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쥐라기 공원 (1)
아라크네의 출산이 끝나고, 원장님은 알아볼 게 있다며 마물원을 꽤 오랫동안 비웠다.
그녀는 무척이나 바빴다. 할 일을 마치고 관리실에서 멍하니 있다 보면 일하는 원장님의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국을 넘어 세계로, 세계를 넘어 우주를 돌아다니며, 평범한 인간인 나로선 상상도 못 할 어떤 일들을 하고 계시는 듯했다. 원장님이 자주 강조하는 ‘시간이 금’이라는 얘기를 잘 알 것 같다.
그녀에게 있어서 정말 시간은 금보다 소중한 것이었다. 그녀가 용이든 아니든, 열정과 노력은 충분히 존경할 만했다.
난 단 한 번이라도 무언가에 열중한 적이 있었던가?
원장님이 따로 지시하지 않는 한 내가 하는 일은 시간 때우기에 지나지 않았다. 마츄 우리 청소는 일주일에 한 번, 잔뜩 쌓인 진흙 더미를 마법 청소기(용이 만든)로 빨아들이면 끝이었고, 사탕수수를 보충하거나 녀석들과 놀아 주는 게 일과다.
특별히 마츄들만 관리하는 건, 녀석들이 마물원의 첫 번째 공개 마물이어서였다. 관리 등급이 높은 마물들은 민간인들에게 개방할 수 없다.
원장님은 몇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으나 아직까진 특별한 손님들을 제외하곤 마츄가 적정선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특별 지시만 없다면 정말 꿀의, 아니 꿈의 직장이다.
원장님이 돌아오기 전까지 난 관리실에서 마물들의 상태나 지켜보며 월급 도둑질을 했다. 그녀가 관리실의 문을 연 건 2주나 지난 후였다. 퇴근 시간쯤 원장님이 돌아왔다.
“어… 음, 돌아오셨어요?”
그녀의 모습은 엉망이었다.
빨간 머리가 산발이 된 채 돌아온 그녀는 블라우스의 단추가 대부분 뜯겨 나가 아찔한 모습이었다. 스타킹은 찢어져 온 곳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고, 치마도 반쯤 찢어져 허벅지가 고스란히 보였다.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방은 비릿한 냄새로 가득해졌다. 이거, 피 냄새인가? 원장님의 모습은 충분히 자극적이었으나 난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원장님은 옷매무새를 정리하지도 않은 채 피곤한 표정으로 푹신한 소파에 누웠다.
“하아, 피곤해요.”
감히 누가 용을 피곤하게 만들었을까?
난 재빨리 그녀가 즐겨 마시는 에티오피아 산 원두로 내린 에스프레소를 대령했다. 원장님은 눈썹을 찡그리며 에스프레소를 홀짝였다(이상하게도 마실 때마다 써서 죽을 것 같단 표정을 지으면서도 항상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망할 복룡천주가 배신… 을 아니, 됐어요. 다정 씨는 몰라도 돼요.”
“네.”
뭔 일인가 물어보자 그녀는 에스프레소를 마실 때보다 더 얼굴을 찡그리고 짜증을 내며 ‘복룡천주’라는 자를 언급하다가 곧 귀찮은 듯 소파에 늘어지듯 몸을 맡겼다.
이제 더 이상 궁금해하면 안 된다. 용이 귀찮을 지경인데, 내가 굳이 알 필요는 없는 것이다.
퇴근 준비를 끝내고 야옹이와 포근이를 데리고 원장님에게 인사하자 잠이 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뜬 원장님은 내일 ‘마물원 개장’을 준비해야 하니 아침 일찍 출근하라고 당부했다.
“며칠 동안은 꽤나 고되실 테니 푹 자고 오세요. 하암~”
그녀의 말에 불길함을 느꼈다.
아라크네 출산 도우미보다 더 고된 일이 뭐가… 있지?
*
새벽녘에 출근하자마자 원장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뜸 돈 봉투를 건넸다.
지금까지 받았던 돈 봉투 중 가장 두껍고 탐스러웠다.
그리고 돈 봉투의 두께가 두꺼울수록 내 불안함은 더욱 커져 간다.
“큰 프로젝트를 하나 할 생각입니다.”
용이 ‘크다, 넓다, 많다’라는 단어를 언급하면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고양이를 많이 키우는데, 보러 갈래?’라고 말하면 그건 1억 마리 고양이가 있는 섬이며,
‘우리 마물원이 꽤 넓어요.’라고 말하면 고비 사막 규모의 마물 우리가 있는 마물원이고,
‘내가 만든 장난감이 꽤 크지.’라고 말하면 적어도 자유의 여신상 크기 정도는 된다는 뜻이다. 즉 원장님이 크다고 말했으니, 내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을 프로젝트라는 뜻이었다.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어떤 프로젝트입니까?”
그녀가 대답했다.
“사파리라고 아시죠? 놀이공원이나 동물원 등의 관람 프로그램이요.”
알다마다. 사파리란 수렵과 탐험을 뜻한다. 주로 놀이공원이나 동물원에서 아프리카 생태계를 재현한 곳을 관람차 등을 타고 돌아보는 것이나, 본격적인 사파리라고 하면 수렵, 탐험대를 편성하여 자동차에 안내인과 무기, 식량 등 대형 야생 짐승 수렵에 필요한 일체를 싣고 장기간에 걸쳐 하는 여행을 말한다.
원장님이 말하는 사파리는 놀이공원의 사파리를 말하는 것 같았다.
불안한 예감이 현실이 된다.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알면서도 모른 척해야 될 것 같았다. 그러자 그녀는 미소를 띠며 친절히 설명했다.
“마물을 인간들에게 보다 쉬이 접근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동물원을 많이 참조해 봤어요. 사파리 탐험처럼 거대한 우리를 투어하는 프로그램은 꽤 흥미로운 접근법이 될 것 같더군요.”
“흥미롭긴… 흥미롭겠죠.”
마물 우리를 사파리 탐험한다. 흥미롭지 않다면 이상하지.
“그래서 사타리언 공주 때처럼 본격적인 마물 우리 탐험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면 어떨까 해요. 이미 사바나 우리는 만들어 놨어요. 다정 씨가 예행 삼아 사파리를 돌아다니며 ‘적대적인’ 녀석들을 골라내 주세요. 내가 있으면 녀석들은 본색을 드러내지 않을 테고, 다정 씨 혼자라면 데이터가 부족하니 신청자를 지원받아서 다른 인간들하고 같이요!”
이해했다.
그녀는 내게 사파리 안내원이 돼 달라고 한다.
문제는 사파리 내의 마물이 사자나 호랑이처럼 순하고, 착하고, 귀엽고, 앙증맞은 녀석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원장님에게 물었다.
“원장님, 궁금하여 그러는데, 원장님이 준비하신 사바나엔 어떤 마물이 서식하고 있죠?”
아!
하지 마, 그런 표정!
원장은 대단히도 장난스러운 표정이 되어 눈을 반달로 만든 채 날 바라봤다.
“혹시 쥐라기 공원이라는 영화 아시나요?”
“알죠. 유명한 고전 영화잖아요.”
“그 영화 사실 실화임.”
농담인가?
아니다. 그녀는 장난기가 가득했으나 농담에서 나오는 장난이 아니었다.
친구라면 머리통을 한 대 툭 치겠지만, 그녀는 드래곤이자 상사이기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할 말을 고르고 있자 원장이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과 CG는 거짓이지만, 영화의 감독이 직접 공룡들을 체험한 건 사실이에요.”
“죄송해요. 차라리 농담이라면 대꾸라도 하겠으나 꽤 와닿는 이야기가 아니라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그 저명한 감독님이 사실 공룡들과 만난 적이 있다고요? 1억 년 전의 공룡들을?”
“네, 맞아요.”
아주 어릴 때 보았던 쥐라기 공원의 한 장면이 저절로 생각난다.
지프차를 뜯어 먹는 거대한 티라노사우루스.
당연히 상상의 산물이어야 했다.
그런데 원장님은 사실 그 공룡이 모두 실존한다고 했다.
물론 존재하긴 했을 것이다. 최소 1억 년보다 더 오래전의 지구에서.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죠?”
“20년 전 일어난 대전이, 사실 차원이 흔들릴 만큼 거대한 규모의 전이가 처음이었지, 지구에서 발생한 최초의 전이는 아니에요. 대전이의 전조로 아주 오래전부터 작은 전이가 수차례 발생했고, 감독은 전조의 전이에 휩쓸린 인간 중 한 명이었죠.”
뜬금없게도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되었다.
사실 잡탕찌개는 20년 전부터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원장님의 말에 따르면, 그 전에도 전이는 발생했으며, 아주 작은 규모라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라고 하였다. 믿을 수 없는 얘기다. 그녀가 말하길, 전이에 휩쓸린 인간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나 간혹 이변이 생겨 지구로 귀환하는 경우도 있단다.
“아직까지 잔존하고 있는 대부분의 신화는 귀환자들에 의해 각색된 것이죠.”
“세상에!”
“사실 그 감독이 만든 다른 영화 중에 ET…….”
됐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마음을 비우고, 머리도 비웠다.
놀라운 비밀이나, 아주 간신히 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문이 물꼬를 틀며 결국 진정하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잠시만요! 그럼 사파리 안의 마물은 공룡, 그러니 공룡은 마물이라는 거잖아요?”
그녀가 씩 웃는다.
“후후, 많은 걸 알려고 하지 마세요.”
이미 머릿속을 복잡하게 해 놓고 가르쳐 주지 않는다.
표정을 구기고 있자 미소 짓던 원장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 공룡에 대한 건 ‘용들의 실수’라서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한 가지 알려 주자면 지구의 고대 생물인 공룡과 지금의 공룡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생물이라는 것. 그리고 멸종되었을 공룡이 아직까지 존재하는 건 명백한 용의 오만이라는 것. 대신 사과드릴게요.”
사과를 받고자 한 건 아니다.
당황하며 손사래를 치자 원장님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주제로 돌아왔다.
“공룡은 사람에겐 꽤나 친숙한 마물이죠. 공룡 사파리가 성공하면 인식의 변화를 유도할 수 있을 거예요.”
“역시 원장님은 대단하시네요. 공룡의 생태계를 사바나로 재현하시다니.”
“아뇨, 내가 만든 게 아니에요.”
눈썹을 추어올리며 의문을 표시하자 원장님은 또 다른 놀라운 비밀을 알려 줬다. 평범한 시민이라면 결코 몰랐을 비밀을 연달아 들어 버렸다.
“전이로 인해 지구로 떠밀려 온 고대의 섬을 그대로 가져온 거예요.”
전이가 발생한 후, 지구에 일어난 큰 변화를 설명하는 여러 학설 중 ‘지구 확장론’이라는 것이 있다. 아직 근거가 부족하여 설(說)에 지나지 않는 지구 확장론은 전이가 발생할수록 지구 행성이 확장된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기에(그렇게 따지면 전이는?)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무시당하는 학설이었다.
그러나 용이 보장한다.
그러니 사실이라는 것이다.
원장님은 전이로 인해 지구로 들어온 건 이계의 존재들만이 있는 게 아니라며, 공간과 마나마저 전이하여 지구와 뒤섞이는 바람에 지구라는 차원 자체가 급격히 확장되고 있다고 하였다. 점점 가속도가 붙어, 못해도 몇십 년 만에 두 배는 넓어질 거란다.
“다정 씨, 용으로서 명예를 걸고 장담컨대 다정 씨라면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내일까지 신청자를 모집할 테니, 직접 면접을 봐 주세요. 그럼 파이팅!”
“파이팅!”
파이팅은 개뿔,
어리둥절할 뿐이었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
하루 동안 모집했으나 신청자는 수십 명으로 꽤 많았다.
일단 ‘헌터’이거나 ‘수상한’ 자는 다 걸렀다. 내가 통제할 수 있을 만한 지원자를 우선으로 모집하고, 원장님의 부탁대로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선발했다.
그렇게 면접까지 본 사람은 네 명.
첫 번째 신청인은 만화가였다. 그는 공룡 대모험이란 어린이 학습 만화를 집필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번 기회를 아주 소중히 여기며 증거를 보여 주겠다고 중생대 공룡 수백 마리의 이름을 내 앞에서 줄줄이 외우기도 했다. 또한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이곳을 알리는 만화를 무료로 배포하겠다고 한다. 그러한 것들과 별개로 마흔 중반의 뚱뚱한 남자가(편견일진 모르겠으나 만화가니까 체력도 허약하겠지) 공룡들이 돌아다니는 쥐라기 사파리를 버틸 수 있을까 궁금했으나 저 사람은 공룡 오타쿠다. 즉 세상에서 가장 공룡을 마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특히 원장님이 그를 마음에 들어 했다. 공룡 사파리가 본격적으로 개장된다면 그의 만화가로서의 명성이 마물원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좋아, 통과다.
두 번째 신청자는 어느 외국 대학의 지질학자였다. 중생대는 지질학자에게 있어 흥미로운 연구 대상인 듯했다. 신청서를 무슨 논문 쓰듯 빼곡히 채워, 읽고 해석하는 것도 힘들었다. 결국 원장님이 대신 읽고 그를 발탁했다.
깐깐해 보이는 얼굴에는 회색 수염이 자라나 있고, 도수가 높은 동그란 테의 안경을 쓴 외국인 교수는 전형적인 학자의 분위기를 풍겼다. 70살에 가까운 남자는 그 나이대에 비하여 정정했으나 사파리는 분명 노인에게 체력적으로 많이 고될 것이다. 하지만 원장님은 학자인 그가 제 논문을 쓸 때, 마물원에 대하여 좋은 견해의 주석을 달아 주길 바랐다.
만화가와 교수는 원장님이 뽑은 신청자다. 결국 사파리의 목적은 마물원을 좋은 시각으로 알리는 것이니, 그 둘은 좋은 교두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신청인은 대학에서 실습차 나온 여대생이었다. 좋아, 통과.
네 번째 신청인은 어처구니없는 동기를 가진 젊은 남자였다. 백수인데 커뮤니티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마물원 사이트를 발견하고, 기분 전환 겸 신청했다고 한다. 왠지 동질감이 느껴지는 녀석이다. 많은 지원자 중 난 그를 뽑았다.
하루 종일 컴퓨터와 게임만 하는 지루한 현실 속에서, 상상을 아득히 초월한 사파리로부터 무언가를 깨달음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백수 구제의 의미로 그를 마지막 동행인으로 결정했다.
그렇게 ‘쥐라기 공원 탐험대’가 결성됐다.
출발을 앞두고 네 명의 지원자에게 안전 계약서를 작성시키고(그 누가 감히 드래곤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겠냐만), 보호 장비를 착용시켰다. 그동안 난 원장님으로부터 사파리를 위한 자원을 지급받았다.
“이게 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