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23화 (23/258)

# 한계는 빡빡머리가 마지노선이다.[새분량] #

돌아온 마담은 스산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그에 맞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시선을 아래로 두며(도망가고 싶었으나 소용이 없음을 알기에 눈빛이라도 피하고자) 한숨을 쉬곤(작은 반항이다) 머리를 긁적였다.(내가 멍청이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차갑게 식은 머리로 생각해본다.

방금 전에 있었던 객기, 혹은 자살행위는 어떠한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걸쳐 입 바깥으로 내뱉은 것인가.

아차 싶었다...? 세상엔 한계란 게 있다. 한계限界 단어 그대로 작용하는 범위의 끝, 만약 내가 평범한 회사를 다니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신입으로 첫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상태로 빡빡머리 사장의 얼마 없는 모근을 가지고 놀린다.

이마저도 내 힘으로 돌파할 수 있는, 작용하는 범위의 내다. 왜냐면 회사에서 사직을 권고받을 수는 있어도 사장이 대머리라 놀린 죄로 날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며 대머리를 놀리는 사회 풍조는 제법 용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계를 넘어섰다.

'아차 싶었다' 그딴 게 통할 상대가 아니다.

...

젠장.

복잡해지는 머릿속, 난처한 상황이 닥쳐오면 횡설수설 정신을 못 차리는 내 버릇 때문에 빡빡머리 사장부터 내가 어떤 벌을 받을지에 대한 상상까지 별의별 생각들이 교차했다.

침묵은 길었다. 잔뜩 화난 수학선생님의 회초리 매질을 기다리는 것보다 길었다.

그리고 짧기도 했다. 정작 10초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그만큼 용의 침묵은 무겁고 두려운 침묵이었다.

"그래요."

그래요.

그 뒤로 마담은 다시 뜸 들이며 말을 이어나가지 않았다.

좋아, 유추해보자.

그래요. 날 모욕한 당신에겐 사지 절단의 죄가 좋겠군요.

그래요. 감히 용에게 무지하다고 하였으니 당신의 뇌는 얼마만큼 큰 지 봅시다.

그래요. 죗값으로 당신의...

"씁, 내 불찰이 맞아. 이런 말을 한다니 나조차 놀랄 일이지만 어쩔 수 없이, 미안해요. 프티 petit(e)."

엉?

그녀가 이어서 말할 수백 개의 부정적인 언사 중에 단연코 '미안하다는' 말이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내 언사에 보통의 인간이라도 이만한 지위의 격차가 있다면 미안하다는 말을 쉽사리 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용이 내게 미안하다고?

마담은 이어서 내게 말했다.

"당신에게 사과하는 게 아니라 내 무지함에 대하여 고양이들의 대변자 같은 당신에게 고집부리지 않고 사과하는 거니 오해는 하지 말렴."

아무렴요.

난 마담이 화를 내지 않았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마담은 제법 내 따끔한 충고를 수용하여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녀는 내게 사과 아닌 사과를 하고 다시 용의 모습으로 현신하였다.

'마음이 변한 건 아니겠지?'

마담이 말한다.

"역시 나의 캣들은 지구에 놔두기엔 아까워! 녀석들에게 어울리는 세계를 만들어줘야지. 호호호!"

다음 일어난 일은 방금 전의 그녀가 해저로부터 땅을 끌어올린 것보다 더더욱 경악스럽고 황당한 일이었다. 난 더 이상 용의 정신 나간 짓을 보더라도 놀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에겐 한계라는 건 없는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섬은 공중으로 치솟더니 마치 환상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섬이 공중으로 치솟으며 생겨난 낙석들이 바다에 첨벙첨벙 물보라를 일으키며 야단을 떨지 않았다면 꿈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아니, 꿈속에서라도 이런 일은 말도 안 된다며 꿈임을 인지할 정도의 놀라운 일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슬며시 원장님에게 속삭였다.

"대체, 그 대체요. 대체 저게 대체 뭡니까? 대체."

천하의 용인 원장도 살짝 당황한 듯했다.

그녀는 빨간 머리를 매만지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쉽게 말하면, 다른 '빈 차원'에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어요. 오로지 고양이들을 위해서... 그녀는 세계를, 큼큼.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거예요"

귀로는 듣고 있으나 머리론 이해하지 못했다.

난 다시 한번 속삭였다.

"용이라면 다 저런 게 가능한가요?"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은 '저 지경은 아닙니다.'라고 강력하게 부인하는 듯했다.

"오해하지 마세요. 대지모신이라 불리는 그녀만이 가능한 일일 테니까요."

"아... 그렇구나."

역시 이해하지 못했으나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마담은 내 충고에 다른 결론을 내린 듯했다. 고양이의 개체 수를 줄이는 방법이 아닌 개체 수를 감당할 '다른 세계를 창조해내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과연 용이 아니라면 결코 생각 못할 지니어스한 방법이다.

어쩌면 잘 된 일일지도 모른다. 저런 괴팍한 존재가 고양이들을 데리고 지구를 떠나준다면 고양이들한테도 내가 본 참사는 이제 일어나지 않을 테니 다행이고 사람한테도 다행이고 지구한테도 다행이다.

거사(분명 놀라운)를 마치고 돌아온 마담은 뺨이 핼쑥해졌다.

지친 발걸음으로 걸어온 그녀는 하품을 하다가 갑자기 내 얼굴을 바라봤다.

"프티."

그녀는 날 프티라 불렀다.

뭔 뜻인진 몰라도 좋은 의미는 아닐 거야.

"에... 예스, 마담."

나름의 격의를 차려 대답했다.

마담은 자기가 불러놓고 귀찮은지 엄청나게 피곤한 얼굴로 날파리를 쫓듯 손을 뉘적뉘적거리며 말했다.

"인간들에게서 한 가지 귀여운 점을 찾자면 유독 소유욕이 많다는 거야. 남은 약재들은 다 가져가. 이 섬도 가지고 싶으면 가져. 네 당돌함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 하암~ 그럼 난 변한 캣들을 원래대로 돌리러 가봐야겠어. 빨간 꼬마야, 마저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그녀는 뿅- 하고 사라졌다.

얼떨떨했다. 그녀가 내게 남긴 건 산더미처럼 쌓인 약과 '섬' 이었다. 지구에서 용이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그건 당연히 용의 것이 된다. 태평양 한가운데의 섬이라도 마담의 것임을 모르는 자는 없기에 그녀가 내게 섬을 넘겼다면, 그 섬은 내 것이 되는 것이다.

뭐야? 뜬금없이 나 섬을 가지게 된 거야?

고양이들이 사라진 이 섬은 마담이 남겨놓은 편의 시설도 존재하니 가꾼다면 훌륭한 휴양지가 될 것이다. 세상에, 휴양지로 섬을 구매한 팝스타나 재벌은 많아도 서울시의 평범한 1인 청년 가구가 섬을 보유한 경우는 과연 몇이나 될까?

마담이 남긴 약도 약이다.

고양이들을 취하게 만든 약은 용도는 볼품없었어도 그래도 용의 마법이 담겨있다.

난 마담을 따라가는 원장님을 불러 세웠다.

"약, 얼마치 정도 될까요?"

"그거, 시중에 안 파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세계를 마약 전쟁터로 만들어 모든 법 집행기관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다면요."

마약,

그러고 보니 '안정을 불러일으킨다'라고 했지.

고양이들을 보면 그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물질인 것 같으니 인간에게 사용한다면 최상의 마약이 되겠지. 이게 다 마약이라면 졸지에 마약 왕이 되어버렸다.

이걸 어떻게 쓴담.

고민하던 찰나에 원장님이 말했다.

"약들은 모두 제가 가져가서 흥분한 마물을 진정시키는 마취제로 사용할 거예요. 괜찮죠? 다정 씨."

"아... 네. 뭐."

마음속에서 일말의 욕심이 생겼으나 이젠 더 이상 용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장님은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어....'

황당한 표정으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녀를 바라봤다.

"수고했어요."

그녀는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너무 따뜻하고 기분이 좋아 신음을 내뱉을 뻔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 어디선가... 난...

"그럼 다정 씨, 마담과 하던 이야기를 끝마치고 갈 테니 마물원으로 먼저 가있으세요."

그러며 원장님은 마담을 따라 사라졌다.

좋은 기분이 순식간에 달아난다.

홀로 섬에 남은 난 어떻게 마물원으로 돌아가라는 건지 생각하며 멀뚱멀뚱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

놀랍게도 그녀가 그 사실을 알아차린 건 3일이나 지난 뒤였다.

그것도 결국 내가 비상 알람벨을 누른 덕에 알아차린 것이다.

3일이나 출근을 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그러려니 했다고 한다.

구조당할 때 난 식중독과 고열로 몸을 가누지 못했고 원장님이 직접 집까지 옮겨다 줘야 했다. 젠장, 유급휴가만 아니었다면 용 앞이라도 정말 화를 냈을 거야.

##

벗겨진 세계, 바깥의 이면.

아무도 듣지 못하며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공간.

"어디서 저런 리미트 풀린 인간 놈을 주운 거냐?"

마담의 질문에 붉은 용, 파르바티가 대답했다.

"티아마트, 난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했어요. 만남은 우연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는 ... 더 신비로운 존재 같아요."

"조심해. 용의 눈을 보고 또박또박 말대꾸하는 녀석들은 대부분 용을 잡아먹는 사명을 타고났으니까."

"에이, 그 정돈 아니에요."

"그래,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그는 주제가 아니었다

두 용이 만난 이유는 아무도 들을 수 없도록 비밀스러운 차원에서 이루어질 만큼 중대했다.

"이제 내 제안에 대한 답을 들려주렴."

"괜찮습니다. 대지모신이시여."

"전이가 점점 커져가. 이제 확실히 위험한 놈들이 올 거고, 지구 차원도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되겠지."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또 다른 파멸을 불러올 뿐일테니까요."

"주술사, 네 선택은 존중하지만 다른 용들은 그러지 않아. 조심해. 넌 그들에게도 중요한 존재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