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친구 할래요? #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몇 가지 버킷리스트를 이룰 수 있었다.
솔직히 이루지 못할 거라 생각했었던 소망들이, 겨우 한 달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하루 동안의 휴가동안 난 예전부터 고대했던 일을 실행했다.
20대의 청춘이 늘 그렇듯 나도 성인이 되자마자 운전면허증을 땄다. 지금은 장롱면허가 되었지만 언젠가 꼭 몰아보고 싶은 차가 있었다. 내 드림 카는 럭셔리카의 품격이자 성난 황소가 심벌인 '람보르'였다 이탈리아 자동차의 대표적인 고급 브랜드 람보르사는 '20년 전 파동' 이후, 가장 선두에 서서 변한 세계에 적응한 뉴타입 차를 선보였다. 놀랍게도 전이의 파동이 덮친 지구의 자동차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역주행과 음주운전, 졸음운전 따위를 걱정하던 이전의 시대에서 도로에 나타난 괴물, 이계인, 마법을 걱정하던 시대로 넘어갔다. 좋은 자동차의 조건이 속도와 디자인에서 안전과 실용성 위주로 넘어간 것이다. 람보르가 뉴타입 스포츠카를 시장에 첫 선보였을 때, 대중들은 웃었다. 한 달 후, 마물에 의해 브루클린 브릿지가 무너진 후 유일하게 살아남은 람보르의 소유자와, 연달아 일어난 도로 충돌사고에서 람보르를 탄 생존자들에 의해서 대중들은 새로운 자동차에 열광하게 되었다. 시대에 적응한 자동차는 탈 것 이상의 것이 되었다.
방탄은 물론이고 이계의 기술을 도입해 자체적인 실드와 안전장치를 보유한다.
그야말로 새 시대에도 인간에게 빠질 수 없는 수단인 자동차가 새 시대에 걸맞게 적응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각 나라의 정책 덕에 가격도 이전과 다를 바 없다.
스포츠 카들의 성능 대결로 이젠 속도가 아닌 레이싱 트랙에 풀어놓은 마물의 습격을 얼마큼 버티는 가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어쨌든 람보르 뉴타입은 내 드림카였고 그런 대단한 차가 내 앞에 있다는 것만으로 난 소년 시절의 꿈을 상기시키며 들뜨게 되었다. 어쩜! 저 투구벌레같이 황홀한 자태와 독버섯처럼 아름다운 도색이람.
탱크만큼 기름을 잡아먹는 무식한 녀석!
"위험 수당을 모두 널 빌리는 데 사용했단다. 이 잔인한 스위트 레이디야."
백수 생활론 꿈도 꾸지 못했던 돈을 벌었지만 정작 내게 남은 돈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그 얼마 남지 않은 돈마저, 오늘 다 쓸 생각이었다. 20년 전에야 저축이니 뭐니, 그런 태평한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요즘 시대엔 그런 건 부자들의 사치였다. 있을 때 쓰는 게 장땡이었다. (경제학자들은 사회의 경제구조가 무너지지 않은 이유를 인식의 변화로 인한 과소비를 우선으로 꼽는다.)람보르사의 티셔츠를 입고 노란색 람보르 차에 타 첫 시동을 걸었다.
묵직한 엔진 소리와 엉덩이에 느껴지는 떨림! 괜스레 창문을 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어머, 저 시선 좀 봐.
살면서 누가 날 '부러워하는' 시선은 처음인데?
멋있게 출발하려다 멈칫했다.
스마트폰을 꺼내 웹 검색을 해본다.
'럭셔리 서울 명소'
쓸만한 검색 결과가 없어 '서울 비싼 음식점' 을 치니 주르르 나왔다.
고아원 인생이었다.
내 인생에 사치를 알 일이 없지.
난 웹 검색이 알려준 대로 가까운 고급 음식점으로 향했다.
한식은 싫고 다이닝룸 레스토랑은 부담스러우니 일식점이 좋을 것 같았다.
"처음으로 빨간 불이 좋아지는데?"
정지 신호 때마다 창문 너머로 손을 내밀며 여유로운 제스처를 취했다.
절대 방금 람보르를 사서 기뻐 미칠 것 같은 남자가 아니라 마치 이전부터 이런 차를 타고 다녔다는 것처럼 말이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내게 관심이 없는 듯했지만 확실히 운전은 편했다. 회사에서 낡은 봉고차를 몰 땐 그토록 짜증 나게 하던 얌체 운전자들, 다 어디 갔나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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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접시... 아니, 한 점에 2만 원이라... 음."
대뜸 가장 비싼 초밥을 만들어 달라 하자 초밥 명인은 히라메, 오도로, 아카미 초밥이란 걸 만들어줬다. 한점에 2만 원, 치킨 한 마리 가격이다.
맛있었다.
하지만 2만 원인데 맛없으면 사기였겠지. 그다지 큰 감동적인 맛은 아니었다.
"더 맛있는 건 없나요? 아니, 더 비싼 거요."
초밥 명인은 밥을 쥐던 손을 멈추고 날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눈빛이 애매해서 화내는지 원래 저렇게 생겨먹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 말이 그의 자존심에 금이라도 가게 만든 건가 싶었다.
"한 점에 백만 원을 호가하는 '마물'로 만든 초밥이 있..."
"괜찮아요. 이것도 굉장히 맛있네요. 생선으로 만드셨죠? 만족합니다."
명인은 다시 원래의 인상으로 돌아와 내게 오도로 초밥을 쥐어 주었다.
'마물 초밥' 이라고?
가격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라면 꺼림칙하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한때 채식주의자가 된 것도 돼지랑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나서부터인가? ...고기는 결국 포기 못했지만.'
술을 곁들어 배부르게 먹자 40만 원 채 안되게 나왔다. 이전 내 한 달 식비가 점심값으로 지출되었다. 굉장한 사치였으나 나름 만족했다.
"이번에 받은 위험수당은 차 사는데 썼고, 남은 돈은 월급뿐인가? 뭐 어때, 집세는 냈으니 다 써야지."
람보르기니에 올라탄 난 머릿속으로 럭셔리한 삶을 떠올렸다. 하지만 너무 럭셔리해서, 내 수준으론 감당치 못하는 것들뿐이었다. 뭔가 소시민스러우면서도 비싼 게 없을까 고민하던 난 문득 내가 시계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백화점으로 향했다.
역시 람보르는 마치 부자들의 '럭셔리 이용권' 같아서 발레파킹을 맡긴 후, 무엇을 구매하러 왔냐는 직원의 질문에 시계라고 대답하자 날 위한 안내인까지 붙여줬다.
성공한 남자들의 상징인 고급 시계다.
그중에서 시계의 문외한인 나라도 들어본 적 있는 값비싼 시계들.
솔직히 말해 내가 착용하기엔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다.
'할부는 끊지 말아야지.'
마물원 생활은 순조롭게(내 목숨과는 관계없이 생각해보자면) 지내고 있었지만 혹시 모를 일은 언제나 발생한다. 할부로 빚을 지진 않고 가장 저렴한 시계로 구매했다. 가장 저렴하다는 게 600만 원인 건 슬펐지만 말이다.
그 후 의상샵에 들렸다.
옷 구입을 오프라인으로 해본 적도 오랜만이었다.
특히 부담스러운 일 대 일 직원의 마크를 받으며 집히는 옷마다 백만 원을 호가하는 옷들이 즐비한 고급 옷 가게는 처음이다. 난 내색하지 않고 담담히 옷을 구입했다.
물론 마음에 드는 것 중 가장 저렴한 티셔츠 한 장과 팬티, 양말만 구입했지만.
백화점이 주는 사치스럽고 특별한 경험은 마치 내가 굉장한 사람이라도 된듯한 느낌을 선사했다. 난 기분 좋게 만끽했다. 그리고 차로 돌아왔을 때 람보르의 핸들을 잡고 고개를 파묻었다.
"왠지 허무해."
꿈꿔오던 삶이었다.
이 정도만 돼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정작 겪어보니 허무했다.
재미가 없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 빠진 것 같다.
난 골똘히 고민했다. 이 허무함은 뭘까?
알듯 하다가 전혀 알 수 없었다.
멍하니 차에 앉아 생각하던 그때, 주차장의 고급 차량에서 내리는 젊은 남녀가 있었다.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내가 저들과 다른 점은 뭐지?
"젠장! 결국 간단한 얘기였어."
순간 깨닫고 말았다.
남자의 팔짱엔 예쁜 여성의 팔이 걸려있었다.
내겐 없고 저 남자에겐 있는 것.
그건 바로 여자친구다.
난 없다.
여자친구는커녕, '여자인' 친구도 없다.
맛있는 밥을 먹고 비싼 옷을 사고 좋은 경험이란 다 해봐도 결국! 이 모든 걸 '혼자 해봤자' 즐거울 리가 없었다.
"잘 못 살아온 인생인가 봐."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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뀨뀨-!
집에 돌아오니 새끼 샐러맨더가 날 반겨줬다.
녀석은 하루 동안 마물원에서 가져온 '용암 둥지'에서 자고 있었다. 고양이처럼 게으른 녀석이니 지금도 자고 있을 시간이지만 내 기척에 잠이 깼나 보다.
"맙소사."
'용암 둥지'를 집에 놔둘 수 있다면 밤마다 내 잠을 깨우는 새끼 샐러맨더에게서 해방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건, 망할 '용암' 둥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탁했잖아. 오늘 하루 둥지에서 나오지 말라고."
뀨?
날 반겨주는 건 좋으나, 집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단순히 애완동물이 휴지를 헝클어놓거나 가죽 소파를 찢어놓는 수준이 아니다. 용이 특별 제작한 용암 둥지에서 녀석이 뛰쳐나오며 주변에 불길을 흩뿌렸고 집안 살림에 순식간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올랐다.
다행인 건 이전 집과 달리 비싼 집세에 걸맞게 스프링쿨러가 작동됐다는 것이다.
샐러맨더는 물에 젖는 게 싫은 지 뽈뽈뽈 기어 올라와 내 소매에 몸을 숨겼다.
한 달전에 비하여 덩치가 조금 커져 이제 소매가 꽉 차는 느낌이었다.
새끼 샐러맨더는 포근한 느낌이라 기분이 좋았다.
" 다음 달은 사치 따윈 못 부리겠군."
스프링클러에도 불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고 얼마 후 소방차가 도착했다.
예전엔 모든 응급차량들이 나라의 세금으로 운영된 듯하지만 변해버린 세상에선 위급하고 다급한 일들이 많았기에 한 번 출동하면 몇 십만 원을 의무적으로 납부해야 했다.
결국 빚을 지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새끼 샐러맨더가 너무 따뜻해서, 왠지 화는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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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출근하자 원장님은 평소와 달리 화장을 한 채 관리실에 앉아있었다.
"오늘 밤엔 야간 출장이 잡혀있으니 다섯 시까지 끝내고 몇 가지 준비물을 챙기도록 하죠."
"저기 원장님..."
어젯밤 소동으로 잠을 자지 못했다.
"혹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요."
"뭔데요?"
원장님의 빨간 눈은 예뻤다.
"제 여자친구 될 생각 없으세요?"
"호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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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내가 무슨 생각을 했었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자면, 유독 외로웠던 전날의 기억과 그동안 지내오며 친숙해진 그녀와 그날따라 유독 아름다웠던 새빨간 그녀의 입술과 불난리에 잠을 자지 못해 멍한 정신과 전날 먹었던 고급일식점의 생선이 상했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용은 웃으며 날 때렸다.
아팠다.
다신 그런 말하지 말란다.
그녀는 연애 문제에 대해선 대단히 민감한 듯싶었다.
물론 용의 연애에 대해서 내가 무슨 재주로 알까.
마츄들을 돌보며 시간을 보내고 다섯 시에 관리실로 가자 빨간 립스틱을 한 원장님이 내게 '검은색 가죽 옷' 을 건네며 말했다. 야간 출장에 대해서였다.
"다정 씨의 능력이라면 꽤 수월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생각해보면 마물원인데 왜 출장을 가는 걸까.
이유는 그녀의 이어진 말에 알 수 있었다.
"마물원은 지구에 녹아든 '마물' 들을 관리하며,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하죠. 마물원 개장보단 오히려 출장가는 게 더 많을 거예요. 특히 다정 씨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게 밝혀졌으니 자주 써먹어야죠. 주는 돈값이 얼만데..."
"출장은 어디로 갑니까?"
"다정 씨, 뱀파이어라고 아세요?"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졌으며 피 빨아먹고 살며 박쥐로 변신하고 빨간 망토를 뒤집어쓴, 옛날 만화에 나오는 '큐라' 같은 애들?
"뱀파이어요?"
안다고 하면 알고,
모른다고 하면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