.
게데이아는 그만큼 강력한 마수였던 것이다.
어쩌면 로지 루비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닌가?’
잠시 둘을 비교해 본 서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로지 루비가 강하네.”
카데마인이 강력하긴 했지만, 로지 루비와는 넘지 못할 격의 차이가 있었다.
어쨌든 그 사마귀 놈은 마왕의 권속이었으니 말이다.
‘지금 싸우면 이기긴 할 텐데…….’
백시우조차 일 검에 목을 베어버렸다.
그러니 서우진이라고 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당시보다 레벨도 10 이상 높아졌으니까.
“그나저나 50레벨 이하 도주 권고라더니…….”
서우진은 자신이 욕심을 조금 부렸다는 걸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32레벨이 되었으니 게데이아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마음이 든 것이다.
그런데 자만이었다.
결국 이기기는 했지만, 솔직히 조금 힘에 부치긴 했다.
“큰일날 뻔했네.”
서우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검은 공간.
그 한복판에 있는 ‘이계마왕록’.
바뀐 것은 없었다.
“자, 그럼 다시 봐볼까?”
이곳에 방문한 것이 오늘만 벌써 네 번째였다.
그 덕에 서우진은 ‘이계마왕록’의 표지에 있는 문양을 꽤 많이 외울 수가 있었다.
이전에 외웠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커다란 문양이었다.
‘이걸 얼른 해독해야 할 텐데.’
그래야 책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만간 바르시크를 찾아가 문양의 해석을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책에서 눈을 뗐다.
동시에 검은 공간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왔다.
“음…….”
엉망이다.
가르아데스, 포룬, 아가토르, 게데이아.
이 네 마리의 사체가 연무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싸울 때는 느끼지 못했던 혈향이 진동했다.
“이거 치워주려나?”
아카데미에는 수많은 사용인이 있었다.
그들은 용사들의 편의를 위해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했다.
하지만 이런 사체 처리까지 맡길 순 없었다.
서우진은 그 정도로 양심이 없지 않았다.
어차피 몬스터의 사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폐기물에 불과했으니, 그냥 태워 버려도 될 터였다.
“그냥 내가 고생을 좀 해야겠네.”
‘흑염’이 피어올랐다.
“얼른 탔으면 좋겠다.”
“어으, 힘들다.”
숙소로 돌아온 서우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오늘 하루, 그가 사냥한 몬스터가 무려 네 마리다.
그것도 하나하나가 재앙급에 이를 정도로 강력한 놈들이었고.
레벨 업을 하며 모두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지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대로 그냥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싶었지만, 아직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좀 씻어야지.”
온몸에 혈흔이 가득했다.
숙소로 돌아오던 중에 마주친 용사들이 기겁할 정도였다.
얼른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온 서우진은, 침대에 걸터앉으며 ‘룬 데아’를 꺼내 들었다.
스르릉-
순백의 검신에 검은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서랍장에서 새하얀 천을 꺼내 들었다.
거기에 기름을 먹이고 검신을 닦았다.
핏물이 닦이며 새하얀 검신이 자태를 뽐내기 시작했다.
“이 하나 안 나갔네.”
신검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명검은 명검이었다.
마음까지 정화되는 것 같은 순백을 감상하다 보니, 문득 의문이 생겼다.
“용사가 사용했던 검이라고 했던가?”
서우진의 기억이 맞다면, 마왕의 권속에게 죽은 용사의 검이었다.
웃으며 말을 하던 아그나의 모습이 떠올라 괜히 기분이 찜찜해졌다.
“용사들이 죽기도 하는구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까진 모두 막아오긴 했지만, 상대는 세계를 멸할 힘을 지닌 존재다.
아무리 용사들이 강하고 빠른 성장을 한다 해도, 아무런 피해가 없을 순 없었다.
어쨌거나 전쟁이었으니까.
실제로 많은 용사가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도…….’
사망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아니, 나올 것이 분명했다.
100명이나 되는 용사가 소환되었다며 파티 분위기를 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죽을 사람이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로지 루비 같은 놈들이 몇 마리만 달려들어도, 낮은 등급의 용사들은 당할 수밖에 없다.
그들 중에는 가르아데스의 살기를 정면으로 받아낼 수 있을 거란 확신할 수 없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마능’을 처음 마주한다면?
수백, 수천의 몬스터에게 포위당한다면?
용사들이라 하여도 죽음을 피하지 못할 상황은 차고 넘쳤다.
서우진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졌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주변 사람들은 안 다쳤으면 좋겠는데.’
그러기 위해 함께 훈련하고 있긴 했다.
아카데미에서도 용사들의 성장과 생존율을 높이기 위한 수많은 방법을 고안하고 있을 터였고.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할 것 같았다.
최단 기간에 최대한 강해지는 법.
“…현질이 최곤데.”
월급날 강해지는 지갑 전사들을 생각해 보면, 현질만큼 빠르고 쉬운 방법이 없었다.
서우진이 피식- 웃었다.
게임이 아닌, 현실이다.
‘Pay To Win’이란 공식이 성립할 수 없었다.
여타 퓨전 판타지 소설들처럼 상점 같은 걸 이용할 수 있다면 모를까.
‘하지만 이 세계에는 그런 게 없지.’
아쉬웠다.
시스템이 있으니 상점창 같은 것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혼자 실없는 생각을 하며 고민하던 서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불가능한가?”
서우진이 주머니를 뒤적여 ‘소환석’을 꺼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성장 지원 아이템이나 다름없었다.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다 뿐이지, 효과 자체는 같다.
‘만약 이런 걸 더 구할 수 있다면?’
아카데미의 교육 커리큘럼을 따르며, 남는 시간엔 ‘소환석’ 같은 아이템을 사용한다.
그럼 지금보다 훨씬 빠른 성장이 가능해질 것이다.
실전 경험을 쌓는 것도 물론이고.
‘소환석’.
서우진은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침대에 털썩 누웠다.
‘조만간 하늘탑에 한 번 들러봐야겠어.’
이런 아이템이 더 있는지, 있다면 구할 방법은 없는지.
그걸 확인해 봐야만 했다.
‘마공하고 마주치는 건 좀 꺼려지지만…….’
자신과 동료들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수마(睡魔)가 찾아왔다.
서우진은 점점 흐려지는 의식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빡세게 보냈구만.’
만족스러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