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간 근무 #
뱀파이어,
문화 전반으로 가장 유명한 괴물 이야기를 꼽자면 창백한 피부에 피를 마시는 뱀파이어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15세기 유럽에서부터 시작된 이 이야기는 많은 각색을 걸치며 유럽을 넘어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괴물이 되어갔다. 시초가 잔혹한 짓을 일삼던 귀족이라는 사실과 포피리아 유전병을 가진 '햇빛에 취약하고 창백한 피부의' 환자들은 뱀파이어 설화에 훌륭한 현존 근거가 되었고 기원전부터 인간이 얼마큼 '피'에 집착하는지 알고 있다면 어쩌면 그들의 폭발적인 인기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햇빛을 무서워하고 마늘을 싫어하며 심장에 대못을 박아야 죽는 불사신 괴물,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 뱀파이어는 단순히 매력적인 공포의 대상에 벗어나 문화적 동경 대상이 되어갔다.
용은 '현대 사회의' 뱀파이어에 대해 설명했다.
"뱀파이어의 이야기는 꽤나 달라졌어요. 사실 15C 지구의 뱀파이어 이야기는 놀랍도록 '그들과' 똑같거든요. 하지만 요즘처럼 송곳니가 달린 잘생기고 예쁜 남녀가 마치 사회의 상류사회 일원으로 나와 끈적하고, 단체 섹스에.. 뱀파이어 신드롬은 몇몇 작가들의 각색된 이야기로 인하여 생겨났어요. 중세 유럽인을 떨게 했던 괴물이라고 해도 과연 현대인이 뱀파이어를 두려워할까요? 다소 역겹다고 생각할 뿐, 그들은 확실히 공포의 대상이 되지 못했죠. 요즘 인간들이 웬만큼 사나워요? 지구로 넘어온 뱀파이어들도 마나를 사용하는 인간들은 당해내지 못해요. 그래서 뱀파이어들은 도리어 지구의 문화를 이용하고자 했어요. '진짜' 뱀파이어들이 지구로 전이당했을 때, 지구의 뱀파이어 문화는 그들이 지구에 적응하기에 매력적인 요소였어요. 전이 당한 뱀파이어들은 다른 괴물들처럼, '유해생물' 이 되어 토벌당하기 전에 뒷골목에 그들만의 아지트를 차렸어요. 그렇게 뱀파이어 소굴이 만들어졌죠. 진짜 뱀파이어들이 득실거리는, 현대 문화가 만들어 낸 잘생기고 예쁜 남녀가 단체 섹스를 하는... 그런 끈적한 공간이."
"잘생기고 예쁜 남녀가 단체 섹스를 하는 그런 끈적한 공간에, 출장을 간다는 건가요?"
"네. 오늘 밤은 그들이 동족을 만드는 날이거든요."
카악-!
용이 이빨을 내밀며 카악 무는 시늉을 했다.
빨간 립스틱도 그들처럼 꾸민 건가?
그래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21세기 뱀파이어의 문화적 상징에 반한 멍청한 인간들이 뱀파이어 소굴에 제 발로 걸어가 뱀파이어가 되는, 전이로 인해 태어난 현대 사회의 문제 현상 같은 곳에서 '교감' 능력을 가진 내가 할 일은...
"에이 설마요."
"무엇을 상상하든, 그게 맞을 거예요. 다정 씨는 뱀파이어를,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전신前身과 다름없는 어떤 마물을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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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 순위'라는 건 사라졌다.
꾸준히 범죄지수 최하위로 세계 치안 순위 1위에 랭크되던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의 뒷골목은, 2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험해졌다.
미국 범죄 드라마에서 볼법한 할렘가의 뒷골목에 일어나는 살인과 강도가 이젠 서울시민에게도 일상이 되었다. 뭐, 요즘엔 꽤 나아진 모양이지만.
도착한 곳은 홍대의 외곽에 자리한 유흥가의, 조금은 더 깊게 들어간 뒷골목의 어느 주점이었다. 술병 모양의 네온사인 간판만이 빛나는 작은 주점 앞에서 용은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거 아세요? 인간들의 생식기는 정말 특별하답니다. 유사 인종이라고 해도 새끼... 아기를 잉태하기는 힘든데 인간들은 우월할 만큼 다른 종과의 수정 확률이 가장 높아요. 그들의 자궁은 다른 종의 태아를 받아들일 만큼 숭고하고, 마찬가지로 인간 남자의 정자는 다른 종족을 임신시킬 만큼 강력하죠."
난 인상을 찡그리며 답했다.
"오우, 그거 참 민감한 주제네요. 몰랐는데, 알고 싶지도 않아요. 왜 이런 말을 꺼내시는 거예요?"
난 인간이다.
'용' 인 그녀의 관점에서 풀이되는 인간의 번식 행위와 생식기의 특별성은 그다지 유쾌하게 들려오지 않았다. 종마 앞에서 "이 말은 유전으로 잘 가꿔진 뛰어난 수말" 이라고 평가하는 것처럼 말이다.
"전 상관없지만 뱀파이어의 소굴은 다정 씨에게 인간으로서 꽤나 충격적인 장면일 거예요. 동족이 다른 종과 번식 행위를 하는 모습이란, 으! 생각해보니 끔찍하네요."
그녀가 술집의 문을 열고 지하 계단으로 내려갔다.
난 조금은 떨리는 마음이 되어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저 아래가 양해의 바다나 금지 구역의 마물 둥지만큼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오히려 떨림은 더 심했다.
"긴장되는데."
그녀가 오해한 게 있었다.
난 이 컴컴한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걸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장면' 은 충격적으로 다가오겠지만 충격은 공포와 놀란 감정만이 동반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흥미로웠다.
"안 오실 거예요? 저 먼저 들어가면 가드들이 다정 씨를 곱게 들여보내주진 않을 거예요."
계단 아래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얼마큼 충격적인 장면일지 기대감을 품으며 후다닥 계단을 내려갔다.
뱀파이어 소굴답게 묵직하게 생긴 보디가드들이 입구에서 가드를 서고 있었다.
용과 난 약속된 손님이라 쉽게 통과할 수 있었으나 멋모르고 이곳을 찾은 손님들은 꽤나 혼쭐이 났을 것 같았다.
뭐, 약속되지 않아도 용에겐 소용없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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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이었으나, 보다 퇴폐적이다.
느와르 19금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분위기의 클럽엔 담배와 알코올, 향수와 조금은 역겨운 냄새로 가득했다. 조명은 빨간 정육점처럼 기분 나빴고 클럽 EDM 대신에 '뱀파이어들의 음악' 같이 약간은 우울한 사이키델릭, 얼터너티브 록스러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난 용의 뒤에 숨어 눈알을 바쁘게 굴렸다.
이 세계는 정말 흥미롭고 흥분되고 긴장되며 끈적했다.
'저거 마약인가? 코로 마시는 사탕가루일 리는 없겠지.'
뱀파이어 소굴의 젊은 남녀들은 모두 취해있었다.
술에 취하든, 분위기에 취하든, 정체 모를 약에 취하든 말이다.
특히 테이블 위에 올려진 하얀 가루와, 그곳에 앉은 사람들의 상태는 심각했다.
아주 지 엄마 아빠도 못 알아보겠어.
"대부분 인간처럼 보이는 데, 뱀파이어들은 어딨나요?"
용에게 속삭이듯 말하자 그녀는 이빨을 드러내며 송곳니를 가리켰다.
"자세히 봐요. 그들이 인간인 지."
지하 클럽은 꽤나 넓었다.
입구에서 깊숙이 들어갈수록 '상스럽다' 고 표현될만한 장면들이 연출되었다.
난 그들이 서로의 살결을 핥는 게 성욕에 찬 애무라고 생각했었으나 자세히 보니 입가에 묻은 빨간 건 립스틱이 아니었다. 분위기에 적응되고 주변을 여유롭게 관찰할 수 있게 되자, 보지 못했던 것들이 서서히 보였다. 와인잔에 담긴 빨간 건 와인이 아니었고 빨간 조명 아래 확실히 드러난 송곳니를 가진 자들이 있었다.
상상과는 달랐다.
퇴폐적인 분위기는 에로티시즘을 자극하기는커녕, 생각보다... 더 역겨웠다.
"젠장, 알고 보니 다 뱀파이어들이네요. 만약 저들이 인간이라면 정신이 이상한 게 틀림없어요."
"하핫, 사실 이곳에 뱀파이어는 없답니다."
용을 따라간 곳은 클럽의 가장 안쪽에 난 방이었다.
가드들이 지키고 있는 그곳, 문이 열리자 나름 '사무실'처럼 꾸며놓은 방 안의 모습이 보였다.
"바깥에서 '뱀파이어 흉내'를 내고 있는 자들은 모두 인간이에요. 흥미롭지 않나요? 저들의 행동은 어떤 근거도 없이 단순한 상상력으로만 이루어진 문화적 쾌감의 절정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이들이 그걸 이용하는 '진짜 뱀파이어' 들."
그곳엔 창백한 피부의 젊은 남녀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위대하신 분에게 존경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바깥의 사람들이 가짜라면 이들은 보다 본격적인 뱀파이어라는 느낌이었다. 소설과 영화에서 나올법한 그런 존재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츄파카브라님은 일어나지 못하고 계십니다."
"상태를 보죠."
그들은 원장님의 말에 방 안에 감춰진 또다른 비밀 문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난 그녀를 뒤따라가다가 그들 중 한 명의 제지를 받아야 했다.
"인간, 넌 들어가지 못한다."
"그는 괜찮아요.
뱀파이어는 용의 말에 고분고분 내 어깨에 올려놓은 손을 내려놓았다.
어깨를 매만졌다. 살짝 잡은 것뿐인데 아려온다. 무식한 힘이었다.
힘의 순리라는 게 참 좋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가장 강한 존재는 용, 그녀는 내 편, 그러니까 나도 '우위'에 있는 거야.
난 거한의 뱀파이어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잔뜩 힘을 줬다.
하지만 녀석은 눈 하나 꿈쩍 하지 않았다.
줬던 힘을 풀고 가볍게 녀석의 어깨를 두들겼다.
"뱀파이어, 넌 날 막지 못한다."
후다닥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어깨가 아려왔지만 그래도 사나이로서 지진 않았다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