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내가 만만하냐
이제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다.
다정은 남자의 배낭을 뺏었다. 그 안엔 예상대로 아직 작은(티라노사우루스의 덩치에 비한다면) 알이 있었다.
다정은 소중히 알을 품으며 차에서 나왔다. 티라노사우루스가 마취로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다정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 입에 먹힐 만큼 가까워졌으나 티라노사우루스는 공격해 오지 않았다.
그저 다정의 손에 들린 알을 조심스레, 부드럽게 물고 다리를 절룩거리며 숲을 향해 사라졌다.
“후우.”
티라노사우루스는 사라졌다.
그러나 다정의 눈은 여전히 공포스러운 폭군의 눈빛이다.
그는 뒤돌아 다시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지독한 공포로 남자는 움직이지 못했다.
사실 다정이 그의 다리를 부러트린 건, 나름의 이유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백수인 척 위장하고 사파리 투어에 신청한 남자,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을까?
그렇다면 자신이 어떻게 뽑힐지 알았지? 의문스러운 점은 많았으나, 확실한 건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과 티렉스의 눈을 피해 알을 훔쳤다. 다정은 그 짧은 시간에 알을 훔칠 수 있었던 건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인간, 즉 남자가 능력자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다정의 예상은 맞았다.
그는 육체 능력, 특히 민첩성이 발달한 5등급 능력자였다. 또한 ‘마나의 성질’로 주변의 환경에 맞추어 자신의 몸을 은폐시킬 수 있다. 다정이 동굴에서 티렉스와 대치할 때, 남자는 이미 동굴 안에서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티렉스가 잠들고 나선 알을 훔쳤고, 다시 차로 돌아왔다. 원래는 다정보다 더 빠르게 복귀할 생각이었으나, 야옹이와 교감하며 능력자만큼 민첩해진 다정의 뜀박질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고, 약간 늦어지고 말았다.
또한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게 하나가 더 있다.
바로 티라노사우루스의 모성애와 집착이었다.
인간이 공룡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그들이 무슨 생각과 감정으로 살아가는지는 알지 못한다. 폭군 티라노사우루스가 흉포한 성질 외에도, 그 어떤 공룡보다 깊은 모성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당연히 알지 못했다.
“야.”
다정의 섬뜩했던 눈은 돌아왔으나, 살기는 여전했다.
“개새끼야.”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으나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불가능했다.
‘사실대로 말해야 돼.’
남자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내 날아온 주먹에 턱을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커억!
다리를 부수던 괴력은 없지만 다정의 손길은 충분히 매서웠다.
“이게 진짜 쥐라기 공원인 줄 아나, 씹새끼가.”
한 대, 두 대.
“영화에서나 보던 암 유발자를 실제로 마주하네. 뭣 때문이냐? 가져다가 팔려고? 호기심에? 아니, 애초부터 목적이 그거였냐? 능력을 숨기고 지원했지? 젠장, 말해! 내가 널 뽑았는데 어떻게 숨길 수 있었지?”
백수는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두들겨 패던 다정은 그가 축 늘어지며 기절하자 그제야 심호흡을 하며 진정했다.
티라노사우루스도 그렇지만, 놈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죽을 뻔했다.
다정은 그를 묶어 둘 도구를 찾다가, 문득 깨닫곤 입을 벌려 거미줄을 토해 냈다.
똥구멍으로 쏟아 낼까도 잠시 생각했으나 그건 개인적인 수치심도 유발함으로 봐주기로 한 다정이다.
안전지대에 도착할 즈음에, 남자가 정신을 차렸다.
굉장히 질긴 아라크네의 거미줄에 둘둘 묶인 남자는 발버둥을 치나 꼼짝할 수 없었다.
흡-!
다정은 그가 깨어나자 손을 들었다.
때리려는 줄 알고 남자는 숨을 들이켜며 표정을 경직시켰다.
하지만 다정은 그저 남자의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내게 관대한 처분을 기대하지는 마.”
위로였다.
“널 용에게 맡길 거야.”
어쩌면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뉴스나 신문 같은 여러 미디어 매체에서 너도 봤을 거 아니야? 떠올려 봐.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 한 도둑에게 용이 어떤 벌을 내렸는지, 얼마만큼 무서웠는지, 드래곤이란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켰던 그 사건들을 떠올려 보란 말이야. 그래, 네가 잔혹한 뉴스의 당사자가 된 거야. 미련한 새끼야.”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백수는 죽지 않았다. 원장님은 그를 상대로 아주 많은 걸… 한 모양이지만, 일단 죽지는 않았다.
사파리에서 돌아온 지 며칠 후, 교수가 편지를 보내왔다. 지인 학자들과 가져온 자료를 바탕으로 중생대의 생태에 대하여 토론했는데, 기존의 관용화 된 지질학적 근거를 완전히 뒤집을 만큼 학술적 가치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러며 자신은 유럽 대학 쪽으로 이직하였고, 마물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지성인들이 늘어나 지대한 집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사파리는 폐쇄 결정이 났다.
악동 공룡과 거대 벌레의 문제가 아닌 듯싶었다.
그녀에게 ‘브라키오사우루스’에 대해서 들려주었으나 웃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예상컨대 사파리 폐쇄의 직접적인 이유일 것이다.
사파리 투어가 끝나고 며칠 동안 평안한 삶을 지냈다.
하지만 어딘가 다녀온 원장님은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녀의 제안을 듣던 난 지금, 일생일대의 기로에 섰다는 걸 깨달았다.
*
단절된 차원, 어두컴컴하고 불쾌한 상자의 안.
그곳에 붉은 비늘을 가진 드래곤과 한 명의 인간이 있다.
“놀랬어요.”
드래곤이 말한다.
“설마 용의 시선을 피할 수 있다니, 드워프의 도움이라도 받은 걸까요?”
인간의 모습이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서 있었으나 그의 의지로 서 있는 게 아니다. 무형의 기운에 의해 공중에 묶인 것이다. 겉으론 상처가 없으나 속은 녹아내리고 있었다. 연신 피를 토해 내나 죽지 않는다. 용이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드래곤에 의해 심문을 당하고 있었다.
“사소한 소동을 일으킬 ‘미끼’를 심어 두고, 자신은 뒤에서 마나를 감추고 차원의 이음쇠를 관찰한다라, 그래서 찾긴 찾았어요? 호호호. 건방진 수가 통할 것 같던가요?”
남자는 번뜩 눈을 뜨며 용을 바라봤다.
그는 사파리 투어에 참가하며 고대의 섬을 스케치하던, 공룡에 대해 자세히 ‘아는 척’하며 연기했던, 만화가라는 위장 직업을 가진 ‘교섭꾼’이었다. 그는 검은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해결사다.
세간에 이름과 얼굴이 알려지진 않았으나 암흑 세력에선 유명했다. 잔심부름을 하는 해결사치곤 마나의 등급이 3등급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명성에는 탐사와 분석에 특화된 능력도 한몫했다.
그는 가장 유명한 탐사꾼 중에 한 명이었다.
자신은 절대 들키지 않는다.
무림인들의 비급서를 처음 훔쳐 낸 것도 자신이었다.
그럼으로 처음 의뢰를 받았을 때, 용의 둥지를 조사하는 만용스러운 임무를 수행하기로 한 건 스스로 전설이 되고자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어떤 과정과 수단이든 용을 골탕 먹인 건 업계의 최고를 의미했다.
하지만 결과는 지금처럼 참혹했다.
자신의 능력은 용에겐 통하지 않았다.
우습게도, 드래곤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모른 척하며 사태를 주시했다.
‘정말 무시무시한 생물.’
3급의 마나,
이계인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힘.
그러나 너무나 무력했다. 비유하자면 용은 겨우 눈꺼풀을 뜰 정도의 힘으로 자신을 제압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다. 업계의 수치가 되더라도 필사적으로 목숨을 살려 달라 간청할 수밖에.
“위대하신 분이시여.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건 저의 잘못이나, 누군가의 의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자는 비밀스러운 단체의 수장이며 저명한 헌터이기도 합니다.”
남자의 말에 드래곤은 곤란한 듯 뺨을 긁적였다.
“흐음, 얕보고 있는 건가? 저기요, 제가 만만하세요?”
어떤 의도일까,
생각해 보나 알 수 없다.
남자는 당황하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감히 위대하신 분을 어느 누가 그렇게 생각하겠습니까?”
“그런데 헌터라니요? 헌터라니, 헌터라니! 아하하.”
드래곤의 박장대소에 남자는 얼이 빠진 채 바라만 봤다.
그녀는 붉은 비늘이 들썩일 정도로 웃었다.
“사람들은 참 신기해요. 전이 때문에 가장 걱정했던 건 지구의 토착민들이었거든요. 많은 사례로 보건대 마나가 균등하게 나눠지지 않은 세계에, 마나를 가진 자들이 침입하면 멸망만이 도래하죠. 그래서 ‘이미’ 마나를 가지고 있던 자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죽을 거라 생각했어요. 40억 명 정도는 1년 만에 죽을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뒤섞인 차원과 같이 흘러들어온 마나를 순식간에 제 것으로 받아들이더니 용도 예상하지 못할 기괴한 능력들을 각성하고, 아하하하. 이젠 귀엽게도 헌터니 뭐니, 전이의 결과를 모두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날뛰며, 모든 걸 삼키려 들잖아요? 이 어찌 욕망스러운 생물인지! 이제 그 욕망이 드래곤에게까지 향해 있어! 조짐이 있었지만, 이리 빨리 날 방해하려 들 줄이야! 아하하, 역시 인간은 재밌어.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인간을 저리 판단할 수 있는 아득한 존재에 남자는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
“좋아요. 의뢰인을 말하면 살려는 드릴게.”
희소식.
남자는 재빨리 말했다.
“그는 솔로몬의 탑, 운명을 옹호하는 자들 중에 한 명, 이름은 모르나 세례명은…….”
남자의 머리는 터졌다.
드래곤은 비늘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시시한 표정으로 말했다.
‘용을 상대로 이런 귀찮고 의미 없는 짓거리까지 한다라.’
“거기, 듣고 있는 거 알아. 요새 좀 풀어 줬더니 무서운 줄 모르고 기어오르는군. 좋아, 불가침 조약은 파기다. 네 녀석의 오만으로 헛된 소원을 쫓는 가련한 등자(登者)들은 이제 나와 완전히 척지게 되었다.
이제부터 좀 바빠질 테니까 혹시라도 날 방해하거나, 내 눈에 띈다면 썩은 오물보다 못한 너네들은 지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거야. 그래, 너네들 좆 된 거야. 새끼들아.”
용족의 주술사, 레드 드래곤 파르바티.
그녀는 온화했으나 이는 만들어진 성질이었다.
본래 레드 드래곤은 화산처럼 폭발하는 성질을 지녔다.
결코 그녀는 온화하지 않다.(다정은 은연중에 그 사실을 깨닫고, 원장이 아무리 잘해 줘도 일정 선을 지켰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녀의 성질 머리를 건드렸다.
파르바티는 이렇게 생각했다.
덩달아 죄 없는 자들도 휘말리게 되겠지만, 알 바야?
그녀는 이제부터 목적을 위해 보다 과격한 수단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
며칠 동안 보이지 않던 원장님이 퇴근 시간이 다 되어 갈 때쯤, 마물원으로 돌아왔다.
‘무서워라.’
원장님은 상기된 표정, 아니 잔뜩 날이 선 표정이었다.
눈치를 잘 살핀다는 건 비겁할 수도 있으나, 처세술이 좋다는 것이다.
원장님이 돌아오면 사파리 투어 건에 대한 성과금을 논의해 볼까 생각하던 난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녀는 커피 머신에서 에스프레소를 연달아 네 잔을 뽑아 먹다가 대뜸 날 불렀다.
“다정 씨.”
문제는 하나다.
그녀의 심기를 거스른 게 나였던 건가?
아니다. 난 잘못한 게 없다. 겨우 비품실에 구비된 믹스 커피 한 박스를 몰래 집에 들고 갔다고 하여 저렇게 화를 내진 않는다. 그녀는 깐깐한 직장 상사가 아니라 온화한 드래곤이다. 아니 잠깐, 후자가 더 위험하지 않나?
떳떳하자.
“네, 원장님.”
그러나 평소보다 더 공손했다. 저절로 예의가 묻어나왔다.
당연한 행동이다. 그녀가 드래곤이 아니더라도 직장 상사가 기분이 나쁘면 알아서 맞출 줄 알아야 한다. 물론 나 같은 경우엔 직장 상사라기보다 드래곤이기 때문에 이러는 거지만.
“이번 사파리 일, 고생 많으셨어요. 제가 미처 똥파리들을 거르지 못했잖아요. 무탈하게 처리해 줘서 고맙게 생각해요.”
날 대하는 원장님의 표정은 많이 풀린 모습이었다.
나 때문에 화난 게 아니구나.
“아이고, 뭘요. 비싼 월급을 받아먹는데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그녀를 불쾌하게 만든 게 누구인지 정말 ‘좆 됐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니라 다행이지.
원장님은 단순히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날 부른 게 아니었다.
“다정 씨가 일한 지도 반년이 넘었네요.”
“초겨울에 입사했으니까… 와, 벌써 그렇게 됐네요.”
5개월 반, 신기록이다.
난 한 직장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마물원도 마찬가지로 금방 그만둘 것 같았지.
용이 상사라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마물원의 일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처음엔 돈, 오로지 돈만을 바라보며 지내 왔고(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지금은 이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즐거워졌다. 때론 힘들지만 신나기도 하고. 나쁘지 않다. 내 힘을 사용하고, 인정받으며 돈을 벌다니 어쩌면 최고의 직장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참 빠르게도 흘러갔네.
워낙 기괴하고 독특한 일들에 휩쓸리다 보니, 이리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마츄들과 만나고, 일한 지 이틀 만에 늪에 빠져 죽을 뻔하여 교감이 가진 새로운 능력을 깨닫게 되었지.
그 후로 교감을 이용하여 다양한 마물들에 대해서 알아 가고, 마물이 흉포하고 잔인하기만 한 몬스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약간은 동정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뱀파이어나 사타리언처럼 지구에 융화된 이계인들도 만나고 ‘캣 맘’처럼 상식과 이지조차 뛰어넘는 존재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마물들도 생물과 다를 바 없이 감정을 느낀다는 것도 알았다.
사파리 투어의 백수 녀석처럼 마물들을 노리는 헌터들도 만났다. 지금까지 나열한 것만 해도 원래의 삶이었다면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 하는 특별한 경험, 6개월 동안 겪은 경험은 분명 27년 인생보다 더 급박한 롤러코스터였다.
스스로 이런 모험을 즐기는 성격인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이제 어떤 경험들을 할지, 정말 기대된다. 다음엔 작아지는 스쿨버스를 타고 거인 나라에…….
“승진해야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