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왕으로 살아남는 법-92화 (93/116)

#92화.

뭐라고 표현을 해야 할까?

공간이 일그러지고, 깨지고, 팽창하며, 비현실적인 모습을 자아냈다.

마치 스쿱으로 퍼낸 것처럼 바닷물의 일부가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했고, 쩌억- 하며 반으로 나뉘기도 했다.

자연재해.

그것 외에는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재해가 고작 두 명의 전투로 벌어졌다는 게 경이로울 정도였다.

“제법이다.”

게랄드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고작 황제의 발바닥을 핥는 암캐가 지니기엔 과분한 힘이다.”

물론 입 밖으로 뱉어진 말은 한없는 경멸이었지만.

“넌 별로다. 마왕의 뒷구멍을 핥는 쥐새끼가 지니기엔 참으로 어울려.”

입담으로는 브리아니도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게랄드를 한참 앞섰다.

찌푸려진 미간을 보면 확실했다.

“혓바닥으로 제국의 날개가 된 모양이로구나.”

그는 고작해야 이런 도발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덤벼.”

브리아니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누가 봐도 한껏 여유로운 태도였다.

하지만 그 속내는 정반대였다.

‘야단났네.’

게랄드의 힘이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전 세대부터 이어져 온 괴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핏물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가까스로 그것을 참아내며 오연한 눈빛으로 게랄드를 내려다봤다.

‘어떻게 한다?’

자신의 열세였다.

미세한 차이이긴 했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놈의 도끼에 머리가 달아날지도 모른다.

‘죽음은 두렵지 않지만…….’

메르노타인이 걱정되었다.

저 더러운 마왕의 추종자는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살육을 즐기다가 돌아갈 게 뻔했다.

주인에게 바친다는 미친 소리를 하면서 말이다.

절대 그렇게 둘 순 없었다.

‘내가 여길 어떻게 키웠는데!’

화르륵-

붉은 머리카락이 위로 치솟아 올랐다.

분노와 함께 이능이 끌어올려지며 주변의 공간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의미 없다.”

하지만 게랄드 역시 브리아니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배력은 순식간에 제 힘을 잃고 상쇄되었다.

콰아앙-!

그 충격으로 다시 한 번 바다가 요동쳤다.

‘능력은 동격. 하지만…….’

육체의 차이가 너무도 컸다.

물론 브리아니의 육체도 평범한 인간을 아득히 넘어선 지 오래였다.

하지만 게랄드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놈은 다크 엘프로서, 기나긴 세월 간 단련을 멈추지 않은 덕분이었다.

‘이대론 패배한다.’

브리아니는 자신의 죽음과 더불어 메르노타인의 붕괴를 떠올렸다.

결코 그리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일단은 놈을 상대로 최선을 다해 싸우는 수밖에.

도끼가 세상을 가를 듯한 기세로 떨어져 내렸다.

공간을 접어 궤적을 비틀었다.

스아악-!

도끼는 피했지만, 그 안에 담긴 마기가 어깨를 갈랐다.

머리색과 같은 핏물이 튀었다.

고통스러웠지만 일말의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손을 쳐올렸다.

바닷물이 그녀의 창이 되어 게랄드를 꿰뚫기 위해 치솟아올랐다.

“흥!”

놈이 코웃음을 친다.

한 번의 도끼질에 수창(水槍)이 힘을 잃고 평범한 물이 되었다.

하지만 브리아니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녀가 노린 진짜 공격은 다른 것이었다.

“떨어져라!”

황족다운 위엄이 가득찬 외침과 함께, 게랄드의 머리 위에 거대한 십자가가 떠올랐다.

“…이건?”

처음으로 게랄드의 눈빛에 놀람이 서렸다.

“성(聖) 로드니의 십자가다, 이 새끼야.”

그 자체만으로도 성스러운 기물이 브리아니의 뜻에 따라 공간을 접어 모습을 드러냈다.

“크윽!”

십자가에서 느껴지는 성력에 게랄드가 다급히 도끼를 휘둘렀다.

“늦었어.”

브리아니의 검지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고오오오-

5미터에 달하는 성스러운 십자가가 그녀의 손가락에 맞춰 게랄드를 향해 쏘아졌다.

쩌엉-!

도끼가 박살났다.

마기와 성력은 상극.

성 로드니의 극에 달한 성력은 게랄드의 도끼 따위가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가볍지 않았다.

“흐아아압!”

하지만 게랄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애병이 박살났음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온 마기를 끌어모았다.

치이이이이-!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성력과 마기가 충돌하며 화염이 치솟았다.

게랄드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뒈져!”

십자가를 떨어뜨리는 브리아니 역시,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사자의 갈기처럼, 붉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일대의 바다가 기화되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마치 지옥이 강림한 것 같은 광경이었다.

투둑- 투두둑-

게랄드의 팔이 조금씩 십자가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팔은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명백하게 힘의 우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젠장!’

그것을 확인한 브리아니가 식은땀을 흘렸다.

저것마저 버텨낸다면, 정말로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려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성 로드니의 십자가가 천천히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

게랄드의 마기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나의 기사들만 있었다면…….’

메이거스를 포함한 몇몇 뛰어난 이들은 마기 속에서도 충분히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만약 메르노타인에서 소란이 일어 그들이 성을 비우지만 않았더라면, 충분히 빈틈을 노려볼 만했다.

하지만 그것은 뒤늦은 후회였다.

브리아니의 기사들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으니까.

‘그 아이는?’

순간 서우진을 떠올렸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있었다면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렇다고 위험을 감수할 순 없었다.

용사는 이런 곳에서 죽어선 안 된다.

오로지 마왕을 막아내야 하는 중대한 사명이 있었으니까.

‘이 녀석은 내가 혼자 어떻게든 해야 해.’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성 로드니의 십자가는 어느새 절반 이상 타들어가, 더는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힘을 잃은 십자가는 이내 모습을 감췄다.

결국은 게랄드의 마기를 견뎌내지 못한 것이다.

“후우우-”

게랄드가 호흡을 길게 내뱉었다.

브리아니가 무리를 했듯, 그 역시 상당한 타격을 받은 듯했다.

‘지금!’

브리아니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팔이 달달- 떨려오고 속이 진탕되었지만, 그래도 움직였다.

화아악-!

순식간에 게랄드의 뒤로 이동한 그녀의 손이 뻗어졌다.

‘단절.’

머리를 잡고, 공간을 단절한다.

몸통과의 연결을 끊어낼 셈이었다.

아무리 게랄드가 강력한 괴물이라고는 하지만, 목이 잘리고는 살 수 없었다.

‘제발…….’

아직 반응하지 못하고 있는 놈의 뒤통수를 보며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움직였다.

하지만…….

“얄팍한 수다.”

게랄드가 몸을 비틀었다.

브리아니의 손이 빗나가며 허공을 붙잡았다.

“드디어 날개를 꺾을 수 있겠군.”

입가에서 핏줄기가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역시 놈은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브리아니를 바라보는 눈빛은 여전히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만 죽어라.”

게랄드의 입에서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미처 회수하지 못한 팔 옆으로, 게랄드의 손날이 날아들었다.

무시무시한 마기가 예리함을 품고 브리아니의 몸을 갈라갔다.

‘끝이다.’

도무지 피할 방법이 없었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렇게 죽어선 안 되는데.’

메르노타인과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들이 떠올랐다.

웃고 떠들며 평온한 삶을 이어가던 이들이다.

하지만 이제 다신 그런 평화를 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미안하다.’

눈을 감고 사죄했다.

자신의 힘이 부족해 그들을 지켜주지 못함을…….

“강격.”

그때였다.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꽈아아아앙-!

눈앞에서 거대한 충격이 울려 퍼졌다.

“뭐, 뭐지?”

깜짝 놀란 브리아니가 감았던 두 눈을 치켜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경악한 표정의 게랄드의 얼굴이었다.

자신의 몸을 부수기 위해 짓쳐들던 손이 위로 튕겨져 올라가 있었다.

‘이게 무슨?’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눈동자를 돌려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그러자 새로운 것이 보였다.

찬란하게 빛나는 검은 날개.

모순적인 표현이었지만,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서우진?”

‘셀레스티얼 윙’을 발동한 서우진이 지옥의 불꽃을 두른 검을 게랄드에게 겨누고 있었다.

*  *  *

서우진은 빠르게 달렸다.

공간을 접어 이동한 덕에, 두 사람과의 거리는 상당했다.

하지만 서우진은 용사다.

‘가속’을 사용하자 빠르게 가까워졌다.

‘심상찮아.’

브리아니와 게랄드의 싸움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천지가 개벽하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경이로웠다.

멀리서도 바다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긴장한 탓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곤 발을 재촉했다.

파파파팟-!

전력으로 마력을 뿜어댄 덕분에, 그의 속도는 이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조금 더 빨리.’

남들이 보면 경악할 모습이었지만, 정작 서우진은 자신의 다리가 답답했다.

‘다음에 레벨 업을 할 때는 속도 관련이나 공간이동 같은 스킬이 나왔으면 좋겠다.’

전장으로 향하는 이의 생각으로는 너무도 가벼운 듯했지만, 지금 서우진은 애써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겁을 먹는다면, 더는 앞으로 한 발자국도 내밀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야 게랄드를 죽일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의 힘으로는 무리였다.

그저 도움만 줄 수 있을 뿐.

놈의 숨통을 끊는 것은 오직 대공 브리아니만이 가능했다.

‘시선을 끌고, 빈틈을 만든다.’

그 정도면 될 것이다.

그게 힘드니까 문제였지만 말이다.

지붕을 건너뛰고, 허공을 질주하며, 서우진의 신형이 빠르게 전장을 향해 다가갔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슬슬 전투의 양상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서우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브리아니가 소환한 것 같은 거대한 십자가가 게랄드의 마기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힘겨루기가 버거운지, 브리아니의 얼굴에는 다급함과 초조함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어서 도와야 해!’

하지만 서우진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십자가가 소멸했다.

“아…….”

서우진이 탄식했다.

그때, 브리아니가 사라지더니 게랄드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공격이 실패하며 위기가 찾아왔다.

‘못 피한다.’

서우진은 그녀가 게랄드의 공격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안 된다.

지금 저 공격을 맞으면, 브리아니는 반드시 죽는다.

서우진의 마력이 올올히 풀어져 온몸을 질주했다.

대공을 구해야만 했다.

뒷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스펠하임.”

지옥의 불꽃이 ‘룬 데아’에 깃들었다.

그 이질적인 힘에 검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조금만 참아.”

콰앙-!

서우진의 강력한 발구름에 집 한 채가 주저앉으며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셀레스티얼 윙.”

날개가 돋아났다.

예상했던 순백의 날개와는 정반대인 심연과 같은 흑익이었다.

순간 서우진의 모든 능력이 몇 배로 증폭했다.

찰나가 영원같이 흐르며, 주변의 사물이 빛줄기처럼 뒤로 흘렀다.

꽈아아아앙-!

브리아니의 몸을 찢기 위해 다가가던 게랄드의 팔이, ‘무스펠하임’과 ‘강격’을 품은 ‘룬 데아’의 일격에 어그러졌다.

부릅뜬 두 눈이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이, 퍽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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