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12화 (12/258)

# 마수...? #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용'이라고...

이계의 존재들 중 가장 고귀한 힘을 가진 자들이며 인간이 감히 판단할 수 없다 하여 불가지해의 존재들이라 칭해지는 존재들. 그래, 감히 판단할 수 없어 그들의 앞에서 대놓고 말을 하지 못한다. 천방지축 얼렁뚱땅 '짱구, 단비' 보다 더 한 새끼들이라고!

뉴욕 자유의 여신상을 골렘으로 개조하고 만리장성을 한 번 무너트렸다가 하룻밤만에 다시 세우거나, '길고양이 보호 협회' 의 회원이 된 용 때문에 전 세계 1억 마리(추정) 의 길 고양이들을 위한 '거대한 고양이섬' 이 태평양 인근에 생겨났어도, 인간들은 입 벙긋도 하지 못했다. 언제 그들의 괴짜 같은 짓거리가 '재앙'처럼 다가올지 모르는 것이다. 그나마 용들이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는 게(비교적) 다행일 뿐이었다.

...

원장님을 볼 때면 평범하다고 느껴졌다.

인간은 적응의 생물이라, 가끔씩 까먹을 때가 있었다.

빨간 머리의 섹시하고 도발적인 머리카락을 가진 원장님이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원장님도 그러한 '용'이다.

'지금처럼 날 들어 올린 그녀의 크고 듬직한 '발톱' 이 아니었다면, 내 이상형이었을 거야.'

그녀의 발톱에 몸이 끼인 채 창공을 나는 와중에서 할 짓이라곤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난 멍하니 '용'에 대해 생각했다.

케르베로스와의 교감 이후 다음날, 난 거절할 수 없이 다음 마물을 만나러 가야 했다.

이번엔 위험하지 않다며 보호복도 입혀주지 않았다.

그녀는 '용' 치곤 얌전한 편이었으나 제멋대로 천방지축인 점은 다르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제일 가는 괴짜겠지.

'마물원' 을 운영하는 용이라니.

"도착했어요. 순결을 상징하는 백색의 말, 유니콘의 둥지입니다! 멋있죠? 꽤나 공들인 둥지랍니다."

"... 와아. 참 멋있다. 잠시만요. 우에엑!"

'금지 구역' 의 유니콘 둥지, 공간을 넘어 도착한 그곳에서 다시 한 번 하늘을 비행해 구름이 잔뜩 낀 창공에 숨겨진 하늘섬으로 향했었다.

용이 날 내려주자마자 참아왔던 구토를 했다.

용은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탈 것이겠지만 '승차감' 은 별로네.

'유니콘의 둥지라니... 거 참.'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용이 뿌듯해하며 자랑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높은 창공에 자리한 하늘 섬, 그곳은 머릿속에 '천국, 유토피아. 포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의 장소 같았다. 하늘에선 '달' 이 부드러운 빛을 은은히 뿌려주고 있었고 무지갯빛 구름이 하늘 섬 곳곳에 솜사탕처럼 푹신하게 피어올랐으며 맑은 강물이 흐르고 싱싱한 꽃들은 저마다 색과 향기를 자랑하기 바빴다.

'유니콘'

지구에서도 유명한 마물이다.

순결의 상징, 뿔 달린 백색의 말... 그러나 실제로 본 사람은 없었다.

역시 이번에도 내가 처음일 것 같다. 유니콘을 마주하는 첫 번째 인간이 되겠지.

'이력서를 낼 때만 해도... 상상이나 했겠어?'

내 인생은 확실히 달라졌다.

멍청해서 인식하지 못한 게 아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가다 보니, 이런 상황이 되어버려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의 중대성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내겐 그저 따뜻하다가 가끔씩 제멋대로인 상사에 불과한 빨간 머리의 아름다운 그녀는 지구연합도 두려워하는 '용' 이었고 어제 마주친 케르베로스는 600층의 마물이니, 세계를 멸망시킬 마물이니 하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가진 녀석이었고 이번엔 명성과 달리 그 어떤 대단한 헌터도 발견하지 못했던 유니콘을 만나게 되었다.

어썸한 인생,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능력자들의 화려한 삶.

분명 지금 내 상황은 그들과 다르다. 그다지 화려한 느낌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마물원의 원장님이자 상사이신 용에 의해 이리저리 치이는 느낌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구연합의 권력자들이나, 세계 어딜 가나 최고 대우를 받는 베테랑 헌터들이라도 내가 놓인 상황만큼 대단한 일은 겪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지들이 차원을 넘어 어룡과 만나봤겠어?

"저기 오네요. 지구로 넘어온 단 한 마리의 유니콘. 순결의 상징, 고귀함의 짐승."

확신하는 건 달아오르는 이 흥미로운 느낌이 이전처럼 쉽게 꺼지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구름 속에서 녀석이 나타났다.

하얀색의 백마다. 그러나 지구의 말과 다르다.

크기는 두 세배나 더 컸으며 유니콘의 털은 하얗다 못해 형광등처럼 빛이 나고 있었다.

하얀색이 언제 인간들에게 깨끗함과 고귀함의 상징이 되었는진 몰라도, 녀석을 보니 '품격' 이란 게 무엇인 지 알 것 같았다.

유니콘은 위험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딸각, 딸각, 기분 좋은 말발굽 소리.

귀족처럼 고풍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온 유니콘은 용을 향해 마치 인사를 하듯 머리를 숙였다.

그리곤 날 바라보며 '눈썹' 을 추켜올렸다.

[이봐, 너 지구의 사람? 어쩐지 넌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 난 지구의 처녀들과 놀기 위해 이곳에 왔어. 저 망할 할망구가 위험하다고 날 이곳에 가뒀지만... 아차, 그녀에겐 내가 이런 말했다는 건 비밀이야! 어쨌든 혹시 깔쌈한 처녀들 알고 있으면 소개해주지 않을래? 뭐야? 그 표정은. 알았다. 미안, 얼굴을 보아하니 넌 처녀들을 알 일이 없겠네.]

하하.

어썸해.

유니콘은 지금까지 마주쳤던 그 어떤 마물보다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었다.

비록 대화가 상상할 수 없었던 종류였지만 확실한 건 내 인생은 정말 어썸해졌다는 것이다. 유니콘이 여자 소개해달라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다.

##

용은 내게 유니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려달라 했다.

내가 할 말은 딱히 없었다.

그저 그를 표현하기에 가장 알맞은 단어가 있었다.

"발정 났어요. 쟤."

유니콘은 콧바람을 불며 내게 따졌지만 갈수록 저급한 말만 해대는 녀석은 강남 제비족 말투와 다름없었다.

"녀석과는 대화가 잘 되네요. 이제 알았으니 빨리 돌아가죠. 용님의 시간을 허투루 쓰게 만들 순 없잖아요."

"그가 따로 원하는 건 없던가요? 그가 살던 세계로 돌려보내려고 했지만 완강히 거절하더군요. 계속해서 지구로 돌아오니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묶어둘 수밖에 없었어요. 분명 원하는 게 있어서 지구로 돌아올 터인데..."

"처녀들을 원한대요. 저 녀석은 그냥 이곳에 사는 게 지구에 훨씬 이로운 일 같으니 무시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용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는 급한 문제가 아니니까요."

돌아가던 찰나였다.

멀뚱멀뚱 대화를 듣던 유니콘이 다급하게 외쳤다.

[이봐! 젠장. 어쩔 수 없군. 내 말을 알아듣는 존재가 너밖에 없으니.... 계약하자. 영웅 시켜줄 테니까 날 이곳에서 해방시켜줘. 그리고 처녀들과 만나게 해줘]

무시했다.

용의 발톱이 날 쥐고, 하늘을 날아오른다.

[영웅 시켜준다니까! 영웅! 지구에도 그런 거 있잖아. 페르세우스나 헤라클레스 같은 거!

그런 거 시켜준대도!]

격한 투레질에 용은 뒤를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는 거예요?"

"몰라요. 무슨 영웅 시켜준다는데 관심 없음."

등 너머로 쌍욕 하는 유니콘의 투레질은 둥지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희미해졌다.

유니콘의 둥지에서 마물원으로 돌아오자 아직 반나절에 지나지 않았다.

포근이에게 젖을 먹인 후,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엔 금지 구역의 다른 마물을 만나러 갔다.

# 글루투니 #

용은 금지구역의 남은 마물들 중, 마지막으로 꼭 만나봐야 할 마수가 한 마리 남았다며 운을 뗐다.

"이제 만나러 갈 마물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주세요. 경우에 따라선 케르베로스보다 훨씬 위험한 녀석이거든요."

"그럼 안 갈래요."

"우선 양치랑 샤워부터 하세요. 이빨에 낀 음식물, 어딘가에 흘린 과자 부스러기... 사소한 것이라도 그곳엔 그 어떤 '먹을 것' 을 들고 가면 안 돼요."

"제가 안 가는 선택지는 없죠? 그래서 말 무시하는 거죠?"

"그는 모든 짐승들의 둥지에서 온 '글루투니' 의 명칭을 가진 마물이에요. 무척이나 흉포하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제 경고만 잘 기억해주신다면요."

"옛날 RPG의 NPC랑 대화하는 것 같네. 용건만 말씀하시는 게, 요즘 게임도 자유도가 높아서 선택지를..."

"쫑알거리지 말고 빨리 씻어요."

"네."

관리실의 샤워실에서 꼼꼼히 씻고 나오자 용은 곧바로 금지 구역으로 날 끌고 갔다.

케르베로스보다 위험하다고? 젠장.

녀석의 우리 앞에서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의 악몽이 떠오른다. 뇌를 갉아먹던 시끄러운 비명, 죽을 뻔한 위기! 다시 한 번 찾아오는 건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내 의지로 그곳에 발을 딛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용은 가볍게 날 밀쳤고 우리 너머를 밟자마자 '박탈감' 이 몸을 엄습했다.

공간이동이다. 난 한숨을 내쉬며 흐름에 몸을 맡겼다.

"이번엔 잘 지켜주소?"

"... 알았으니까 다정 씨도 긴장하세요. 곧 그가 옵니다."

드넓은 사막 같은 녀석의 우리, 난 긴장하며 지평선 너머에 등장한 검은 점을 바라봤다.

점점 가까워지는 마물!

'글루투니'

용이 말하길 폭식의 마물이라 끝없는 식욕으로 세계마저 갉아먹는다 하였다.

케르베로스보다 위험한 마물의 등장에 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까이~!

마침내 녀석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난 심장에 굉장히 큰 타격을 입었다.

"확실히 흉포하네요. 전치 16주짜리 귀여움입니다."

"배부른 글루투니는 위험하지 않아요. 재앙은 배고픈 글루투니니까."

마치 하프물범처럼 통통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북슬북슬한 털 속에 감춰진 인형 같은 검은색 두 눈, 애교를 피우듯 데구루루 구르며 귀여운 목소리를 내는 녀석. 녀석이 유명했다면 피카츄 인형처럼 뽑기 인형의 단골 캐릭터가 됐었을 거야.

##

본능적으로 손이 가는 녀석이었다.

아기 강아지와 고양이처럼 머리를 마구 쓰담아주고 싶은 외모다. 난 손을 뻗었으나 용의 경고에 멈칫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녀석의 별명이 뭔 지 아세요? 갉아먹히는 세계의 악몽이라고요."

"저 작고 귀여운 애가요?"

"저 작고 귀여운 애가 멸망시킨 문명만 해도 몇 갠데요. 식욕의 화신, 끝없는 식탐의 마물. 글루투니는 저 조그마한 주둥이로 세상을 갉아먹어요. 지구에 풀어놓는다면 한 달만 지나도 녀석의 이빨 자국이 지구에 가득해질걸요? 갉아먹힌 폐허만 남겠죠."

머쓱하게 내밀던 손을 거두고 뒷걸음질 쳐 용의 뒤에 숨었다.

"지금은 계속해서 자라나는 나무의 씨앗을 먹여 얌전해요. 그의 뱃속엔 마나를 빨아먹는 나무가 자라나고 있을 테니 '포만감' 을 느끼는 이상, 배부른 글루투니는 위험하지 않죠. 하지만 만약 녀석의 뱃속에 무언가 다른 게 들어간다면 참아왔던 식욕이 폭발하여 끊임없이 갈구하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용의 주술도 소용이 없어요. 공간마저 갉아먹고 나와, 결국 지구를 '잡아먹을 겁니다'. 다정 씨, 글루투니가 현재 '무슨 상태' 인지만 알아봐 주시겠어요? 나무의 씨앗으로 부족하다면 다른 조치를 취해야 할 테니까요."

"... 저런 식충이 녀석과 교감하라고요? 영 내키지 않는데."

난 머리를 긁적이며 녀석을 바라봤다.

첫인상은 귀엽다.

그다지 흉포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리고 마주쳤던 그 어떤 마물들보다 순수했다. 녀석의 본능은 오로지 단 한 개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배고프다.'

케르베로스와 유니콘과 달리 녀석은 원시적이었다.

교감을 해도 녀석의 상태만을 알 수 있었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배고프다...

덩달아 나까지 배고파졌다.

녀석은 마치 먹기 위해 태어난 듯 배고프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아니, 뭔가 다른 게...'

그런 와중에 서서히 '배고픔' 을 벗어난 어떤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집중했다. 저 감정은 글루투니에게 식욕을 넘어선 유일한 감정이었다.

따듯하고 포근한 느낌의...

"다정 씨!"

"괜찮아요. 아마도...괜찮을 거예요."

숨김없는 감정의 교감은 내게 확신을 심어준다.

녀석은 순수했기에 녀석이 날 향해 거짓 없이 드러낸 감정으로 인하여 난 글루투니가 내게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손을 내밀었다.

용은 기겁했지만 난 만류했다.

교감은 말 없는 대화다. 그래서 거짓말이 불필요했다.

녀석은 날 해치지 않아.

글루투니는 내 손바닥에 기대어 혀를 할짝거렸다. 그리고 털을 마구마구 비볐다. 애교로 가득한 녀석의 몸짓엔 사랑이 담겨 있었다.

배고픔을 넘어선 감정은 바로 사랑이었다.

'녀석이 왜 날 좋아하는진 모르겠지만...'

용은 묵묵히 내 모습을 바라봤다.

"이건 확실히 지구에서 겪었던 일 중, 가장 놀라운 일이네요. 축하해요. 다정 씨. 전 세계에서 용을 놀라게 한 사람은 다정 씨밖에 없을 거예요. 흐음, 도대체 왜? 글루투니가 식욕 이외의 감정을 내보인 건 만 년의 역사 속에서도 없었던 일인데... 당신, 혹시 정체를 숨긴 신인가요?"

"제가 신처럼 보여요?"

"젠장, 글루투니에 대해 처음으로 서술한 건 나였다고요. 뭐라고 수정해야 되지? 글루투니가 다소 얼빠진 인간을 좋아한다고?"

용은 그 후,

마물원에 돌아오고 나서도 머리를 헝클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글루투니가 날 좋아한다는 점이 그녀에겐 천지개벽과 같이 믿을 수 없이 놀라운 일로 다가온 것 같았다. 결국 관리실에서 홀로 성내며 '있을 수 없다! 다정, 네 정체를 밝혀라!' 라며 추태를 부리기까지 했으니까 말이다.

##

퇴근할 때가 돼서야 용은 정신을 차린 듯했다.

"이상, 지금까지 금지구역에 몇몇 마물들을 만나봤습니다. 다정 씨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이제 다정 씨가 마물원에서 계속 일할 생각인 것 같으니, 마물원이 하고 있는 다른 일도 알려주고 싶었어요. 금지구역의 마물들은 제가 '보호' 하는 것과 동시에 '격리' 하고 있는 겁니다. 그들 중 단 한 마리라도 풀려난다면 세상은 '20년 전의 그때처럼' 혼란이 일어나겠죠. 다정 씨가 이틀 동안 보고 들은 것, 모두 비밀입니다. 절대로 남에게 알리지 말며 금지구역에 제 허락 없이 들어가지 마세요. 다정 씨는 꽤 현명한 편 같으니 용의 분노를 사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아시리라 믿어요."

"네..."

"그리고 자, 이건 위험수당."

용이 내민 봉투, 요즘엔 대부분 계좌이체를 쓴다지만 용은 '돈 봉투' 의 맛을 잘 알고 있었다. 넙죽 받고 나서 슬며시 확인해봤다.

"위험 수당이 필요한 일이라도 언제든지 시켜만 주십시오."

돈의 맛이다.

금지구역의 세상을 멸망시킬 마물이든 뭐든 이까짓 것. 몇 번이라도 더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일 하루는 휴가를 드리죠. 곧 야간 출장을 가야 될 것 같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