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7화 〉흑견님 손바닥 위의 모기 (37/75)



〈 37화 〉흑견님 손바닥 위의 모기

[흑견]
— 적당히 어울려주다 
— 물어보는 거 있으면 친절히 다 대답해주고
— 네가 아는 것만 대답해줘
— 사과는 받지 마, 절대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온 모르모 컴퍼니.
김빙권은 뜬금없이 래시의 전서구 역할을 하게 되었다.


사장실에 마련된 근미래 느낌이 물씬 풍기는 회의실.
마호가니로 보이는 고급스러운 원목 테이블에 마주앉은  사람 사이에 전운이 감돈다.

비서가 음료를 내러 간 지도 몇 분.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르륵 하고 열리는 자동문 앞에 서 있던 비서가, 다소 어설픈 발걸음으로 천천히 걸어와 김빙권과 모르모 앞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일단,  축이면서 이야기 하실까요?”
“아. 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새빨간 루이보스 티.
향은 분명 루이보스지만, 어째서인지 색은  보던 것보다 조금 더 빨갛다.
색소를 첨가한 걸까, 하고 생각해보지만. 김빙권은 의심 없이 뜨거운 차를 호호 불며 홀짝였다.

김빙권의 입으로 선혈이 흘러드는 것을 보며 모르모가 히죽 웃는다.

“사실 흑견 님께 직접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아이스펀치 님이 대리인이라시니, 아이스펀치님께 말씀드리면 되겠죠?”
“네. 얼마든지요. 제가 그대로 전달해드릴게요.”

숫기 없는 남자의 눈이 머리 위부터 모르모를 천천히 훑고 내려온다.
진한 금발. 청명한 벽안.
진한 쌍꺼풀에서 느껴지는 그윽한 시선과, 살짝 벌어진 앞섶으로 보이는 가슴골이 유독 김빙권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이는 모르모.
이크. 보는 걸 들키겠어. 김빙권의 고개와 시선이 슬쩍 우측으로 돌아간다.


“흑견님께 제가 주제넘은 짓을 했어요. 그걸 사과드리고 싶어요. 흑견 님, 그리고 아이스펀치님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했거든요.”

목숨이라는 말에 김빙권이 화들짝 놀랐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모르모에게 협박당했다는 말이 황당하다.


두렵다. 눈앞의 여자가 갑자기 날카로운 송곳니를 김빙권의 목덜미에 들이밀 것만 같았다.
그녀는 피를 빠는 흡혈귀. 그 대상이 누구든 개의치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지.


하지만 차분해져야 한다. 래시가 말하지 않았는가?
사과는 절대 받아들이지 말라고.

“미안하지만, 래시가 사과는 받지 말라고 했어요.”


움찔, 하고 모르모의 광대가 경련한다.
그리고는 살짝 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니 사과는 없던 걸로 해 주세요. 래시도 다 생각이 있는 것 같으니.”


김빙권은 오로지 래시의 말만 듣는다.
그러니 절대 사과는 받지 않는다.
래시 테퍼론은 그에게 상식  자체. 그녀가 곧 진리이며 이치이니.

모르모의 얼굴 전체가 김빙권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게 떨린다. 분노로 미간이 일그러졌지만, 드리운 앞머리로 인해 감정은 가려진 채,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아… 그렇군요. 하… 하하. 뭐. 네. 그럴 수 있지요. 사과받을 일도 아니라 이거네요. 아… 네.”


목에 힘이 들어가 성대가 반쯤 막힌 듯한 목소리와 경련이라도 일으킨 듯 떨리는 입꼬리.
그러나 김빙권은 그런 모습에 크게 당황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김빙권은 겁이 많은 소년이다.
래시를 구하러 갈 때에도, 먼 길을 가며 시청자들과 계속해서 소통한 이유가 별 거겠는가.
등 뒤를 지켜주는 시청자들이 없었다면, 그는 몇 걸음 떼지 못하고 돌아왔을 테지.

하지만 지금의 그는 마치 남자로서 한층 성장한 것처럼 차분하다.
무엇이 그를 차분하게 만드는지 그는 몰랐다.
이곳에 오기 전에 한 것이라곤 래시가 건네준 짭영약을 마신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뭐 좋아요. 흑견 님께서 사과를 받아주시지 않겠다면 별 수 있나요.”


모르모도 올라오던 열을 간신히 식혔다.
차분해져야 한다. 상대는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고 있는데, 속임수의 달인인 그녀가 먼저 무너져서는 곤란하다.
기세, 표정, 그리고 화술이면 모든 상대를 바보로 만들 수 있는 것이 괴짜 모르모 타베사가 아닌가.

하지만 어떻게 저렇게 차분할 수 있지? 어째서 아무 미동도 없는 거지? 분명 모르모는 김빙권을 한 번 죽이려 했는데.
왜 이 남자는 저렇게 당당한 표정으로 겁먹지 않고 앉아있을  있지?
처세술의 달인인 그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무리 봐도 방송에서 호들갑떨던 평소의 그 아이스펀치가 아니다.

모르모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지나간다.
정상인이라면 슬슬 본인이 인질이 되었다는 것도 알아챘을 텐데.
하지만 진정해. 여기서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계획했던 대로만 하면 그만이다.

“그래도 이왕 대리인 자격으로 오셨으니, 융숭한 대접을 해드려야겠죠. 맛있는 식사를 준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래시가 말하길, 적당히 어울려주라 하였다.
김빙권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좋습니다.”








#100

[저격왕우소! - 자기가 사람이라고 대놓고 사기치는 뻔뻔한 스트리머가 있다?] [Live/11,799명]

김빙권이 인질이 되던 말던, 래시는 지금 한창 어느 스트리머의 저격방송을 염탐하고 있다.

접속한 아이디는 방금 만든 부계정.
흑견 본인이라는 걸 알려 좋을 것은 없으니 새로 하나 팠다.

[아니 얘들아. 내가 대놓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러다가 고소당하면 어떡해. 아 고소가 아닌가? 빨리나?]


 ㅋㅋㅋㅋㅋㅋㅋ
— 무친련 대놓고 말하는 거랑 뭐가 다르냐 ㅋㅋㅋ
— 속시원하게 한번 말해 ㅅㅂ ㅋㅋ
— ㅎㄱ?

래시의 영향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고, 신하준의 공개사과를 통해 단숨에 그 부피를 키운 것도 맞다.
하지만 아직 더 필요하다. 더 많은 사람의 관심과 숭배가 고프다.
래시 테퍼론에겐 그들이 만들어 낼   혼돈과 혼란이 필요했다.

저 높은 곳의 목표를 위해 단숨에 도약하게 해줄 장대가 마침 눈앞에서 킬킬대며 웃고 있다.
완벽한 빌드업의 화룡점정을 찍을 마지막 조각이다.

[야 아직도 모르는 새끼들 있어서 내가 마지막으로 얘기해준다. 새카만 문어처럼 생긴 여자 있잖아.  흐느적흐느적. 문어문어~]


 ㅁㄴㅇㅈ~
— 문어가 아니라 개지 ㅋㅋㅋ
— 갠지 거민지 아무튼 ㅈㄴ 흉물스러움 ㅋㅋ

방송중인 우소를 비롯해 수많은 시청자들이 꺼드럭거리며 래시를 까내리고 있지만, 래시는 아무 감흥이 없다.
담배를 피우지 않았으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아버지의 체취를 빨아들이고 머리를 비워도 생각은 같을 것이다.
맛있겠다.  스트리머, 참 맛있겠다.
그가 하고 있는 방송 내용도, 그가 데리고 있는 시청자들도.

빨아들이면 얼마나 재밌는 일이 일어날까.

체제에 가장 불만을 가진 사람을 설득해 내 편으로 만들 때, 그 쾌감은 배가 된다.
마치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고 버티던 주인공이 끝내 무너졌을 때 느끼는 묘한 정복감과도 비슷하다.


래시는 지금 그런 극적인 반전을 원한다. 그리고 이 방의 시청자들이라면 반드시 래시를 만족시켜줄 수 있을 터.

모르모는 모르모대로 알아서 바보짓을 하고 있으니, 래시가 할 일은 이제 간단하다.


우소는 평범한 인간이기에 히어로 팔찌로 연락이 불가능하다.
래시는 지체 없이 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 뭐야. 여보세요?]
“안녕, 우소.”
[… 누구세요? 제보자신가요?]


자기가 저격하는 대상의 목소리조차 알아듣지 못하다니.
참으로 건방진 방송인이 아닌가.
저격했으면 언제든 해명이나 역저격이 날아올 것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에겐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고, 그걸 손쉽게 해결할 방법도 있다.
그렇기에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저격방송을 이어가는 것이다.
뒤에 서 있는 든든한 빽이, 그를 노림과 동시에 지켜주고 있다.

래시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야, 흑견.”


아니나다를까, 우소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 흑견 님? 이야, 얘들아. 흑견 님한테 전화 왔다.]

채팅창이 시끄러워진다. 혼란이 온다.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래시의 머리가 점차 맑아진다.

“방송 출연하고 싶은데. 가능해?”


우소는 흑견의 출연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가 지금까지 담군 사람 만도 수백 명. 개인부터 회사까지  대상도 다양했다.
심지어  건 한 건 끝내주는 뒷사정을 가지고 있어 대박이 터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번에도 흑견의 게스트 출연 제안을 거절하지 않는다.
그녀가 직접 오면, 분명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얼마든지요. 언제 시간 되시는데요? 출연해주시면 저야 좋죠. 저희 시청자들도 엄청 좋아할 텐데.]


우소를 오만하게 만든 자가 누구인지, 래시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지금껏 아무 낌새도 없다가 갑자기 방송이 시작된 걸 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가.

지금 래시의 집주인을 인질로 잡았다고 확신한 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이상한 논리에 심취했지만, 툭 치면 죽을 것 같은 가을철 모기같은 여자를 말하는 것이다.

비단 그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괴짜들의 문제다.
뛰는 놈 위에는 항상 나는 놈이 있는 법인데, 그들은 그걸 모른다.
래시는 그 일반화에서 제외되는 것이 당연하고 말이다.


“이틀 뒤에 찾아갈게. 주소 남겨줘.”
[아 뉍~ 금방 금방 보낼게요~.]


아마도 지금 웃고있는  모르모이겠지만, 정작 기분이 끝내주는 쪽은 래시다.





#101


끈임없이 쏟아져나오는 황제의 식탁을 받은 지 열 시간.
김빙권은 뒤늦게 눈을 떴다.

“… 음.”

그러나 앞은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그의 눈을 가리고, 손발을 구속해두었다.
뭔가가 심장을 옥죄는 듯 답답하다. 그로 인해 마나의 흐름도 원활하지 못하다.
평소대로라면 이런 구속 쯤, 손끝에 마나를 모아 터트리면 순식간에 부술 수 있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그의 심장이 간신히 뛰고 있는  느껴진다.
뭔가에 의해 억제된 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푸쉬이, 하고 압축기가 가동된다.
네메시스 합금으로 만든 개폐식 문이 열리는 소리다.
매끄러운 레일을 따라 조용히 위아래로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또캉또캉, 강철 바닥 위에 구두 소리를 내며 천천히 김빙권의 앞으로 다가왔다.

몸에서 나는 향기가 익숙하다.
아까 대접받았던 루이보스 티에서 나던 알  없는 쇠비린내가 눈앞의 누군가에게 난다.
 냄새다.


“아이스펀치. 미안한데, 조금만 더 나랑 어울려줘야겠어요.”

세상에 융숭한 대접을 하겠다면서 맛있는 밥 먹이고 눈을 가리고 손발을 묶는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김빙권은 절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눈을 감고 머리를 비우니 이제야 그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
머리가 알 수 없는 사념들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어구가 반복적으로 들린다. 편안한 목소리, 따뜻함이 느껴진다.

적당히 어울려 줘.
쫄지 마라, 넌  대리인이다.
아이스펀치는, 래시가 믿는  안 되는 사람이다.


‘그렇다는데….’

평소 같았으면 이미 겁 먹고 눈물을 찔끔 흘렸을 김빙권이지만, 지금은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아도 알아서 감정이 다스려진다.
그래서 그는 그냥 마음을 비우고, 반복되는 사념에 몸을 맡겼다.
어울려 줘. 쫄지 마. 어울려 줘. 쫄지 마.


그래 쫄 것 없어. 래시는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래시는 진리 그 자체인 걸.

“어울려 줄게요. 모르모 타베사 님.”

어느새 김빙권의 목소리는 다소 들떠 있다.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면 받을 포상에 대한 생각에, 두려움은 완벽히 사라진 지 오래다.


가려진 시야 밖에서 음습하게 웃고 있는 수상한 여자가 무얼 생각하고 있든, 심장이 답답하고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듯 고통스럽든.
김빙권은 래시만 있으면 된다.

“어… 네. 좋아요. 정말 좋은 자세에요. 그렇게 차분히 기다려요~?”


하루하고 이틀이 지나면, 김빙권은 전혀 다른 존재로 다시 태어나리라.
그는 여신께서 바보 같은 기계 왕자를 속여 뜯어낸 장치를 통해, 모르모가 창조한  번째 신인류가 될 것이다.


김빙권은 결국 여신님께 복종하게 될 것이며, 그 또한 모르모의 즐거움.
제아무리 흑견이라도 소중한 사람을 남에게 빼앗기면 분명 속이 쓰릴 테지.


모르모는 키득키득 웃으며 김빙권이 있는 어두운 공간을 서서히 빠져나갔다.

열렸던 상하개폐식 문이 다시 닫히고 나면, 알 수 없는 기계의 비프음과 방울 부글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고요가 찾아오고서야 김빙권의 귀에 담기는 주변의 낮은 소리들.

부글부글. 삑. 부글부글. 삑.
촤락. 촥. 처덕.


거대한 수조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소리.
거품이 부글거리며 터지는 소리.
수조에서 넘친 물이 차박거리며 느릿하게 배수구를 따라 흐르는 소리.

김빙권이 시선을 아래로 잔뜩 내리깔면, 은은한 녹색 불빛이 보인다.
어둠 속 유일한 불빛 위에는, 뜻을 알 수 없는 단어 하나가 적혀 있다.


[Hellai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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