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스트레스 반응 척도
밤섬에서 벌어지는 사투 제 3라운드.
“허억… 허억….”
이번에도 부활과 동시에 쇠낫이 날아들 것을 예상한 신하준은, 즉시 몸을 틀었다.
시작부터 아예 거리를 벌리면 첫 공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바보—.”
“?”
그러나 아르투스는 그런 신하준의 예측에 한 수 더 앞서 있었다.
신하준이 피할 방향을 예상한 아르투스는 이미 그쪽으로 낫을 휘두른 뒤였다.
“그럴—. 줄—. 알았어—. 허접한—. 인간—.”
푸슛.
또다시 신하준의 머리가 잘려 하늘을 날았다.
#138
라우딕은 살면서 단 한번도 정신과 상담을 받아본 적이 없다.
오만한 인간에겐 상담받는 시간도 사치다. 자기만을 믿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치를 부려야 한다.
머릿속에 흑견이 남긴 사념이 이틀째 떠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계속 환청이 들린다 이 말씀이시죠?”
“아뇨, 환청이 아니라. 아…. 머리속에, 계속 누군가의 생각이 들린다고요.”
동그란 뿔테안경을 낀 상담사가 한숨을 쉬며 안경을 까딱였다.
VE Bang 이후 정신질환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 그녀의 수입은 펄쩍 뛰었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규명되지도 않은 증상을 나불거리며 가짜 진단서를 떼려고 하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녀의 눈 앞에서 하소연하고 있는 이 남자 역시 그랬다.
‘멀쩡해 보이는데다… 델타급 히어로라는데….’
겉은 멀쩡하게 생겼는데, 아까부터 온통 이상한 소리만 지껄이고 있다.
정신병 중에서 머릿속에서 계속 같은 단어만 맴돈다는 병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차라리 초자연적 현상에 몰두해 그것이 현실화된 것 같다며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또다른 자아가 있는 것 같다면 모르겠다. 그건 조현병 증세와도 유사하니.
“계속, 저를 병신이라고 그런다니까요? 지금도 그래요. 병신, 병신, 병신, 병신….”
그래도 일단 여기까지 온 데다가 저런 과도한 집념을 보이는 환자는, 상담사 선에서 붙잡을 수 없다.
일단은 의사선생님께 보내야 한다. 그래서 정확한 진단을 내려주시길 바라는 수밖에.
워낙 비슷한 가짜 환자가 많았던 관계로, 전문의도 이해는 할 것이다.
“일단, 여기 상담설문지 쭉 작성해주시겠어요? 작성하시고, 조금 기다려주세요.”
상담사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상담지와 펜을 남기고 몸을 일으켰다.
옆 방에 계신 전문의에게 증상을 대충 이야기해주고, 환자를 보내야 하니 말이다.
그렇게 그녀가 사라진 상담실 안.
라우딕의 머릿속에서 점점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 바보냐? 너 바보야? 야, 이 겁쟁아.
“… 시끄러.”
그는 골을 울리는 목소리를 계속 무시하며, 꽉 쥔 펜을 느릿느릿 종이 위에서 움직였다.
정신과 상담 시에 자주 쓰이는 스트레스 반응 척도 설문지였다.
라우딕은 우측 상단에 적당히 자신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적고, 1번 문항으로 넘어갔다.
— 1. 일에 실수가 많다
전혀 그렇지 않다부터 아주 그렇다까지 총 다섯단계 중 하나를 고르는, 직관적이고도 간단한 테스트.
라우딕은 첫 번째 질문의 동그라미를 ‘전혀 그렇지 않다’ 밑에 그려넣었다.
— 2. 말하기 싫다.
도대체 이런 질문에 답을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전혀 그렇지 않다’ 밑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는데, 상담실 불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 3. 가슴이 답답하다.
이건 라우딕을 조금 고민하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그는 잠깐 팬 끄트머리를 물고 흠 하고 신음하다가, ‘약간 그렇다’에 체크했다.
— 4. 화가 난다.
이건 무조건 ‘아주 그렇다’다.
— 5. 안절부절 못하냐? ㅋ
이번에도 ‘아주 그렇다’에 동그라미가 그려진다.
— 6. 소화는 되고? ㅎ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지만, 라우딕의 손이 이리저리 움직이다 ‘웬만큼 그렇다’를 선택했다.
— 7. 배아프지?
그럴 리가. 배가 아플 리가 없다. 라우딕은 ‘전혀 그렇지 않다’를 선택했다.
— 8. 소리질러~
“으아아악!”
자연스럽게 소리를 지르고 난 뒤, 그가 깜짝 놀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라우딕은 저도 모르게 문항에 적힌 대로 행동하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의식하기보다는 문항 체크에 집중했다.
‘아주 그렇다’. 동그라미가 그려진 뒤 방 안이 조금 더 어두워진다.
— 9. 한숨이 절로 나오지? ㅋㅋ 그치?
잘 모르겠다. 라우딕의 손이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간신히 ‘약간 그렇다’를 선택했다.
— 10. 헐, 어지럽지는 않아?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났다. 라우딕은 간신히 양 팔에 힘을 주고는, 간신히 책상에 기대서 상체의 자세를 잡았다.
다행히 몸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힘겹게 ‘아주 그렇다’에 체크했다.
— 11. 만사가 귀찮아보이는데, 그냥 이만 돌아가지?
“… 그럴까….”
라우딕은 이제 누구와 대화하고있는 줄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그의 펜은 체크 박스를 지나쳤다. 상담실의 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 12. 아직 집념을 못 버렸네. 그만 하고 포기해, 돌아가 어서.
“안돼. 안돼. 안돼.”
라우딕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고개를 가로젓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숨이 가빠지고,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뭔가가 목을 조이는 기분이 든다. 손목이 굳어 간다.
— ¶3. 피곤Ψ지지□않㉵? 잠25는■것 같ж 않아?
이제는 글자마저 깨져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하지만 목소리는 들린다.
그렇구나. 글자가 아니라, 사념이었던 건가.
라우딕의 머리가 무거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잠이 오기 시작했다.
— 1死. 온㎕몸è 힘이 쭉ð빠지Ċ 기분≪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몸에 힘이 쭉 빠지기 시작했다.
분명 책상을 기대고 있던 양 팔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몸이 푸딩같아지고 있다. 미끄덩거리면서 양 팔이 책상에서 밀려나 바닥을 향해 호선을 그렸다.
끼익, 와당탕. 하늘을 난 펜이 핑그르르 돌아 젤리가 되어버린 라우딕의 몸에 퓩 하고 꽂혔다.
— ■□. ■%=■■Δ■街■■■㏄碼β■■
마지막으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들으며, 라우딕은 정신을 잃었다.
몸이 이상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인간의 형태가 아니라 점점 구형으로 반죽되는듯한 찐득하고 말캉한 기분. 그렇게 돌돌 말리다 문득 사라져가는 의식 속에, 갑자기 늘어난 팔과 다리가 느껴진다.
파르륵, 파르륵거리는. 이상한 촉감.
뒤늦게 깨달았지만, 라우딕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픽 하고 꺼져버리는 전등.
상담실 안에 곧 새카만 어둠이 감돌고, 그 속에서 음흉한 웃음소리와 함께 붉은 눈빛이 팟 하고 나타났다.
#139
래시가 집에 돌아온 건,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난 뒤였다.
맨몸으로 온 건 아니었고, 손에는 이상한 해파리 하나를 들고 왔다.
“어… 그게 뭐야 래시?”
미소녀가 되어버린 김보람이 지레 겁을 먹고는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봐도 수상한 생물이었다.
해파리처럼 생기긴 했지만 색은 거무튀튀하고.
속눈썹처럼 생긴 이상한 털 같은 것이 동그란 갓에 잔뜩 나 있었다.
홈인지, 아니면 줄무늬인지 모를 무늬가 털 아래에 아로새겨져 있고, 다리는 몇 개인지 셀 수도 없었다. 최소 50개는 넘었다.
시커멓고 이상한 해파리.
래시는 그걸 이렇게 불렀다.
“전송기야 전송기.”
“… 전송기?”
“그래.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갈 수 있지.”
래시는 이제 전처럼 힘들게 뛰어다닐 필요 없다며 깔깔 웃었다.
“왜, 한번 시험해 볼래?”
“어… 궁금하긴 해!”
해파리는 무섭게 생겼지만, 그래도 공간이동이 가능한 물건이라니.
김보람은 호기심이 동해 저도 모르게 래시의 제안을 수락해버렸다.
“자, 얘 머리를 만지면서 가고싶은 곳을 말 해봐.”
“… 어어… 내가 해야 해?”
불쌍한 표정으로 기겁하는 김보람.
그도 그럴 것이 찐득하고 녹진한 액체가 번들한 해파리 대가리를 만지고 싶어할 미소녀가 어디 있겠는가.
김보람은 지금 완벽하고 귀여운 미소녀이니, 겁이 나는 건 당연했다.
“빨리. 어디에 가고 싶어?”
“으아아…. 바, 바다….”
세 번의 거절은 없다는 걸 알기에, 김보람은 질끈 눈을 감고 해파리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찐득한 느낌이 그녀의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몸을 파르르 떠는 동안, 찍, 하고 차원이 찢어졌다.
래시는 눈을 감은 김보람의 손목을 붙잡고 천천히 차원의 틈새를 비집고 지나가, 반대쪽 차원을 열어 나왔다.
형용하기 어려운, 마치 우주 속과도 같은 짧은 공간의 통로를 지나 마주한 것은, 넓은 바다 한 가운데였다.
훅 하고 꺼지는 바닥.
김보람은 곧장 바다로 빠졌다.
“푸헉! 아 차거! 으악!”
그 사이 래시는 촉수의 힘으로 물 위에 살포시 떠올랐다.
김보람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닷물에 깜짝 놀라 정신없이 팔다리를 휘적거렸다.
“어푸, 나! 나, 헤엄 못 캑!”
“….”
최소 헤엄은 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헤엄도 못 치다니.
래시는 픽 하고 한숨을 쉬고는 그녀의 미간에 있는 버튼을 눌러 그녀를 아예 빌런화시켜버렸다.
그와 동시에 촉수를 써서 그녀를 꾹 하고 물 속으로 집어넣는 래시.
당황한 김보람이 마구 허우적댔다.
“꼬르르르릅!”
“괜찮아. 숨 쉬어 봐.”
“… 커흡. 컥. 어… 어라?”
물 속인데 숨이 쉬어졌다. 기이한 일이었다.
“왜 숨이 쉬어지지?”
인간은 물 속에서 숨을 쉴 수 없다. 히어로들 중에서도 관련한 이능을 가진 자들만이 물 속에서 호흡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그런데 지금 김보람도 숨을 쉴 수 있다. 영문도 모른 채로 말이다.
“헬런이라서?”
“… 그게 말이 돼?”
“안 될 건 또 뭐야.”
래시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아는 게 맞긴 한데, 이번에는 김보람도 궁금했다.
“자세히 알려줘. 조금 궁금해서.”
“별 거 없지.”
인간의 뇌는 산소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피는 그 산소를 운반해주는 중요한 운반책이며, 폐는 산소를 받는 없어선 안될 장기이다.
그래서 인간은 물 속에서 호흡할 수 없다. 폐는 아가미가 아니니 물 속에 들어가면 산소교환이 불가능해지고, 그대로 시간이 흐르면 혈관 속의 산소 농도가 떨어져 죽음에 이른다.
하지만 빌런은 다르다.
모든 빌런의 몸은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고, 그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핵의 파괴유무.
당연히 멈춰버린 호흡 따위가 그들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김보람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그렇지, 이야기해 줄 필요가 없었다.
래시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냥 그런 줄 알아 이 멍청아.”
“어… 엥?”
래시의 손바닥이 슝 하고 날아와 김보람의 뒤통수를 세게 때렸다.
“악.”
“내 손 붙잡아.”
“… 응?”
“빨리. 가 봐야 할 곳이 있으니까.”
김보람이 무심결에 내밀어진 손을 붙잡은 순간, 래시의 촉수 끝이 말랑한 노처럼 변했다. 길고 넙적해진 촉수가 한 번 동그란 모양으로 물을 젓자, 래시의 몸이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구르르르악.”
“입 다물어 멍청아.”
“개로로록.”
그러나 잠영 속도가 너무 빨라서인지, 김보람은 좀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의 입으로 물이 들어갔다가 나왔다를 반복하길 한참.
두 사람은 마침내 바다 아주 깊숙한 곳에 도달했다.
마침내 입을 다물 수 있게 된 김보람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빌런이 아니었다면 볼 수 없는 심해 어두운 곳의 경치는, 그야말로 꿈을 꾸는 듯한 아득한 공간이었다.
“이게 다 뭐야 도대체…?”
김보람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수많은 녹슨 쇠 구조물들이 눈에 띈다.
부서지고, 깨지고, 찢어진 쇠판들이 물 속에 잔뜩 쌓여 있다.
일부는 그나마 형체가 멀쩡해인지 이리저리 쌓여 있는데, 그 모습이 흡사 고철로 만든 거대한 성 같았다.
“뭐긴 뭐야. 우주를 정복하고 싶었던 인간의 꿈이 만들어낸 심해의 고철성이지. 이제는… 새로 주인이 생겼지만.”
“…엥? 주인이 있다고?”
“가 보면 알아.”
래시는 다시 김보람의 손목을 붙잡았고, 아까보다 느릿한 속도로 잠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