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6화 〉무지성 나데나데 (56/75)



〈 56화 〉무지성 나데나데

[흑견 - 이것이 하꼬의 삶…?] [Live/67,199명]

래시는 방제를 바꾸었다.
르엘을 놀리기 위해서라기보단, 그녀가 자신의 현재 상태를 객관적으로 돌아봤으면 해서였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지금 스트리머 르엘의 참혹한 삶의 현장에 와 있습니다.”
“그만해…….”

어느새 이 분위기에 조금은 적응했는지, 르엘도 아까처럼 눈물을 글썽이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조금 부끄러웠는지, 카메라가 향하는 곳마다 달려가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치우느라 분주했다.


 안은 상당히 깨끗하네
—  발언;
 그만둬
 ㅋㅋㅋㅋㅋ

야추단이 저마다 감상평을 늘어놓는 사이, 래시의 촉수가 뭔가를 발견해 카메라 가까이 가져왔다.

“귀여운 디자인이네.”
“꺄아아아악!”

깜찍한 디자인의 연분홍색 브라였다. 레이스도, 프릴도 거의 달려있지 않은. 학생에게나 어울릴 법한 디자인.
보자마자 야추단 중 속옷전문가들이 납셨다.


— A야?
— A네
 ㅋㅋㅋㅋㅋㅋㅋ
— 무친놈들 A인줄은 어떻게 아는데
— ㅅㅂ 저거 야옹단 아니면 인싸쉑들임
— 인싸 쳐내 ㅡㅡ
— 보자마자 어케 아냐고;


채팅창에서 난리가 났다.
발언한 놈들 인싸라면서 효수형에 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래시가 중얼거렸다.

“야. 저 새끼들이 뭘 안다고 그래. 기다려  내가 직접 확인해  테니까.”
“뭐, 뭐 하려고?!”
“이리 와.”

래시는 르엘을 촉수로 끌어당기고는, 양 손을 크게 벌려 르엘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히익?”


당황한 르엘이 온 몸을 쭈뼛 세웠지만, 래시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봉긋한 가슴 주변을 이리저리 매만지는 래시의 손길.
금세 측정을 끝낸 그녀가 속으로 생각한다. 꽉찬 B. 여전하다.


“B잖아. A라고 한 새끼들 1시간 채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B였어?
 인싸인척 하는 아싸였네 ㅋㅋ
 더닝 크루거 연전연승 ㅋㅋ

래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르엘의 방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10평도 안 되는 좁은 원룸 안에 온갖 물건이 가득가득 들어차 있다.

침대 하나. 방송하는 책상과 컴퓨터 하나. 책장 하나. 옷장 대신 행거 하나. 낮은 서랍장 하나. 싱크대 하나. 작은 냉장고 하나.

‘이런 곳에서 어떻게 둘이 살았나 몰라.’

옛 생각을 하니 그리우면서도, 지금 김보람의 집을 생각하면 도대체 어떻게 이 비좁은 곳에서 둘이 살았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회귀 전, 이 좁은 집을 탈출한 것이 아마 지금으로부터 3년쯤 뒤였을 것이다.


어느새 익숙한 예능프로그램이 되어버린 흑견의 방송.
래시는 방 안을 다 살펴봤다고 생각했는지 냉큼 컴퓨터 앞에 앉았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불평했다.

“컴퓨터 왜 이렇게 느려.  이걸로 방송을 어떻게  거야?”
“… 어… 어떻게든?”


어떻게든 했었지. 래시도  안다.
회귀 전이었다면, 저 컴퓨터를 지금으로부터 1년도 넘게 쓴다.
생계가 걸린 방송인이란 대부분 그런 법이다.


“흐음… 일단 컴퓨터 업그레이드부터 해야겠네.”


공짜 밥을 먹는 방법. 그리고 공짜로 컴퓨터를 업그레이드 하는 방법.
이론은 같다.

“야추단. 우리 르엘에게 맞춰줄 최신형 컴퓨터의 부품이 필요해. 휘황찬란한 LED는 필수인 거 알지? 케이스는 아까 봤던 연분홍색이 좋겠어.”
“으아아아….”


브라의 색을 기억해 말하는 래시의 뒤에서 르엘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누군가가 똑똑 하고 문을 두드렸다.
르엘이 나가 문을 열어주니 나타난 것은 퀵맨 아저씨였다.

“오~! 오랜만입니다 흑견 님~!”


오랜만에 보는 구수한 모습에 야추단이 격한 반가움을 표시했다.

— 아재!
— 와 ㅋㅋㅋ  지내셨나
— 얼굴 피신  봐라 ㅋㅋㅋㅋㅋ
— 장사가 그만큼 잘되신다는거지~

그는 최근에 등급 측정을 다시 했고, 그 결과 베타 등급으로 승격되었다. 여전히 하는 일은 비슷한데, 과거와는 달리 퀵배달과 긴급구조 업무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잘 지냈어? 부품은.”
“제가 바람같이 가지고 왔지요~.”

퀵맨은 들고 온 커다란 박스를 래시 앞에 내려놓았다.
촉수 끝을 날카롭게 해 포장을 뜯으니, 래시가 뿔로 달고 있는 녀석과 비슷한 수준의 본체를 조립할  있는 부품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 와중에 케이스는 아까 래시가 바닥에서 주웠던, 굴러다니던 르엘의 가슴 가리개와 정확히 일치하는 핑크색이었다.


퀵맨이 구수한 표정으로 막간의 광고를 남긴 뒤 퇴장하자, 래시는 르엘이 세탁기에 집어넣은 브라를 다시 가져와 케이스 옆에 가져다대며 감탄했다.


“이야. 이거 케이스 주문한 놈 절대색감이야? 이걸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맞췄어?”
“…? 뭐야, 언제 가져갔어!”

르엘이 소리지르며 달려와 래시에게서 빼앗긴 물건을 되찾아갔다. 슝 하고 날아간 가슴 가리개가 세탁기 안에 정확히 골인했다.

“뭐 어때 여자끼린데?”
“방송중이잖아…!”
“에이 뭐 어때. 걱정 마. 야추단에 나쁜 놈들은 없어. 그렇지 야추단? 너희 다 르엘 좋아하지?”


오랜만에 돌아온 충성심 확인 타임.
래시의 말에 반응하여 야추단의 대답이 와르르 쏟아졌다.

 르엘 좋아
 누나 좋아
— 헤으응 르엘눈나
— 르엘! 르엘!
— 눈나아아아아아아

저 중에는 분명 르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겠지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방송에선 나이가 어떻든 누나라 부르는 것이 편하니 말이다.


“자 그럼. 조립을 해볼까나. 자리 좀 비켜 줄래?”
“어? 어. 잠깐만. 그런데 그거 누구 돈으로 산 거야?”

래시가 알고 싶냐며 되물었고, 르엘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출처를 확실히 하고 싶다는 르엘의 의지 표명.
그러나 래시에겐 알려줄 의무가 없다.


수상하게 돈이 많은 야추단이 손수 골라 보내준 부품들이다.
이유는 몰라도, 르엘을 위해서 그들이 보내줬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있겠는가?


“내 돈으로 산 거 아니야. 걱정 마.”
“… 어?”
“정말이야. 그러니까 신경쓰지 마.”
“어….”


르엘이 혼란에 빠졌다.
래시가 자기 돈 써가며 주는 선물이라면 거절하려 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그럼 누가 샀단 말인가? 르엘은 천천히 조금  래시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설마, 시청자들이 사준 거야?”
“그런 셈이지.”

말문이 막힌 르엘이 멍한 표정으로 컴퓨터를 조립하는 래시를 바라보고 있다. 그 지긋한 시선을 느낀 래시가 말했다.

“우리는 스트리머니까. 시청자들이 준   받아야지. 그렇지?”

친구에게  지기 싫어하지만, 어쨌거나 방송인이니 시청자들이 주시는 돈으로 벌어먹고 사는 것이 정상.
그런데 그 시청자들이 더 좋은 방송 하라며 컴퓨터를 맞춰 주셨다.
르엘의 논리회로가 돌아가 결론을 냈다.
이건 받아도 된다!

“그… 그러네.”
“그렇지~.”


짧은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래시는 촉수 8개와 손 2개를 동시에 써 가며 순식간에 조립을 완료했다.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야추단이 감탄했다.

— 와 늑나, 우리 회사 와서 일하면 안됨?
 우리 공장 라인 로봇보다 200배는 빠르네 ㅋㅋㅋ
— 이게 말이 되냐고!
— 유입 티내지마!
— 흑견이 기계를 잘 다루는 건 ‘상식’


촉수가 빠르게 움직여 기존의 본체를 뜯어 냈다. 그 다음 8개의 촉수가 두 무리로 갈라졌다.
 개는 새로 조립한 피씨와 선을 연결하고, 다른 네 개는 원래 있던 피시를 분해하고 마개조하기 시작했다.


“야추단. 27인치 모니터도 두개 쯤 필요하겠는데.”
“뭐? 아, 아니야! 여러분! 안 주셔도 돼요! 이미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저 왔어요~ 흑견 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착하는 퀵맨. 르엘은 어안이 벙벙했다.


— 아재 ㅈㄴ 빠르네 진짜
 전보다 더빨라진거 실화냐고
— 이게 퀵맨?
— 아 ㅋㅋ 서울에서 퀵해서 먹고살라면 저정도는 돼야지

퀵맨은 또다시 두 개의 모니터 박스를 내려놓고, 한번 더 광고를 때리고 퇴장했다.
익살맞은 아저씨의 연속 광고에 야추단이 환호했다.


“야추단. 책상이 좀 작다. 모니터가  올라가. 조금 큰 책상.”
“잠깐!”
“흑견 님~!”

래시의 무지성 주문은 계속 이어졌다.

“야추단. 침대가 너무 오래됐어.”

“야추단. 이불도 새로 사야겠다.”

“야추단.”

“야추단!”

“야추단—.”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더이상 르엘의 집 안에서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깔끔한 새 매트리스가 놓인, 1층에는 옷장과 서랍이 달린 좁은 집에 잘 어울리는 벙커형 침대. 다가올 여름에 걸맞는 얇은 극세사모 이불과 푹신한 베개.


큰 모니터 2대도 올려쓸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책상과,  아래서 번쩍거리는 무지개색 LED로 장식된 최신형 컴퓨터. 이전까지 흐릿하게 르엘의 모습을 잡았던 구린 웹캠 대신, 그녀의 뽀송뽀송한 얼굴과 흰 솜털까지 보이는 PP화질 캠. 방송하는 사람에게 필수라는 게이밍 체어까지.


집의 옵션에 포함된 냉장고와 세탁기까진 바꾸지 못했지만, 이미 이것만으로도 집의 분위기가 상당히 변해 버렸다.

“이제야 좀 사람 사는 집 같네.”
“으아아아아….”


르엘은 계속 래시를 따라다니며 훼방을 놓으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녀가 계속 귀찮게 하자 래시는 아예 르엘을 벙커 침대 위쪽에 올려놓고 내려오지도 못 하게 만들었다.


“자, 앉아봐.”
“아니. 이게 말이 돼?”
“되지. 그렇지 야추단?”

 이게 야추단의 힘이지
 수상하게 돈이 많아
— 어라…? 이번달 생활비의 상태가…?
  ㅋㅋ 나만 아니면 
— ㅋㅋㅋ 어떻게든 됐겠지~


아무렴 어떠랴. 야추단의 대부분은 빈곤해도, 상위 몇 프로에 속하는 인원들이 어련히 구매해서 보내주었을 것을.

래시의 촉수 네 개는 아직도 바쁘게 뭔가를 하고 있다.
뭔고 하니, 방금 전까지 나온 쓰레기를 계속 압축해서 녹이고 있는 중이었다.
원래 르엘이 쓰던 물건이니 쓰레기라 하긴 뭐하지만. 어쨌든  쓰면 쓰레기가 아닌가.
새 물건으로 가득 찼는데 굳이 헌 물건을 들고 있는 것도 이상하다.

기지개를 쭉 켜며 래시가 슬쩍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6시.
호텔에서의 팬미팅도 슬슬 마무리 단계일 테고, 래시와 르엘도 저녁 먹을 시간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래시는 이번에도 자신이 말할까 하다가, 르엘에게 기회를 줘 보기로 했다.
물론,  전에 밑작업이 조금 필요했다.


“야추단. 이렇게 불쌍하게 살았던 르엘이 굶으면 될까 안 될까. 라면만 먹고 살면 될까 안 될까?”

지금까지 래시는 끊임없이 르엘에게 가엾다는 프레임을 씌워 왔다.
 역시도 일종의 가스라이팅이긴 하지만, 르엘을 지금의 구렁텅이에서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야추단에게, 르엘은 세상 불쌍하고, 무조건 잘 해줘야만 하는 상대가 되어버린  오래였다.


— 안 돼지 당연히 ㅡㅡ
— 존나 먹여
— 눈나  먹고 싶음?
— 눈나 밥먹이는 건 절대 못참지

래시가 채팅창 반응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다는데?”

이제야 겨우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게 된 르엘이 채팅창 반응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 그치만….”
“왜. 이것도 시청자들이 주는 건데. 안 받을 거야?”


스트리머는 시청자들이 있어야 완성되며, 시청자들이 주는 것은 거절해서는  된다는. 르엘의 머릿속에 들이찬 확실한 관념.
그것이 있는 이상, 르엘의 대답은 이번에도 래시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받아야지….”
“좋아. 그러면….”

래시는 르엘이 손에 쥐고 있던 폰을 빼앗아가더니, 지문인식 잠금을 아무렇지 않게 해제하고 메신저앱을 켰다. 그리고 오픈톡방을 만들어, 톡방 이름을 시청자들에게 공개했다.


“야추단. 이제부터 르엘이 배고프다고 하면,  톡방으로 무지성 기프티콘 투하해. 알겠어? 뭐든 골라먹을 수 있게 하란 말야.”
“아아….”

지켜보는 르엘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그럼에도 래시를 막을  없었다.
르엘에게 시청자는 절대적이었다.
그들이 주는 걸 거절할 수 없으며, 먹으라고 준  안 먹고 버리는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르엘, 배고프지 않아? 한 번 부탁해 봐.”


르엘의 눈동자에 망설임이 가득했지만,


“빨리, 부탁해 봐.”

래시가 같은 말을  번 하게 하는 것은 야추단에게 있어 금기.
래시의 방송을 본 적이 있는 르엘은 완전히 세뇌당하지 않았음에도,  금기를 어기는 것은 안 된다는  잘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에게 있어 흑견은 위대한 방송인이자,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야추단 여러분… 배가 고파요….”


그녀의 맥 없는 목소리가 방송을 타기가 무섭게, 개설해 둔 오픈톡방의 알림이 미친 듯이  안을 가득 울렸다.


— 마톡!
— 마톡!
— 마톡!
— 마톡!
— 마톡!
— 마톡!
 마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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