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모른 척 해줘
에이리스에게 연락이 온 건, 매니저빵 방송을 한 지 사흘 만이었다.
래시는 그날도 르엘의 방 침대 위에서 그녀가 방송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 공순이 ]
— 래시 님
— 영웅 협회의 정비를 마쳤습니다
— 다음 행보를 결정해 주시겠습니까?
영웅 협회의 재정비가 완료되었다.
달리 말하면, 이제 래시 테퍼론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뜻이 된다.
래시는 흐뭇한 표정으로 르엘의 집을 빠져나가 옥상 위에 섰다.
전에 차원을 찢고 도망다니던 바보 하나를 위협할 때 쪼그려 앉았던 위치와 같은 곳이었다.
그녀의 손이 팔찌 위를 가볍게 쓸더니, 즉시 공순이에게 전화가 연결되었다.
“나야, 에이리스.”
[전화 받았습니다. 래시 님.]
“일단, 남은 입실론 급의 리더는 누구지?”
[… 일단은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리브라는 감시역을 자처했습니다.]
리브라. 절대 정의를 추구하는 정의의 여신 같은 여자.
그녀는 에이리스가 추구하는 ‘대의’는 따르겠지만, 래시가 그 이면에 어떤 꿍꿍이를 숨기고있는지 모르니 조심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물론 래시에게 그닥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그리고, 레오는 사성회를 이탈했습니다. 의견 합치를 이루지 못해 죄송합니다.]
늙은 사자가 떨어져나갈 거라는 건 래시도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가 항상 날선 시선으로 래시를 바라보고 있었음을 래시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세 명이면 충분하지.”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날 조짐이 보인다.
덕분에 차원의 틈에 보내둔 아디스도, 이틀이면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
“이틀 뒤, 포인트 니모로 와. 나는 먼저 가 있을 테니 그리 알고.”
[알겠습니다. 저희가 모시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내가 언제 너희들에게 의전을 부탁한 적이 있어?”
[… 아닙니다. 방금 말은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간결한 인사를 끝으로 종료된 통화.
래시는 팔찌를 가볍게 털어 홀로그램을 꺼트린 뒤 래시 컴퍼니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사장님. 말씀하세요.]
팔찌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래시 컴퍼니에서 래시 다음으로 강한 의사결정권을 가진 최고참 전무였다.
“‘에볼루션’ 승인은 언제 나지?”
[식약청에서 하루 이틀이면 승인이 난다고 어제 답변받았습니다.]
“오늘 혹은 내일이네.”
[그렇습니다.]
에볼루션은 래시가 제조한 동전파스의 새로운 이름이다.
시중에 팔 건데 동전파스라고 팔아먹기엔 좀 그렇다고 임원진들이 의견을 내서 그렇게 상호를 바꾸었다.
“판매 개시 되면, 책임지고 서울 국민들에게 모두 배부되는지 체크해. 어차피 식약청에서 관리하겠지만, 크로스 체크 하고.”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거 말곤… 없어. 이번 주는 좀 바쁠 예정이라, 김 전무가 사장결재건 대리결재 좀 해줘.”
[네? 제가요? 어딜 가시—]
래시는 이제 회사 일에는 관심 없다는 듯 통화를 끊어 버렸다.
에볼루션이 사람들에게 뿌려진 다음의 래시 컴퍼니?
나머지 임원들이 제멋대로 굴려도 아무 상관 없다.
그야 래시가 원했던 것은, 처음부터 자신의 발명품을 전 인류에게 퍼트리는 것 뿐이었으니 말이다.
#160
악한 존재를 사냥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용사.
그리고 과연 악한 존재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를 고대의 존재.
둘의 15차전이 벌어진 곳은 서울 남서쪽으로 한참을 내려가면 나오는 시화호 근처였다.
싸움이 이어지면 이어질 수록, 두 사람은 남쪽에 가까워졌다.
아르투스가 계속해서 남쪽을 향해 도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 이제 힘이 좀 딸리나보지?”
“으윽—.”
싸움 양상은 갈수록 이상해졌다.
신하준의 성장 가속도는 이전의 죽음 때보다 더 가팔라졌다.
단차함수 그래프처럼 천천히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지수함수 그래프처럼 미친 듯 솟구치는 모양새였다.
14회차 때만 해도 간신히 아르투스의 공격을 피하며 간신히 검기 몇 개 날리던 신하준이었으나, 15회차의 그는 전혀 달랐다.
아르투스의 사슬낫이 날아들 방향과 지팡이 끝이 공기를 터트리거나 강하게 주변 공기를 빨아들이는 방향. 신하준은 그 모든 것을 예측하며 몸을 내던지고, 그 사이사이에 클라우 솔라스를 휘둘러 아르투스를 향해 검기를 쏟아냈다.
신하준의 공격 기회가 늘어날 수록 아르투스의 행동 반경이 줄어들고, 아르투스가 압도적으로 공격을 쏟아내며 그를 몰아붙일 기회도 줄어들었다.
자연스럽게 궁지에 몰리는 쪽은 아르투스가 되었다.
심지어 신하준의 발걸음은, ‘가벼운 발걸음(A)’의 수준을 뛰어넘은 것처럼 보였다. 흡사 레오가 쓰는, 허공답보와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빈틈을 노린 신하준은 순식간에 아르투스에게 접근해왔고, 그의 목을 노렸다.
서걱 하고 허공을 가르는 클라우 솔라스.
검의 잔광이 파밧 하고 사방으로 튀었다.
“악—.”
아르투스는 간신히 목이 베이는 것까진 피했지만, 피하는 과정에서 다시 왼팔이 날아갔다.
“이제 끝이다. 이번엔 도망 못 갈 거야!!”
“잠깐—! 잠깐—!!”
아르투스는 목숨을 구걸해 볼 요량으로 소리쳤지만, 안타깝게도 신하준은 그걸 들어줄 정도로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여동생 이야기로 사람들의 측은지심을 사긴 했지만,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있었다는 걸 제외하면 그는 결과적으로 사람 죽이는 데 개의치 않는 인성 파탄자는 맞았으니까.
그런데 자신을 죽이러 온 괴물? 도플갱어?
살려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히익—!”
아르투스는 제 몸이 터질 것도 각오한 채 지팡이를 사방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변을 가득 채우는 격풍.
보이지 않는 바람 블랙홀 열두 개가 아르투스의 몸 주변을 완벽히 둘러 버렸다.
“히히—! 여긴 못 들어와—!”
아르투스는 그 틈을 노려 떨어진 왼팔을 다시 주워 몸에 쑤셔 넣었다.
그가 예상한 대로, 신하준은 블랙홀 가까이까지는 접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접근할 수 없을 뿐이지, 그렇다고 공격을 못하는 건 아니었다.
“… 너, 병신이냐?”
신하준은 그 말이 끝난 직후 검을 하늘로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키 절반 만했던 빛의 검날이 갑자기 쭈욱 하고 하늘로 치솟았다.
그 크기는 흡사 입실론급 네메시스의 키와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
아르투스는 다소 놀랐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침착하게 지팡이 끝을 신하준이 서 있는 곳에 맞추고 지팡이 중간의 구형 장식의 크기를 키웠다.
차분하게, 순서대로 대응하면 된다.
신하준의 몸을 터트리고. 주변에 소환한 회오리를 제거한 다음, 떨어지는 검을 피하면 된다.
간단하지 않은가?
그의 생각대로 행동이 이루어졌다.
핏 하고 쏘아진 공기가 펑 하고 터진다.
신하준의 몸은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아르투스의 머리를 향해 빠르게 빛의 검이 낙하한다.
이어서 지팡이에 달린 구체의 크기가 작아지고, 지팡이 끝이 아르투스를 감싼 회오리 세 개를 빠르게 팟, 팟, 팟, 꺼 버렸다.
그가 다리로 힘차게 도약해 충격 범위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빛의 검이 콰르릉 하고 그가 서 있던 주변을 집어삼켰다.
파슷 하고 빛이 꺼진 뒤 보니, 검의 낙하지점에는 깔끔하게 잘려나간 거대한 상처가 하나 남았다.
“위험했어—.”
정말로 위험했다.
조금만 더 방심했거나, 조금만 더 실수했다면.
아르투스는 분명 화신체를 잃고 성간우주로 되돌아가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선 곤란하다.
대사제가 깨어나는 것을 기다렸다 그의 머리통을 터트려야 하는데.
화신체를 잃는 순간 누군가 광기의 희곡을 노래해주어야만 다시 지구에 화신체를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짜증나—.”
하지만 신하준이 가진 능력은 너무 사기적이다.
무한히 부활하는데, 그걸로도 모자라 죽을 때마다 강해져서 돌아온다.
아르투스의 화신체가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정해져 있는 이상, 그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역시—. 봉인—. 해야해—.”
예로부터 죽일 수 없기에 봉인하는 존재들은 항상 존재했다.
일단 봉인해 놓으면 당장은 세계를 지킬 수 있었다. 후세에 결계가 깨지든 말든, 그 세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고대의 존재라고 다를 건 없었다.
그들을 귀찮게 하는 선신의 꼭두각시를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에 가두는 것 쯤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책략 중 하나였다.
전력을 개방하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이 행성이 통째로 날아가고 말 것이다. 그래선 대사제의 부활이 또 늦춰지고, 아르투스는 대사제의 머리통을 날릴 수 없게 된다.
그래선 곤란하지.
아르투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빠르게 발을 놀려 더욱 남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적당한 힘을 끌어내 신하준과 싸우려면 미리 정비를 해야 한다.
#161
“놓쳤어.”
2주 만에 돌아온 신하준의 모습은 초췌하기 짝이 없었다.
계속 부활하긴 해도, 옷까지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무려 2주 정도를 나체로 싸웠기 때문인지 부끄러움도 사라진 듯, 신하준은 당당히 하체를 드러내며 래시 앞으로 다가갔다.
래시는 덜렁거리는 뭔가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방 구석에 있던 상자를 하나 열었다.
그 곳에는 김가람으로부터 압수한 남자 옷이 잔뜩 들어 있었다.
래시의 촉수가 아무 옷이나 집히는 대로 신하준에게 마구 집어던졌다.
“옷부터 입어. 어디로 갔는데?”
“발자국으로 보아 남쪽.”
“아하.”
남쪽이라면 래시도 짐작가는 것이 있었다.
“12인회의 예언자.”
래시가 대충 운을 띄우자,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입으며 신하준이 말을 이었다.
“… 아쿠아리스?”
“그래. 그 여자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이 정보를 얻어다 준 것은 나디스였다.
그녀는 영웅 협회, 그 중에서도 사성회에게만 허락된 비밀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해 래시에게 건네주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래시가 사성회를 장악해버린 탓에 해킹이 의미가 없어져버렸지만 말이다.
“… 글쎄. 그런 건 들어본 적이 없는데.”
래시는 의자를 빙글 돌려 인터넷 창을 켜더니, 어딘가의 좌표를 찍어 신하준에게 보여주었다.
트렁크팬티 하나. 헐렁한 추리닝 바지 하나. 그리고 무지 티셔츠를 하나 걸친 신하준이 머리를 정리하며 모니터 옆으로 다가왔다.
신하준의 눈에 보이는 것은, 태어나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어떤 산의 모습이었다.
“대한민국 남단. 제주도의 정상. 백록담.”
“… 이런 곳이 있어?”
VE 뱅 이후 태어난 사람들의 대부분이 서울 외의 지역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알고 싶어도 갈 수가 없으니 당연했다.
“있어. 찾아갈 줄은 알지?”
“찾아가는 거야… 히어로 팔찌의 좌표계를 쓰면 되니까.”
“걸어서는 못 가. 비행정을 타고 가야 할 걸.”
“… 그래?”
신하준이 이해하지 못하는 게 눈에 보이자, 래시는 지도의 배율을 축소해 한국 지도 전체를 보여주었다.
그제서야 신하준은 제주도의 위치가 어딘지 깨달았는지 깜짝 놀랐다.
“저기까지 도망을 쳤단 말이야…? 그런데 넌 그걸 어떻게 아는 거야?”
“모른척 해줄래?”
평소 같았으면 눈치 없이 래시의 말에 토를 달았겠지만, 그녀와 어울린 지도 벌써 한 달.
신하준은 그제서야 래시의 패턴을 조금은 파악했다.
“… 알겠어. 하지만 위험한 놈은 확실해. 없애 두는 게 좋겠어.”
“맞아. 정말 위험한 녀석이야.”
그리고 그 순간, 오랜만에 호감도 수치가 바뀌는 소리가, 띠르륵, 하고 주변을 울렸다.
[진 히로인(30)]
순식간에 +20. 화들짝 놀란 신하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뭘 했다고 호감도가 20이나 오른단 말인가? 하고 고민하던 그가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 토 달지 않고 하라는 대로 하면… 호감도가 올라?’
참으로 골 때리는 조건이 아닌가.
용사의 면모를 보이는 것보다, 래시의 말을 잘 듣는 것이 호감도가 더 많이 오르다니.
하지만 눈에 보이는 수치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신하준은 짧은 한숨을 내쉰 뒤, 옷가지 몇 개를 더 챙겼다.
“… 이번엔. 반드시 없애고 돌아올게.”
“고생해.”
사실 그는 무려 2주나 이어진 싸움으로 인해 ‘어째서 아르투스와 싸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래시에게 하고 싶었다.
래시가 싸움을 붙였고, 딱 봐도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었기에 대뜸 전투를 시작하긴 했는데….
죽고 나서 24시간동안 다음 전투를 준비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왜? 도대체 왜 싸우고 있는 거지? 하고.
하지만 알게 뭔가.
메인 히로인께서 그리 하시라는데.
그리고 그녀의 말을 따르면 호감도가 오른다.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확률이 오르고 있기에.
인성 나쁜 용사는 뭣도 모르고 아르투스를 없애기 위해 다시 먼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