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천사가 좋아 악마가 좋아?
합방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하는 건 별 것 없었다.
방송은 카페 테이블에 마주 앉아, 커피와 케이크를 먹으면서, 래시가 르엘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대담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자기소개 해봐.”
“아… 안녕하세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르엘입니다. 올해 스무 살입니다….”
그 사이에 시청자는 2만명이 더 늘어 평균 시청자 수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흑견-Live/52,442명]
— 이것이 순수 미소녀?
— 빙신권은 비교도 안 되네 아 ㅋㅋ
— 덜렁이 OUT 덜렁이 OUT 덜렁이 OUT
— 역시 오리지널은 못 이기지 ㅋㅋ
“방송은 언제부터 했어? 지금까지 뭐, 재밌는 일은 없었어?”
“음… 그러니까요.”
르엘은 지금까지 방송하면서 있었던 다양한 사건에 대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야기를 하면 할 수록 시청자들의 반응이 침울해졌다.
그럴 수밖에. 들어 보면 눈물이 나오는 이야기 뿐이었으니 말이다.
듣고 있던 래시마저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르엘은 처음 방송할 때는 캠을 끄고 듀라한 방송을 했는데, 짓궂은 시청자들이 들어와 계속 그녀를 괴롭혔다.
이유는 별 것 없었다. 그녀가 당시 한창 이슈의 중심에 있던 넷카마 스트리머와 목소리가 비슷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슈를 몰고 싶었던 일부 커뮤니티 이용자들이, 문제를 일으킨 넷카마가 닉네임을 바꾸고 다시 방송하는 것처럼 진실을 조작해 인터넷 방송 갤러리에 올렸다.
갤러리가 불탄 것은 당연했다. 넷카마에게 속아 뿔난 찐 시청자들을 비롯해, 불구경하며 기름을 부으러 달려온 사람들에 의해 한바탕 방송이 난리가 났다.
당시 그녀의 시청자는 일순 수백명까지 치솟기도 했으나, 그건 아주 잠깐의 영광.
영광이라고 부르기도 뭐하다, 결국 남은 건 상처뿐이었으니 말이다.
이후에 진실이 밝혀지고, 넷카마 스트리머 본인이 르엘과 자신은 다른 사람이라고 못을 박고서야. 게시판에 며칠 내내 매달려 있던 르엘이 풀려났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르엘은 괜찮다고 이야기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평균 시청자 1명짜리 방송이 20명이 되었다며 좋아하기까지 했다.
한번 그렇게 이슈를 몰았으니 더 뜰만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방송은 재미가 없었으니 말이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재미가 없었다.
소통방송도 소통방송 나름인데, 르엘의 방송은 천편일률적이었다.
뭔가 물으면 우물쭈물하며 얼버무리고, 다니는 학교에 대해 물으면 소극적으로 피하고, 뭘 좋아하냐고 물으면 딱히 좋아하는 게 없다고 대답하고, 그럼 뭘 싫어하냐고 물으면 “저는 아무도 싫어하면 안 돼요!”라고 어처구니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하는데 없는걸.
그러니 재미가 있을 리가.
그리고 그때쯤 해서, 르엘에 집착하는 시청자 하나가 나타났다.
르엘은 그를 “천사님”이라고 불렀지만, 그건 그녀만의 생각.
솔직히 방송을 보는 나머지 시청자 대부분이 그를 불편해했다.
하지만 그가 있는 덕에 르엘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내칠 수도 없었다.
르엘이 가스라이팅 전문 천사님에게서 탈출하려면 방법은 하나 뿐이었다.
시청자가 더 늘어나 굳이 천사님이 없어도 되는 환경이 만들어지던가, 생계에 당장 문제가 생기더라도 천사님을 내치거나.
당연히 시청자들은 후자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지켜보는 이들도 대부분 자기 앞가림하기 바쁜 학생들이라 고민만 깊었다.
그렇다고 르엘을 그냥 내버려두자니, 그대로 두었다간 천사님에게 잡아먹힐 까봐 걱정도 되었다.
‘… 내가 없으니까 상황이 좀더 귀찮아졌나보네.’
사실 회귀하기 이전에는, 래시가 곁에 있어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래시는 물심양면으로 뛰어다니며 합방처를 알아봤고, 그러던 중 마음 맞는 델타 급 히어로 한 명과 간신히 르엘을 연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놀랍게도 그 사람이, 바로 김빙권이었다.
꽤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그날 천사님과도 이별했다.
그는 자기 없이도 잘 될 것 같냐며 악담을 퍼부었지만, 비극적인 피폐 스토리는 없었다. 르엘은 그 이후 꽤 잘 나갔기 때문이다.
야추단은 빈곤하게 살면서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는 르엘의 말에 울음을 터트렸다.
— ㅠㅠㅠㅠㅠ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 우럭아왜우럭…
— 아니 이건 좀
— 누가 빨리 무지성 후원좀 해봐!
[ ㅠㅠㅠ 님이 후원했습니다! (10 D) ]
— 미안해 누나 내가 가진 게 이것 뿐이야…
[ 눈나… 님이 후원했습니다! (5 D) ]
— 누나 햄버거라도 사먹어… 난 매점 일주일 안 가면 돼…
그에 잇따르는 소규모 후원들. 만 원 이하 단위로 빠르게 후원금이 쌓였다.
그렇지만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은 야추단이 모두 팬미팅장에 가버린 탓에 오늘따라 후원금이 빈약하긴 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르엘이 계속 자신의 기구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동안, 래시는 계속 후원창에 시선을 고정했다.
기다리던 사람이 올 때가 되었다.
[ 1004 님이 후원했습니다! (100D) ]
— 헐 ㅋㅋ 르엘 여기서 뭐함? 오늘 쉰다며
— ㅗㅜㅑ 뭐임
—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은 야추단이 왔다
— 사장님 오셨습니까
왔다. 천사님.
처음부터 천사는 아니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르엘의 천사라고 당당하게 밝히며 르엘을 제멋대로 휘두르려고 했던 후원자이자 집착팬.
“앗. 천사님!”
르엘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바보 같은 아이다. 그저 모이만 준다 하면 기뻐서 삐약거리는 것이, 순수한 병아리 같다.
모이를 주는 이유가 키워서 잡아먹으려는 속셈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우물쭈물하며 변명을 해 보려는 르엘의 양 어깨를, 래시의 촉수 두 개가 날아가 꼭 붙잡는다.
래시의 입이 말하고 있다. 거짓말 하지 마. 당당해져.
네가 어째서 이 곳에 왔는지, 저 사람에게 밝혀. 라고.
“아 그… 저…. 사실. 팬미팅 왔어요! 저… 흑견 님 광팬이라서요…. 죄송해요 지금까지 말씀을 못 드렸어요.”
방송에서 솔직한 취향을 말하지 못한 것을 뒤늦게 밝히는 르엘.
그 말을 들은 천사님이 반응해왔다.
— 1004님 : 뭐야
— 1004님 : 우리 시청자보다 흑견이랑 아이스가 더 중요한거네? ㅋ
말에서부터 느껴진다.
어떻게든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고 그가 진실을 가리고 있다.
‘내 말이 맞다’, ‘너는 틀렸다’, ‘네 생각은 항상 문제가 있다’ 라며.
거짓된 논리로 르엘을 흔들려 하고 있다.
“아, 아뇨! 그런… 그런 뜻은 아닌데….”
— 1004님 : 에이 우리가 더 중요했으면 팬미팅 안 가고 방송 켰겠지
— 1004님 : ㅇㅈ?
“으….”
르엘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한 채 초조한 심정으로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지켜보고 있던 래시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뇌까렸다.
“아니 뭐, 르엘은 사람 아니야? 보고싶으면 올 수도 있는 거지. 100 드림이나 후원하는 거 보면 분명 코어팬인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생각이 편협해?”
그냥 대놓고 도발이었다.
르엘이 아무리 천사님이라 느낄 지 몰라도, 남들이 보기에 그는 천사가 아니었다. 악마지.
“…흑견 님!”
당황한 르엘이 래시를 멈춰세우려 했지만, 래시의 촉수가 르엘의 입을 가리는 것이 더 빨랐다.
“흑견이 아니라, 래시라고 부르랬지.”
“우으으으웁.”
래시는 그녀의 발언권을 봉쇄한 채로,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천사님, 맞나? 르엘이 그렇게 부르던데. 몇 달이나 르엘을 괴롭혔으면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어?”
— 1004 : ?
— 1004 : 누가 괴롭혔다는 거임? ㅎ
— 1004 : 난 괴롭힌 적 없음
아무래도 답이 없겠다 싶었는지, 래시가 대뜸 인민재판을 시작했다.
“자, 여기서 투표 한 번 갈까. 스트리머가 다른 스트리머 팬미팅 보러 올 수도 있다. 없다. 야추단,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래시는 굳이 야추단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들의 솔직한 반응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에 따라, 앞으로 래시가 보일 행동양상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투표]
[1위 - 있다 (77.9%)]
[2위 - 없다 (22.1%)]
약 4:1. 우세한 것은 스트리머에게 자유를 주자는 쪽이었다.
그들이 말하고 있다, 스트리머도 사람이라고.
당연히 그들을 아껴주는 시청자들을 최우선하는 것이 맞지만, 이렇게 가끔이라면, 그들에게도 즐길 시간을 주어야만 했다.
사람마다 취미생활은 다르겠지만, 그들도 좋아하는 것은 있을 것 아닌가.
방송이라는 것이 일과 취미 사이를 갈라 구분하기 쉽지 않다지만, 르엘은 오로지 방송 수입으로만 먹고 사니 방송이 확실히 일의 영역에 있다. 시청자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서비스업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게다가 르엘이 일을 대충 한 것도 아니었다. 하루 8시간씩 꼬박꼬박 방송하며 시청자들과 놀아주었다. 재미없다는 말을 들어도, 뭔가 해 보려고 항상 노력했다.
그런 르엘에게 주어진 하루의 휴가가 오늘이다. 그것도 보고 싶은 인기 스트리머들을 보기 위해서 수도 없는 고민 끝에 찾아왔겠지.
그런 성실한 아가씨의 취미활동을 방해하다니.
당연히 방해하는 쪽이 나쁜 것 아니겠는가.
— 1004 : 아니 그럼 처음부터 솔직히 말하고 갔어야지;
— 1004 : 시청자들 다 뭔일 있나 싶어서 걱정하는데
— 1004 : 걱정했더니 개뿔 ㅋㅋ 놀러갔네? 이러면 잘도 좋아하겠다
나름 그럴싸한 논리 전개.
그러나 그럴싸해도 맹점은 분명히 존재했다.
천사님이 르엘에게 쌓아 온 압박과 제한. 그걸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지속적으로 르엘이 나도는 것을 봉쇄했기 때문에, 르엘이 지레 겁을 먹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팬미팅 간다고 하면 분명 저런 소릴 듣게 될 것 같아서겠지.
그러나 방송을 지켜보는 야추단들이 그럴싸한 놀리에 휘둘려 넘어갔다.
의견이 반반 나뉜 것은 물론, 이쪽 저쪽 어디에도 끼지 않은 채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늘었다.
— 그런 것 같기도 하고
— 누나가 잘못했네
— 음…
— 나는 모르겠다
혼란이 가중될수록 래시는 힘이 난다.
안 그래도 르엘이 곁에 있어서 머리가 맑았는데, 채팅창이 혼란에 빠지니 더 이상 재잘거리는 상념이 들리지 않았다.
지금 이순간. 래시의 자아가 처음으로 완벽히 남자 트라피조로 돌아왔다.
“그렇다네. 르엘. 미안하다고 말씀드리자.”
“… 아으… 네….”
르엘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군다.
꽤 큰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녀가 입을 열려던 그 순간이었다.
래시는 과거 르엘의 매니저이자 편집자였던 기억을 떠올려 그녀에게 말했다.
“천사님 말고, 야추단에게 사과해. 방송에 저런 이상한 시청자 유입되게 해서 죄송하다고 말씀 드려.”
“……네?”
무척 당황했는지 르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래시는 진심인 걸.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말했다.
“빨리. 천사인 척 하는 이상한 시청자가 유입되어 방송 분위기를 흐렸습니다. 다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해.”
“어… 어어….”
“빨리.”
“네!”
르엘의 심경이 복잡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여러 감정이 뒤얽혀 있다.
불안, 초조, 조바심.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알 수 없는 기대감까지.
래시가 속으로 생각한다.
어서, 천사님이 채운 족쇄를 풀어 르엘.
너를 도와줄 천사는 저 천사의 탈을 쓴 악마가 아니라, 바로 나야.
당장 새장에서 탈출해. 도와줄 테니까.
“그… 천사님이 절대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천사님…. 거짓말 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되돌아온 것은 목 막히는 고구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지켜보는 래시는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너무 착하고, 너무 순수한 소녀다.
‘전에도 이랬었지.’
과거 래시가 비슷한 식으로 천사님을 떨궈내려 했을 때도, 르엘은 끝까지 천사님을 옹호하려 들었었다.
그리고 그것이 역효과가 나서 시청자들의 불만을 샀다.
60명까지 올랐던 르엘의 평균 시청자가 다시 30명이 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천사님의 가스라이팅이 제대로 성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래시가 이미 예상한 바였다.
르엘의 성격이 그러한 걸 어쩐단 말인가.
그럼에도 이는 그녀가 반드시 넘어야만 할 시련이다.
방금의 짧은 대화는, 그 시련에서 르엘이 스스로 족쇄를 끊어낼 수 있도록 래시가 쥐어준 줄톱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줄톱은 영영 쓸 일이 없겠지.
래시는 눈앞에서 르엘이 고통받는 모습을 절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으니까.
침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씹고 있는 그녀를 보며, 래시는 즐거운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돌발행동을 했다.
“응~ 나는 인정 못해. 그러니까 1004, 너 밴. 다시 오지 마.”
— 1004님이 강제로 퇴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