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꽃길만 걷게 해줄게요
산 정상이었지만, 호수의 수위가 낮아져 비행정이 착륙할 공간은 충분했다.
우우웅 하는 마정석 엔진의 공명음과 함께 거센 돌풍을 일으키며 착지하는 신하준의 개인 비행정.
착륙이 끝나자마자 성미 급한 용사가 빠르게 튀어나왔다.
“어딨냐!”
전투는 빠를수록 좋고, 죽음은 빠를수록 좋다.
그만큼 신하준은 상대의 전략을 습득해 더 빠르게 성장할 테니. 이야기가 끝나기 전까지 무한히 되살아나는 신하준은 무적이다.
“어디 있냐고!”
희한하게도, 백록담 정상의 보이드 미스트는 꽤 옅은 편이었다.
당장 서울 주변만 해도 보이드 미스트는 1m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게 지상까지 내려와 있다. 그러나 지금은 호수 전체가 보일 정도로 보이드 미스트 구름의 높이가 높았다.
신하준은 저만치 보이는 호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차갑고, 약간은 답답한 공기가 불쾌하게 그의 숨을 타고 들어왔다.
이끼 냄새, 그리고 풀 냄새.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가스 냄새까지.
백록담에 살면서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신하준이었지만, 그런데도 그는 본능적으로 이곳에 수상한 뭔가가 있음을 눈치챘다.
그건 적어도 최근 며칠간 매일 검을 맞댔던 그의 도플갱어는 아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온 그가 천천히 호숫가에 멈춰 섰다. 호숫물은 맑고 투명하여 속이 훤히 비쳤다. VE에 완전히 오염되어 검은색을 띠는 한강과는 전혀 다른 색이었다.
신하준은 신묘한 기분을 느끼며 물에 손을 집어넣어 슬쩍 떠올려 봤다.
아주 차가웠다.
“…. 어디로 도망친 거야.”
래시가 말한 것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분명 이곳에 기분 나쁜 도플갱어가 존재해야만 한다.
물속에 숨어 있나? 신하준은 자박거리며 물속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가, 몸이 반쯤 잠겼을 때 머리를 처박았다.
콱. 뽀그르르.
눈을 뜨니 맑은 물속 호수의 바닥이 보인다.
하지만 생각보다 물이 깊어 저만치 안쪽은 어두컴컴했다. 깊은 곳을 확인하려면 숨을 참고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신하준이 물속으로 한 걸음 더 내딛으려던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한 늙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열강(灼熱罡).”
아니, 정확히는 그 늙은이의 목소리에 들어 본 적 없는 여성의 목소리가 뒤섞인 것 같은 괴이한 소리였다.
“발도(拔刀).”
신하준은 뒤늦게 용사의 진언으로 그의 행동을 멈춰보려 했지만, 현경에 달한 검사의 검이 칼집을 떠나는 속도를 따라잡는 것은 무리였다.
제 나름대로 수련을 거쳐 단련했다곤 하나, 같은 무기를 다루는 상대 앞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서투른 무공은 애들 장난일 뿐이었기에.
#170
공포게임은 계속 진행된다.
옆에서 비명을 지르며 바들바들 떠는 사람이 있건 말건.
그러다가 살려달라며 촉수를 물어뜯는 사람이 있건 말건.
“괘, 괜찮은 거지?”
“괜찮아. 계속해.”
“으오오오오오오오!”
[르엘-Live/567명]
— 엘눈나 스윗함 뭐야…
— 지금까지 이정도의 스윗함은 없었다
— 덜렁이 챙겨주는 유일한 사람…
김보람은 한계 이상의 공포에 노출되어 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건지, 아까부터 촉수 하나를 자르지 않은 김밥마냥 계속 입에 물고 있었다. 그러나 이 김밥은 김이 워낙 질겨서 씹히질 않는다.
래시는 정신이 나가버린 김보람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으며, 이제 거의 끝에 다다른 르엘의 게임 플레이를 구경했다.
정수리에 래시의 손이 닿을 때마다 김보람의 머리가 홱홱 돌아가며 그녀의 손을 물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거의 끝나 가는 것 같은데… 이거 미연시가 아녔나 봐요.”
순수한 르엘은 그제야 자신이 공포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 덜렁이가 눈나 속였어
— 맞아 혼내주자
— 르밀친들 다같이 속였던 주제에 이제와서 덜렁이만 나쁜사람 만드는거 실화냐 ㅋㅋ
— 억울하면 르밀친 해야지 ㅋㅋ
— ㄹㅇㅋㅋ
시청자들의 반응이 뜨겁다.
래시는 김보람에게 고개를 돌려 그녀의 눈동자 속을 확인했다.
공포, 공포, 그리고 공포.
눈동자 속 감정이 온통 공포의 색으로 가득하다. 해소하려면 아마 아까처럼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바들바들 떨어야만 할 테지.
하지만 래시는 김보람이 제멋대로 엉덩이를 까 대며 방송을 터트리는 걸 그냥 둘 수는 없었다. 하필이면 입어도 T팬티. 미소녀라는 사실을 주입하긴 했지만 이런 디테일함을 주입한 적은 없었다.
바로 옆에서 바보 하나가 혼돈 에너지를 마구 뿜어내주는 덕에 래시의 머리가 느릿하게 맑아졌다. 가득 찬 상념이 걷히며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래시 속 평범한 남자의 사고회로.
촉수 안에 감겨 있는 인공 미소녀의 부드러운 촉감이 그제야 래시에게 전해져왔다.
“….”
래시는 불쾌한 표정을 짓더니 김보람의 몸을 동여맨 촉수를 모두 풀어버렸다.
자유를 얻은 김보람이 팔짝 뛰어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이번엔 이불 속에 머리를 처박고, 엉덩이는 침대 머리맡으로 향한지라 다행히 방송엔 영향이 없다.
“괜찮은 거 맞지?”
여전히 김보람의 정신상태를 걱정하는 르엘.
래시는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앉았다.
“신경 쓰지 마. 쟤는 걱정할 필요 없어.”
“그래도… 자기 방송만 해도 될 텐데 굳이 자처해서 매니저까지 해주는 애를 어떻게 그냥 방치해.”
상냥한 마음씨를 가졌기에, 게임 끄고 자기 전까지 이어지는 라디오 방송이 그렇게 인기가 많았던가.
래시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르엘과의 과거를 회상하며 살갑게 웃었다.
“그것보다 슬슬 마무리하고, 소통 시간 가져야지?”
“아 응. 여러분 이거 거의 다 끝났나요?”
— ㅇㅇ 거의 다 끝났어
— 이제 마무리
— 진엔딩은 보려면 이벤트 공략 다 해야해서 그건 너무 오래 걸림
— 여까지 하고 라디오 ㄱㄱ
르엘은 뭔가 아쉽다고 생각했는지, 우물쭈물하다가 다시 물었다.
“그… 제가 공포게임 하는데 하나도 안 놀라서 조금 아쉽지 않으셨나요? 역시 저는… 게임엔 안 맞는 체질이 아닐지….”
이제는 귀여운 해파리가 되어버린 천사님이 남긴 가스라이팅의 흔적.
래시가 불쾌한 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러나 아이스펀치의 방송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르엘의 방송이기에 볼 수 있는 상냥한 이야기들이 와르르 몰려나와 채팅창을 가득 채웠다.
— 상관 ㄴㄴ
— 덜렁이가 옆에서 대신해줬으니 괜춘 ㅋㅋ
— ㄹㅇㅋㅋ
— 둘이 조합 괜찮은 거 같은데? ㅋㅋ
— 순수한 둔감미소녀랑, 개지랄하는 인공미소녀
— 케미 뭐야…
— 그냥 둘이 계속 같이 방송해!!
…
예상치 못한 감동적인 메시지의 향연.
멍하니 올라오는 채팅을 쭉 읽고 있던 르엘은 감정이 복받친 듯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간 느껴볼 수 없었던 환대였다. 그녀의 가슴이 미어졌다.
천사님에 의해 통제되던, 그녀의 행동에 걸린 제약의 사슬들이 하나하나 쩡, 쩡, 소리를 내며 부서지기 시작했다.
‘합방하지 마. 아직 제 방송도 제대로 못 굴리는 주제에 무슨 합방이야. 정신 안 차려?’
‘야방 하지 마. 너 따위를 알아봐 줄 사람도 없는데 혼잣말하는 찐따처럼 보이고 싶어? 네가 예쁜 줄 알아?
불쑥 다가온 래시라는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천사님을 걷어차고 르엘을 끌어안았다. 천사님이 도네로 르엘의 가슴에 쾅 하고 박아놓았던 글자들이 바스러진다.
‘먹방 하지 마. 먹는 모습이 예쁘질 않아서 별로야. 외식 안 해 봤어? 왜 이렇게 먹는 태가 나빠?’
르엘의 집에 쳐들어온 래시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프티콘을 보내주었다. 천사님이 했던 말은 어느새 먼지가 되어 사라진 지 오래다.
‘게임 하지 마. 너는 게임 해도 반응이 별로라 재미없어.’
함께 방송하며 매니저로서 도움을 주는 소중한 친구. 김보람이 옆에서 르엘 대신 재미와 텐션을 보장해주고 있다. 이제 르엘은 천사님이란 사람이 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게 되었다.
… 그렇지만 르엘은 시청자들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그… 미안해요 여러분. 제가 게임 잡으면 몰두해서 엄청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다 보니까. 해설이고 뭐고… 그냥 게임만 한 것 같네요.”
르밀친과 함께 하는 시간이지만 방송인 주제에 제대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 그리고 그걸 방송 다 끝나가는 지금에 와서야 깨달은 것.
시청자들을 진정한 친구이자, 불쌍한 자신과 놀아주는 상냥한 사람들이라 생각하는 르엘의 말이 마이크를 타고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에게 가 닿는다.
따뜻한 말은, 더 뜨거운 사랑이 되어 돌아왔다.
— 겜 잘해서 좋던데?
— ㅇㅇ 겜 잘해서 안 답답하고 좋더라
— 토크야 점점 챙기면 되는 거고, 뒤에 김보람 뒀다 뭐 할 거야
— ㄹㅇㅋㅋ 덜렁이 데려다 앉혔으면 써먹어야지
르엘은 아직 햇병아리다. 전반적인 방송에 대한 이해도도 떨어지고, 어떻게 해야 시청자들을 더 즐겁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상식도 부족하다.
그러나 그건 점차 발전시켜나가면 될 부분이다. 천사님에 의해 1년 가까이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소극적으로 된 그녀가 다시 날갯짓하도록, 주변에서 도와주면 될 일이다.
그러라고 보내 놓은 김보람이며, 그러라고 붙여 놓은 (전) 야추단들이 지금의 르밀친 아니겠는가.
— 일주일에 하나씩 연습하면 되지 뭐
— 그거 좋네
— 그럼 이번주는 게임하면서 리액션 하는 연습 하면 되겠네 ㅋㅋ
— 공포게임 릴레이 한 달 하기로 했으니까 딱인듯
— 쯔꾸르 공포겜 ㄱㄱ
— 눈나 목소리 좋아서 대사 다 읽으면서 해줘도 좋을듯
— ㄹㅇ루
수많은 말들이 르엘의 가슴을 덥히고,
[ 르엘의비밀친구 님이 후원했습니다! (100 D) ]
— 이대로 천천히 가자, 급하게 가다가 넘어지는 것보다 나음. 그리고 내가 라디오 방송 들어봐서 기억하는데, 목소리 좋으니까 멘트나 대사 읽을때 소극적으로 읽지 말고 편하게 읽어. 르밀친 1년차라 반박 안 받음 ㅅㄱ
팡파르 소리와 함께 거액의 후원금이 들어오기까지 했다.
래시를 만난 이후 가슴 설레는 일만이 가득한 요즘이다. 거기다 이렇게 무지성으로 쏟아지는 팬들의 사랑까지 받게 되니. 르엘은 결국 크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으아아아아앙….”
“… 왜 울어 갑자기.”
“그흐… 그치마하안… 다들 너무… 너무 고마워서허…. 흐으윽.”
대성통곡하는 르엘의 등을 살살 토닥여주던 래시.
르엘을 사랑한 남자였다면 껴안아 주고 말았을 테지만, 김보람이 밀어냈던 상념이 다시 몰려오면서 그녀의 입꼬리가 장난기로 물들었다.
“아이고… 분위기 좋은데 르엘이 다 망치네.”
매운맛 인방을 꽤 경험한 사람이라면 래시의 이 정도 장난은 우스운 수준이었다.
서로 까면서 텐션을 올리거나, 잔잔한 분위기로 접어들면서 텐션이 사그라드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종종 튀어나오는 분위기 전환용 돌발멘트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르엘은 이런 전개가 처음이었다.
“머… 머?! 내, 내가? 자, 잘못한 거야 나?”
이런 반응을 기다렸던 래시의 시선이 슬쩍 채팅창으로 향했다.
— 스트리머/래시/논란, 인성
— 이건 좀 나빴다 진짜
— 아 ㅋㅋㅋ 평소랑 똑같은데 이상하게 좀 그렇네 ㅋㅋㅋ
— 순한맛 방송에서 매운맛 멈춰!!
— 근데 솔직히 르엘 놀리는거 재밌어보임
— ㅇㅈ
반응이 슬슬 오기 시작한다.
래시가 여세를 몰아 한마디 더 했다.
“방송하다가 울면 벌칙 수행해야 해.”
“버… 벌칙…? 히끅.”
르엘도 참 대단한 게 그렇게 통곡하다가 잘못했다는 말 한 번에 뚝 하고 울음을 그쳤다.
천사님의 가스라이팅이 남긴 후유증인지도 몰랐다.
“응. 벌칙. 뭔지 알아?”
“뭐… 뭔데?”
“모르면, 직접 하면서 배워야 하지 않겠어? 이건 인방하는 사람들에겐 상식이나 마찬가지인데.”
— 근데 무슨 벌칙?
— 그런거 들어 본 적이 없는데 ㅋㅋ
— 아 ㅋㅋ 뭐든 상관없으니까 하라고 ㅋㅋ
래시가 말하는 상식이라는 게 존재할 리는 없었지만, 언제나 그랬듯 래시의 방송에서는 그녀가 말하는 것이 곧 상식이 되었다.
그리고 래시는 단순한 벌칙이 아닌, 르엘이 좀 더 유명해지는 데 도움이 될 벌칙을 이미 몇 개나 준비해둔 지 오래였다.
“뭐긴 뭐야. 내일 24시간 방송. 콜?”
“… 24시간?”
“24시간 사연 라디오 방송하자. 어때.”
“어… 안 자고 24시간을 어떻게 버텨?”
방송을 1년이나 했는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르엘을 보며 시청자들이 안타까움을 표했다. 순수한 건 맞지만, 그 말만으로도 그간 그녀가 정신적으로 얼마나 몰려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봐도 하필이면 김빙권 방송만 본 탓에, 인터넷방송의 기본 개념이 거의 없었다.
— 이게 다 김보람 잘못이다
— 솔직히 덜렁이는 너무 쉽게 떴음
— ㄹㅇ
— 지금이라도 고생하는 게 어디임 ㅋㅋ
제멋대로인 백치 소년의 제멋대로인 빌런 헌팅 방송.
지금은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김보람은 히어로 초창기에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가면서까지 빌런과 네메시스 사냥에 열을 올리던 열성 히어로였다.
대부분의 히어로가 현실에 안주하고 권태로운 삶을 살아가며 방송에도 그 느긋함을 드러내는 것과 달리. 김보람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히어로’가 가진 사명에 대해 쉽게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인간을 지키고자 하는, 서울을 지키고자 하는 그 열정이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지금의 아이스펀치라는 대형 스트리머가 탄생했다.
이제는 이불 속에 기어들어 가 엉덩이만 흔들어대고 있는 저 바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다.
“못할 게 어딨어. 24시간 사연 방송.”
“그렇지만 그 정도로 사연이 들어오긴 할까….”
그러나 르엘이 말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굳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 같았다.
“들었지, 르밀친. 르엘이 사연이 별로 없을까 봐 걱정스럽대. 방송 보는 사람들, 당장 인당 사연 하나씩 게시판에 적는다. 실시.”
그야 래시가 말하기만 하면, 그 무엇이 되었든 절대 막히는 일이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