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혈질 #
발을 딛고 있던 용암으로부터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용을 따라 걷던 난 순간 멈칫하며 생각했다. 용암 아래,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날 향해 헤엄치고 있어. 젠장!
위험하다고 판단하자마자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그러나 발아래에 묵직하고 거대한 존재는 내 뜀박질보다 훨씬 빨랐다.
"으아악-!"
콰르르~
다행히 간발의 차로 난 거대한 '아가리'에 삼켜지는 죽음의 순간을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기는 계속되었다.
저 용암에서 솟구친 알 수 없는 괴물이 멈추지 않고 날 죽이려 든 것이다.
"헬미!!"
인간은 적응의 동물 이랬지.
전이 이후 벌어진 사태가 겨우 '20년' 만에 진정된 건 확실히 인간이 적응을 잘해서다.
세상은 변했으니까. 불평해도 바뀔 리 없으니 사람들은 바뀐 세상에 맞추어갔다.
지구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일반화된 세계가 되었으니 특별할 것 없는 것이다.
내가 '용암 바다'에서 솟아오른 불꽃으로 이루어진 고래를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괴물'에 무서워하는 것보다 필사적으로 용에게 '살려달라' 외친 것도 바뀐 세상에 적응을 해서였다. 그리고 난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적응했다. '살려주세요!' 대신 '헬프 미'라고 외친 건 음절이 짦은 것도 있지만 '살려줘!'라고 반말을 했다가 변덕스러운 용이 날 그대로 용암 고래에게 잡아먹히게 놔둘 수 있다는, 아주 희박하지만 가능한 가정까지 계산한 것이었다.
불타는 고래의 입안을 바라봤다.
먹히기 직전, 발바닥이 놈의 열기로 후끈거려올 때 용은 '마법' 을 부려 날 구해냈다.
"끄악!"
다소 거친 방법으로.
용을 향해 마치 자석처럼 끌어당겨진 난 용암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새끼 샐러맨더와의 교감으로 용암은 따뜻할 뿐이었지만 '충격' 은 그대로 전해져왔다. 명치가 부딪혔는지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이런 망할 용...
끼이이이익~!
가슴을 부여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아주 찰나지만 용을 욕했던 날 원망했다.
아무리 저런 '존재' 라도 속마음은 읽진 못하겠지?
날 덮친 용암 고래는 용의 마법에 하늘을 날았다.
어마어마한 크기, 흰 수염 고래 정도 되는 덩치가 하늘을 날았고, 날았고, 계속해서 날아가 마침내 하늘의 별이 되었다.
"후아!"
그런 대단한 일을 벌였으면서 용은 마치 작은 짐을 옮긴 듯 가벼운 신음을 내뱉었다.
"괜찮아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지만 난 재빨리 일어나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원장님."
"양해陽海의 구역에 들어온 모양이네요. 조심하세요. 이곳 차원의 주민들은 양해의 깊은 심해에 사는 불의 어룡들이거든요. 방금 전은 '작은 놈'이라서 다행이었지만 '큰 놈'이라면 저도 다정씨를 '온전한 형태'로 지켜낼지 장담할 수 없답니다."
발아래를 내려다봤다. 이글거리는 용암, 생각해보니 나 지금 엄청 위험한 상황이다.
적응이란 건 때로 현실을 안일하게 만들어준다. 차원이동으로 생판 모르는 세계에서, 용암 위에 서서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었다니 멍청한 것도 유분수지.
분명 첫 시작은 샐러맨더의 새끼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날 이곳에 데리고 올 생각이 없었다.
원인을 따진다면 결국 내 젖꼭지 때문인 것이다.
이 위험은 내가 자초한 거야.
투정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투정을 부릴 상대가 용이라는 것도 문제지만.
난 그녀에게 다가갔다. 팔짱이라도 끼고 싶었지만 그러진 못하여 최대한 가까이 붙어 움직였다. 그러자 용의 모습을 한 그녀는 날 밟을까 봐 신경 쓰인다며 멀찌감치 떨어트렸다.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그녀가 날 멀리서 걸으라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내 구명줄은 그녀뿐이기에 군말 없이 발아래에 최대한 신경을 집중시키며 걸어야 했다.
까아악-!
까아악-!
발아래에 조금이라도 미동이 있으면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그럼으로 몇 번의 위기를 견뎌낼 수 있었는데 이번에 찾아온 위기는 발아래가 아닌 '하늘 위'였다.
"이곳의! 괴물은! 용암 아래에! 헉헉, 있다면서요!"
하늘에서 쇄도하는 불의 까마귀들이 날 쪼아먹기 전에 난 앞장 서가는 그녀의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허겁지겁 달려가던 난 그녀의 마법에 의해 다시 한 번 자석처럼 그녀한테 끌려갔고, 또 용암 바닥을 굴러 명치를 찍고 말았다
"에이, 작고 귀여운 녀석들을 보세요. 녀석들은 위험이 되지 않아요."
"아니! ... 아니, 저놈들 부리를 보세요. 내 뚝배기 깨지기엔 충분한 것 같은데... 아닙니다."
용은 대수롭지 않게 날 무시했고 반론하던 나도 입을 닫고 그녀를 따라갔다.
하늘 위에선 여전히 불꽃 깃털을 한 까마귀들이 불길하게 울었으나 용의 마법에 호되게 당한 후 함부로 덤벼들지 않았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야.'
그 뒤로도 몇 번의 위기가 있었으나 난 무사히 '샐러맨더 서식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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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홀로 남은 난' 날아가는 용의 뒷모습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원장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저 개새끼가 멍멍 짖는 걸 구경하는 것처럼 말이야. 젠장, 죽지 않아서 다행이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병신 같은 성질머리."
난 지금까지 최대한 그녀의 비위를 맞춰줬다.
그녀는 용이고, 난 인간이고, 이곳은 위험하고, 날 구해줄 자는 그녀밖에 없었기에 하지만 결국, 샐러맨더의 서식지 앞에서 화를 터트리고 말았다.
난 다혈질이다.
그리고 세상은 다혈질이 살기에 참 거지 같아졌다. 지금이야 치안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지만 한참 혈기왕성하던 청소년 시절엔 까닥하다간 '병원' 신세가 아닌 '묘지' 신세를 져야 했다. 나 또한 가끔씩 목숨과 '화를 내는 것', 둘 중에서 선택할 때가 있었다.
대부분 목숨을 택했지만, 정말 화가 나 참을 수 없다면 막무가내로 화를 터트렸다.
'의사 선생님' 이 그러셨지. 유치원에서 겪은 그 사건 때문에 억눌린 고통과 불완전한 정신 상태의 표출이라고. 난 온화한 남자지만 차원이동으로 용암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용암 바다에서 목숨을 위협받고 스트레스가 쌓여가던 와중에 그녀의 막무가내 행동에 그만 '화' 가 쌓이고 말았다.
"아니지, 그 정도면 잘 참았지. 그래도 욕은 안 했잖아. 부드럽게 '따졌을' 뿐이야. 그녀가 사이코패스 용이 아니라서 다행이긴 하지만, 당연한 권리였어. 암."
샐러맨더의 서식지에 도착하자 그녀는 '차원의 주인'에게 볼일이 있다며 날 혼자 남겨두고 떠나려고 했다. 언제 올 거냐고 물어보자 몇 시간 뒤에나 돌아온다고 한다. 이때부터 슬슬 화가 치밀었다.
"저 혼자서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화를 냈다.
그저 말꼬리를 살짝 올린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분명 변명할 수 없이 화를 낸 게 맞다.
하지만 당사자에 따라서 유두리있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하! 왜 내가 용에게 유두리를 바란 건지, 거참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네.
그러자 그녀는 공포스러운 뱀 눈을 번뜩이더니 엄청나게 큰 파충류의 손으로 날 우악스럽게 낚아챘다.
"이런! 인간 '한 마리'를 데려온 덕에, 시간이 늦어졌네요. 이곳의 주인은 약속 시간 어기는 걸 극도로 싫어하거든요. 그럼 나 올 때까지 '젖을 줄 암컷' 을 잘 찾아봐요~ 그래도 '마법' 은 걸어 드릴 테니까 그다지 위험하진 않을 거예요. 아마도."
그렇게 그녀는 떠났다.
홀로 남은 난 방금 전의 열의로 가득한 '성냄' 을 곰곰이 생각했다.
"저 혼자서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젠장!
생각해보니 그녀에게 화낸 것도 아니군.
좋아. 훌륭해. 강자 앞에서 분노조절장애는 확실하게 고쳐졌어.
그녀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고개를 돌려 '샐러맨더' 들의 서식지를 바라봤다.
녀석들은 이방인인 날 앞에 두고도 태평스럽게 용암 바다에 몸을 담근 채 늪지대의 하마처럼 유유자적이었다.
끼이?
품 안에 새끼 샐러맨더가 고개를 빼꼼 내민다.
확실히 녀석도 동족들에게 관심이 가는 듯했다.
"젖 동냥이라, 샐러맨더들에게 젖 달라는 게 부끄러울까, 사람한테 젖 달라는 게 부끄러울까?"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했다.
새끼 샐러맨더가 살 곳을 찾아줘야 돼.
더 이상 내 젖꼭지에서 불이 나오게 할 순 없다.
굳은 마음으로 결심하고 새끼 샐러맨더를 안은 채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겉보기엔 암수를 구별할 수 없었으나 '교감'으로 인하여 어떤 샐러맨더가 암컷인 지, 더 나아가 '젖' 이 나오는 지도 알 수 있었다. 숨 쉬는 방법을 알듯이 자연스럽게 말이다.
'다행히 새끼를 밴 암컷들이 있다. 문제는 '녀석들이 다른 새끼를 받아들이는 가' 인데."
새끼 샐러맨더는 호기심으로 가득 찬 동글동글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난 심청이를 키우는 심봉사의 심정으로 조심스레 '암컷 샐러맨더' 에게 다가갔다.
"저기... 아줌마. 젖 좀 주세요. 이 아이는 엄마 잃은 불쌍한 아이예요. 괜찮죠? 괜찮은 거 맞죠? 자, 그럼 놓습니다. 아니, 잠시만! 으악!"
싸아-!
녀석들은 내가 지척까지 와도 경계를 하지 않았지만 새끼 샐러맨더를 등에 올려놓으려고 하자 무서운 경고음을 내뱉으며 꼬리를 휘둘렀다. 다행히 '용의 마법'으로 민첩해져 새끼 샐러맨더가 다치지 않게 안을 수 있었으나 확실히 알게 되었다. 녀석들은 새끼 샐러맨더를 반기지 않는다.
난 뒤로 물러나 입술을 깨물었다.
일이 쉽사리 풀리진 않는구나.
"녀석들은 '공동육아'는 아닌가 보군. 아니면... 단순히 무리에 받아주지 않는 건가?"
녀석들이 내 존재를 인식하고 나도 녀석들을 살펴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서 주저앉아 상황을 관찰했다.
샐러맨더들은 늪지대의 하마와 같았다.
성질이 포악했다. 가끔씩 녀석들의 영역에 다른 종의 마물들이 침범하면 녀석들을 합동하여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도망가는 마물이라도 끝까지 따라가 처단했는데 지구의 야생동물처럼 영역에 굉장히 민감한 듯했다.
용이 기록한 샐러맨더들에 대한 정보는 정확하지 않았다. 뭐가 '비교적 순하고 머리를 만져주면 좋아한다' 야? 하긴, 용 앞에선 저 불꽃 도마뱀도 어쩔 수 없었겠지.
약간은 겁먹었으나 섣불리 다가갔을 때도 녀석들은 날 적대하지 않았었다.
난 천천히 녀석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샐러맨더들은 내게 불편한 시선만 줄 뿐 덤벼들진 않았다. 저렇게 영역에 민감한 녀석이 날 가만히 놔둔다라, 그 점에서 난 가능성을 찾았다.
"흠, 만약 녀석들이 날 '샐러맨더'라고 생각한다면, 가능성은 있다."
용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
많은 시간에 걸쳐 난 샐러맨더들을 관찰하고, 또 관찰했다.
마물들은 습성이 기상천외하여 함부로 동물들의 습성과 동일 선상에 놓을 순 없었지만 어느 정도 '비슷한' 부분은 있었다. 관찰할수록 샐러맨더 무리의 규칙을 찾아낼 수 있었다. 괜히 다큐멘터리 채널로 다져진 상식이 아니지, 녀석들이 날 무리에 받아들일 가능성은 점점 커져갔다.
"새끼들이 자유롭게 노는 데다가 젖을 먹을 때면 다른 '암컷'이라도 달라붙는 걸 보니 공동육아를 하는 게 확실한 것 같은데..."
녀석들이 날 '무리'로 받아줄 방법을 모르겠다.
사소한 접근 방법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한참을 샐러맨더들을 관찰하자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끼이-!
어느새 녀석에게 젖을 물릴 시간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