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모르모 목마
흥분이 진정되지 않는다.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흡혈을 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모르모는 다음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빌런, 네메시스, 아니면 평범한 인간이라도 좋다.
누구든 피를 빨아야 했다. 피를 빨지 않으면 이 분노가 가라앉질 않을 테니.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모르모 컴퍼니의 연구실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 근처에 있던 연구원 몇이 그녀의 몰골을 보고 깜짝 놀라 거리를 두었다.
모르모는 붉어진 시야 속에 보이는, 가장 맛있는 피의 향기를 따라 걷고, 또 걸었다.
평범. 평범. 평범. 신선.
여기 있었구나.
“사… 살려주세요 사장님…!”
“아프지 않아… 조금도 아프지 않아… 히힛!”
불안에 떨고 있는 눈동자를 무시한 채, 그녀의 양 손이 연구원 한 명의 머리와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푹 하고 연약한 살갗을 뚫고 박히는 그녀의 날카로운 송곳니.
쭈르릅 쭈르릅 하는 소름끼치는 식사 소리가 연구실 안에 가득 울려퍼졌다.
주변 모든 연구원들은 겁에 질려 있었지만, 그 누구도 도망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곳에서 벗어나려 하는 순간, 그들은 심장 주변의 혈관이 모조리 막혀 죽기 때문이다.
“하… 살 것 같아….”
잔뜩 피를 빨린 연구원이 털썩 하고 쓰러졌다.
얼마나 많은 피를 빨렸는지, 그의 몸에 붉은 기가 사라져 희끗하게 보일 정도였다.
동료 연구원들이 서둘러 달려와 희생자를 어디론가로 데리고 갔다.
그제서야 붉게 물들었던 모르모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공포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아아, 또 저질러 버렸구나.
모르모는 눈을 질끈 감고 미간과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여러분. 하던 거 계속 하세요~?”
“…네! 네!” “네 사장님!”
쯧, 하고 신경질적으로 탄식을 내지른 모르모가 다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사장실에 돌아와서 보니 어제까지만 해도 일 잘 하던 비서가 죽어 있다.
온 몸의 피가 모두 빠져나간 듯 창백한 피부.
모르모는 사장실 한쪽에 마련된 비밀 배출구에 그녀의 시선을 흘려 보냈다.
다시 사장석에 앉은 그녀가 내선전화기를 들었다.
꾹 하고 눌리는 버튼 하나.
[네, 사장님!]
“새 비서 한 명 보내요.”
[…아. 알겠습니다.]
이미 이런 일이 몇 번이고 있었기에 대응은 무척 빨랐다.
이번에도 아래에서 일하던 평범한 사람 중 미리 선별되어 있던 한 사람이 비서로 올라올 테지.
“…쓰레기 같은 이능.”
[모르모/보유능]
— 혈주술(A), 피의 저주(A), 순리를 거스르는 자(B), 괴짜(B)
혈주술의 달인이 된 모르모는 일약 델타 급 중에서도 최강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혈주술의 파워가 오름과 동시에, 피의 저주도 함께 그녀의 정신을 오염시켰다.
[피의 저주(A)]
— 항상 신선한 피를 갈구하게 됩니다.
—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피를 취할 수 있게 됩니다.
부작용의 강도에 비해 무척 간단한 설명.
모르모가 처음 이 피의 저주에 대해 깨달았을 때, 그녀는 이미 사람 하나를 말려 죽인 뒤였다.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신선한 피를 섭취할 방법은 많았다.
주변이 온통 적.
빌런도, 네메시스도. 모두 그녀의 신선한 밥이었다.
그러나 이제 적들의 개체수는 현저히 줄어들었고, 반대로 모르모의 저주는 최악의 상태로 치달았다.
그녀는 이제 분노하거나 심장이 빠르게 뛰기만 해도 신선한 피가 필요해졌다.
그뿐만일까, 분노조절장애도 함께 왔다.
조금 전 한바탕 소란을 피운 것도 흑견 때문이었다.
“흑견… 멀쩡히 살아 있다니. 입실론급은 다르다 이거야? 아니, 그런데 아이스펀치는 어떻게 살아 있지…? 내가 꿈을 꾸는 건가?”
모르모가 소중한 곱슬머리를 쥐어짜듯 헝클어트렸다.
멀쩡히 살아 보드게임을 즐기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황당할 수밖에.
그들의 목숨줄을 쥐기 위해 꽤 많은 수고를 들였다.
상당히 조심스럽게 접근했으며, 기존보다 모르모의 혈액 비율을 열 배나 늘린 영약도 줬고, 분명 그걸 먹는 모습까지 봤다.
심지어 그들의 몸 속에, 모르모의 피가 흐르는 것마저 확인했는데.
왜 살아 있냔 말이다.
“짜증 나…”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당연히 폭탄 목걸이를 걸어준 쪽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 어떤 사람도 목숨 앞에선 평등하다. 협박의 정석이 아닌가.
쉽게 죽어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모르모는 흑견이 최소 심각한 부상이나 후유증을 겪게 될 거라 확신했다.
사람의 몸은 혈류가 멈추면 수 분 이내에 모든 장기가 괴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멀쩡했고, 인질이나 다름없었던 아이스펀치 역시 아무렇지 않게 방송을 하고 있다.
흑견이 뭔가 수를 쓴 것이 분명했다.
이제 위기에 처한 것은 모르모다.
흑견은 모르모 컴퍼니의 효자 상품인 영약에 들어가는 핵심 성분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모르모 타베사가 그걸 은폐하기 위해 수많은 시민들의 목숨줄을 쥐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마치 모든 일이 일어날 걸 알고 있는 사람 같다.
모르모가 접근해 올 것도, 이런 식으로 수작을 걸어 올 것까지 전부.
과거 아쿠아리스가 근미래를 예언했듯, 어쩌면 래시도 미래 예지 능력이 있는 건 아닐지.
모르모는 갑자기 다가올 미래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고개를 숙여? 어차피 내가 이런 수를 쓸 걸 알고 있었던 거라면, 나의 살해협박 따위는 갖잖게 여길 확률이 높잖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여러 가지 가설이 날선 대치 구도를 이어 갔다.
그러나 다양한 의견이 서로 충돌하는 와중에도, 모르모 타베사가 가진 핵심 전제는 변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녀가 모실 분은 단 한 명 뿐이었다.
인류의 새로운 희망이 되실 존재.
빛과 어둠 모두를 다스리고, 인간 역사의 새 지평을 열어줄 선구자.
용사와 히로인에 의해 끝내 히어로가 멸망하는 미래 대신,
히어로와 빌런을 넘어선, 헬런(Hellain)에 의해 쓰여지는 새로운 신화의 주인이 되실 분.
그 분이 있는 이상, 모르모는 절대 흑견에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
‘굴복하는 시늉만 하는 거야. 우리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미래예지의 정확도는 높아야 50%.
그렇게 추앙받던 아쿠아리스조차도 전란의 시대에는 인류의 멸종을 예언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인류는 결국 살아남았다.
흑견이 미래예지를 한다 하더라도 상관 없다.
모르모가 모시는 새로운 세계의 주인을 위해서라면.
설령 악인이 되어도 상관 없고, 목숨을 바쳐도 좋으니.
나아가야 할 길이 명확해지자, 모르모는 히죽 하고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괴짜.
그것은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을 통칭하는 말이지만, 괴짜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도 특성만큼은 다양하다.
괴짜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했다.
천재적인 두뇌로 뛰어난 발명을 해낸다거나,
상상도 못한 행동으로 주변인을 경악하게 만든다거나,
혹은 말도 안 되는 속임수로 대중을 놀라게 한다거나, 등등.
모르모는 그 중에서도 속임수에 능한 자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모르모의 심장이 평소처럼 차분해졌다.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쉰 그녀가 지체 없이 흑견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모시러 가겠다고.
모시고 와서 정식으로 사과드리고, 제대로 식사 대접하겠다고.
#98
“이런, 당신은 사망했습니다!”
“뭐?!”
김빙권. SP가 0이 되어 사망.
그의 캐릭터인 아이스펀치의 데이터가 캐릭터 시트에서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안돼! 아이스펀치!”
TRPG를 해본 사람이라면, 애지중지 키웠거나 힘겹게 살려 온 캐릭터가 뜬금없이 죽어버리면 얼마나 절망적인지 잘 알 것이다.
지금 김빙권이 딱 그러했다.
하지만 모두 자업자득이었다.
그는 슈가와의 협력보다는 주변 탐사에 열을 올리다가, 기현상을 연이어 마주하며 SP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이스펀치-Live/9,770명]
— 어째 이 씹새는 전에 공포겜 할때랑 달라진게 없냐?
— 성장이란 찾아볼 수 없는 최악의 스트리머
— 적당히 들이받으라니까, 기어코 갖다 박고 뒤져버리네 ㅋㅋ
— 이새끼는 히어로 닉네임 잘못 지었다니까 진짜
— 앞으로 빙신권 대신 빙신 어때?
— 빙신! 빙신! 빙신! 빙신! 빙신! 빙신! 빙신! 빙신! 빙신! 빙신! 빙신! 빙신! 빙신!
— 빙! 그는 신인가? 빙! 그는 신인가? 빙! 그는 신인가? 빙! 그는 신인가? 빙! 그는 신인가? 빙! 그는 신인가? 빙! 그는 신인가?
데이터가 날아가 깔끔해진 캐릭터 시트를 바라보며, 김빙권이 길게 한숨쉬었다.
바라보고 있던 슈가가 말했다.
“그러게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차분히 같이 탐사하자고 했건만…”
“하… 하지만… 궁금하잖아.”
래시가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내버려 둬. 쟤는 처음 보는 빌런한테도 일단 아이스펀치 날리고 볼 놈이니까. 그리고 나서 심장에 구멍이 뻥~ 뚫리겠지.”
적절한 유행어 활용에 야추단, 아니 아붕이들이 신나서 날뛰기 시작했다
— 역시 늑나! 무야호! 역시 늑나! 무야호! 역시 늑나! 무야호! 역시 늑나! 무야호! 역시 늑나! 무야호! 역시 늑나! 무야호!
— 구멍이 뻥~ 구멍이 뻥~ 구멍이 뻥~ 구멍이 뻥~ 구멍이 뻥~ 구멍이 뻥~ 구멍이 뻥~ 구멍이 뻥~
— 와 그건 뭐에요? 아이스펀치였던 것이에요! 하하하!
— 아빠 아이스펀치는 왜 죽었어? 뇌가 주먹에 달려서 죽었어!
— 엄마! 나 빙신이 될래요! 엄마! 나 빙신이 될래요! 엄마! 나 빙신이 될래요! 엄마! 나 빙신이 될래요!
쏟아지는 도배 벽돌.
김빙권은 이제 화낼 힘도 없어졌다.
“그래 니들 말이 맞다… 씹새들…”
래시가 잠시 마스터 역할을 내려놓고 그에게 물었다.
“이왕 죽은 거, 일 하나만 하고 오지 그래?”
“… 일? 뭐 부탁할 거 있어?”
최근에 포상을 많이 받았기에, 김빙권은 래시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응. 지금 이 소리 들려?”
일정한 주파수로 웅웅 하고 울리는 소리.
틀림없이 개인 비행정에 달리는 중형 마정석 제트 엔진의 공명음이었다.
“뭐야. 누가 왔나?”
“누가 초대장을 보냈나본데, 네가 좀 대신 갔다 와. 나는 슈가랑 게임 마저 하고, 방송 정리할 테니까.”
래시가 시점 변경 리모콘을 누르자 이제 슈가가 화면을 독점했다.
채팅창이 금세 슈가를 향한 아붕이들의 찬양으로 가득 찼다.
“쫄지 말고. 너는 내 대리인이니까.”
“…어 뭐. 쫄진 않을 거야!”
어차피 김빙권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오직 한 명, 래시 뿐이다.
그가 굳건한 표정으로 미소지으니, 돌아오는 건 래시의 가소로운 웃음이었다.
래시는 한쪽에 내려놓았던 유리병 하나를 그에게 휙 던졌다.
“그리고 가기 전에 이거 마시고.”
받고 보니 병에 담긴 것은 밝은 연어색의 점도가 있는 액체.
어제 래시가 직접 제조했던 영약의 레플리카였다.
래시는 손과 촉수를 일정한 리듬으로 까딱까딱 흔들며 김빙권을 배웅했다.
“다녀올게.”
뭐가 됐든, 그녀가 일을 맏겨주었다면 최선을 다해 완수해야겠지.
김빙권은 병 속에 담긴 음료를 단숨에 들이켰다.
일전에도 그랬지만, 맛은 같아도 약간의 효능 차이는 있었다.
래시가 만든 것을 마실 때면, 김빙권은 왠지 모르게 몸에 힘이 솟았다.
김빙권이 폰을 챙겨 집 밖으로 나가니, 전에 신하준이 비행정을 댔던 공터에 금색으로 M자가 크게 새겨진 비행정이 한 대 착륙해 있었다.
‘모르모 컴퍼니?’
분명 래시에게 협찬 광고를 제안했던 그 회사의 것이었다.
천천히 바람을 뚫고 비행정의 문 앞에 서니, 자동문이 스르륵 하고 열렸다.
안에 타고 있는 것은 델타급 히어로인 모르모 타베사였다.
그녀의 긴 금발 곱슬이 엔진의 바람으로 인해 세차게 휘날렸다.
맑은 벽안의 눈을 살짝 찡그린 채로, 모르모가 김빙권에게 물었다.
“… 흑견 님은요?”
래시가 말한 대로, 김빙권은 자신을 소개했다.
“바쁘다고, 절 대신 보냈습니다. 대리인으로 생각해주세요.”
모르모는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예상 범위 안에 있는 일이므로 그를 돌려보내진 않았다.
작게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김빙권을 향해 내밀어지는 모르모의 가늘고 흰 손.
그녀가 뻗은 손을 붙잡고 큼지막한 계단 둘을 올라 비행정 안에 탑승하며 뭔가를 발견한 김빙권이 고개를 갸웃했다.
‘… 뭐지? 피부색이…?’
히어로가 과하게 VE에 노출되어 빌런화가 진행되는 경우, 그것을 가늠할 수 있는 현상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가 피가 혼탁해지면서 혈색이 죽고 점차 창백해지는 피부.
방금 김빙권이 계단을 오르며 손을 붙잡았을 때,
그는 모르모의 손에서 혈색이 벗겨지며 피부가 창백해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지금 보면 그 창백했던 손에는 다시 혈색이 돌아와 있지만, 분명 모르모의 신체가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일순 숨겨진 진실을 드러냈었다.
그러나 김빙권도 피부색이 가변적인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잘못 봤나?’
역시 방금은 잘못 본 것이 아닐지.
김빙권은 피어오르던 의심을 거둔 채 차분하게 이륙을 기다리기로 했다.
물론 어차피 뭔가를 알아챘다 하더라도 예정된 미래가 변하진 않았을 것이다.
모르모는 꼼꼼하고 신중한 괴짜라 계획이 틀어지는 것을 죽는 것보다도 싫어하니까.
하지만 래시는 그런 모르모보다 더한 괴짜였다.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 비행정의 기내.
아무 일 없어 보이는 기내에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몰래카메라 역할을 하고 있는 김빙권이,
아무 것도 모른 채 미소짓고 있는 모르모를 녹화하고 있었다.
모르모는 그 어떤 의심도 할 수 없었다.
쭉 지켜봐온 김빙권은 막 다루긴 해도 래시가 나름 소중하게 대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
래시가 그런 그를, 어떤 위험이 있을 지 모르는 모르모의 회사로, 아무런 조치 없이 보냈다.
그건 모르모에게 있어 틀림없는 도발이다.
어떤 수를 던져도 받아줄 테니, 김빙권을 마음껏 가지고 놀아보라는 뜻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뭘 할 지 아니까, 어디 해 보자 이거지…?’
결국 모르모는 그릇된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녀가 이제부터 실행에 옮길 계획이 향후 래시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해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만천과해(瞞天過海).
역시 적을 속이기 위해서는, 아군을 바보로 만들거나 아군부터 확실히 속여야 하는 법이다.
김빙권은 자신이 인질이 될 거라곤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