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훔바바다
“마물 관리요?”
마물을 관리해 달라, 마츄처럼 쉬운 마물은 아니겠지. 원장님은 내게 점점 더 빡센 마물들을 맡겼으니까.
“어떤 일인가요?”
“매뉴얼에 ‘훔바바다’라고 검색해 봐요.”
“Hum…….”
“한글로 치셔도 돼요.”
마물의 이름은 훔바바다.
매뉴얼에 나온 정보는 이러했다.
[훔바바다]
크기: 몸길이 1.8m~2.2m, 꼬리 길이 2m 몸무게: 200kg ~ 600kg(개체마다 크게 다르다.)
서식 장소 : 울창한 숲
먹이: 잡식이나 과일을 선호함.
관리 난이도 : ? [데이터가 부족하다.]
삼나무 숲의 마물이다. 생김새는 침팬지와 비슷하나 제 키만큼 기다란 꼬리를 가졌고, 발톱이 새의 발톱으로 되어 있다. 습성도 지구의 원숭이과와 비슷하다.
성격은 온순한 편이나 배타적인 성격이 강하다. 최근에 그들 무리와 어울리는 방법을 발견했으나, 드래곤의 위엄을 심히 훼손하는 행위이므로 난 차마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의 가디언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요?”
“네! 다정 씨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용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랍니다!”
훔바바다.
처음 보는 마물이다. 마물원뿐만 아니라 지구에서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원장님의 말에 따르면 전이에 휩쓸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마물이며, 마물원에 환경을 조성한 것도 최근의 일이라고 하였다.
녀석들이 원래 살던 세계는 차원이 붕괴하여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원장님은 훔바바다들이 특별한 소동은 없지만, 내가 같이 지내며 환경에 잘 적응하는지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다.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네요. 며칠 동안 같이 지내면 되나요?”
헌터들과 싸우는 것에 비하면 쉬운 일로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이어진 말에 난 안 좋은 예감 느꼈다.
“별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삼 일이면 충분해요. 하지만 다정 씨, 녀석들은 저에게도 똥을 던질 만큼 상당히 배타적인 녀석들이거든요. 지낼 동안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훔바바다’로서 생활해 주세요.”
“훔바바다로요? 어떻게요?”
웃는다.
저 표정, 어디선가 본 적 있다.
그래, 내가 캣 맘에게 대들었을 때. 그녀는 무척 재밌어 하며 웃었지.
“가르쳐 드릴게요.”
그녀는 우선 옷부터 벗으라고 하였다.
*
해방감.
자유로움.
“타잔도 거적때기는 걸쳤는데…….”
이곳은 훔바바다의 숲.
원장님이 조성한 인공 환경 중 ‘숲’을 배경으로 한 우리의 한곳이다.
당연히 이곳에 사람은 없다.
하지만 난 당당히 허리를 필 수 없었다. 27년간 옷을 입고 살았다.
이처럼 헐벗고 돌아다닌 건 내 기억으론 없다. 적어도 가장 오래된 기억에도 난 기저귀는 차고 있었으니까.
가랑이 사이가 시원하니 조금 상쾌한 것 같긴 하지만, 아래가 휑한 느낌은 영 불쾌하다.
“원장님, 전 안 되겠어요.”
결국 가지고 온 수건을 허리에 둘렀다. 원장님의 말로는 알몸인 상태가 훔바바다들과 교감을 나누기 수월하다며, 되도록 알몸으로 녀석들과 만나 달라고 했다. 하지만 마물이라고 하더라도 맨몸으로 만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젠장, 어떤 놈들이기에 이리 까탈스러워?”
수건을 둘렀어도 알몸과 다름없다. 아래가 뚫린 터라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시원함에 몸서리가 처졌다.
“이쯤인가?”
훔바바다를 찾기 위해 숲을 돌아다녔다. 알몸이 익숙해질 때쯤, 어느덧 훔바바다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었다.
냐앙!
야옹이가 나무 곁에서 그루밍을 하며 날 부른다. 나무에 다가가자 검은 고양이는 손톱으로 나무에 스크래치를 하더니 내 발치로 걸어왔다.
“위는 쳐다보지 마, 야옹아. 뱀 한 마리가 있을 거거든.”
발등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야옹이를 쓰다듬어 주고 나무를 자세히 살폈다.
“여기가 녀석들의 집이구나.”
나무엔 원장님이 말했던 ‘훔바바다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 이 근처에 녀석들이 있겠지.
이미 날 지켜보고 있을지도 몰라.
“야옹아.”
혹시 모를 일이다. 난 야옹이에게 힘을 빌렸다. 녀석은 앞다리를 쭉 내밀며 하품을 하더니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좋아.’
날카로워지는 감각.
조금 전까지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무 위, 무언가가 있어.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훔바바다들이 배타적이며 경계심이 많아도 야옹이는 상관없었다.
포근이는 훔바바다들의 경계심을 돋우기에 데려오지 못했다.
하지만 야옹이는 괜찮았다.
아무래도 녀석은 ‘존재감’이 없는 듯하다. 원장님 말로는 생명의 순환에 약간 어긋난 존재라나?
그러니까 먹는 음식이 없는 대신, 잡아먹히거나 하는 일도 없다. 마물들이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다고 하였다.
‘마츄와 비슷한 녀석들이야. 다만 좀 더 적대적이군.’
교감으로 인하여 녀석들의 불편한 심기를 읽을 수 있었다.
침입자인 날 무척이나 경계한다.
비교적 순한 편이라고 했지만, ‘비교적’이라는 게 다른 2m의 마물들과 비교하여 나온 결과다.
확실히 느껴진다.
내가 조금 더 녀석들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면 공격해 올 것이다.
“진짜 이런 일까지 해야 될 줄은 몰랐어.”
새삼 같은 말을 또 내뱉는 것 같지만 이번엔 진짜 예상하지 못했다. 헌터들과 싸우는 것? 기괴한 마물들과 교감하는 것? 이해한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것에 비하면 적어도 ‘존엄성’에 훼손을 가하진 않으니까.
“후우…….”
원장님이 차마 하지 못했던 일,
그러면서 내게 시켰던 일.
난 수치스러움을 참아내며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엉덩이를 추켜올리기 시작했다.
복종의 표시다.
원숭이의 습성을 가진 훔바바다다. 녀석들의 사회에서 ‘싸움’은 질서만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분쟁을 해결하는 행위이자 친밀감의 표시이기도 했다.
‘고전’ 소설 중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가가 쓴 글이 생각났다.
소설 속의 여주인공은 원숭이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 엉덩이를 추켜올렸지.
그나마 그 사람이 낫다.
적어도 나처럼 알몸인 상태는 아니지 않는가?
점점 더 허리를 숙인다.
녀석들이 잘 보도록.
우습게도 난 수컷이나, 녀석들에게 성별은 중요치 않은가 보다.
마침내.
구멍이 녀석들의 시선과 마주치려고 할 때,
“안 해. 못 해. 진짜 아니야.”
결국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교감, 좋다. 원장님의 명령, 좋다 이거야.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간의 존엄성은 충분히 지킬 가치가 있다. 난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되지는 못할지언정, 맨 엉덩이를 추켜올리는 수치스러운 남자는 되진 않겠다.
대신 고개만 조신하게 숙여 보였다.
한차례 인사가 끝났다.
이제 녀석들이 받아 주는가, 아닌가의 문제.
침묵이 감도는 숲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끼끽!
끼끼끼-!
원숭이의 울음소리 같은 훔바바다의 외침이 들려온다. 이내 다른 훔바바다들도 동조하며 숲은 녀석들이 내지르는 외침으로 가득해졌다.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난 교감의 끈을 살짝 던졌고, 녀석들은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새로운 녀석!]
[새로운 녀석!]
[우리, 낯선 세계. 힘, 기른다!]
[기른다!]
[무리로 들어와라.]
[받아 준다.]
[새로운 세계, 낯선 세계, 무리를 키운다.]
다행히 날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 정말 안심이 되었다. 만약 거부당한다면 꼼짝없이 엉덩이를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추켜올릴 뻔했으니까.
냐앙!
야옹이가 마치 위로라도 하는 모양새로 내 등을 두들겨 줬다.
*
일단 무리원으로 받아들여지자 같이 생활하는 것은 무리가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녀석들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을 테지만, 야옹이의 힘을 빌려 무난히 무리 이동을 따라갈 수 있었다.
교감을 나누며(너무 깊게 교감을 하지는 않았다. 단지 신호를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이면 충분했다.) 녀석들을 관찰했다.
낯선 세계를 두려워했으나 적응엔 문제가 없었다. 원장님이 만든 우리의 환경은 녀석들이 원래 지내던 환경과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이곳에 훔바바다들만이 있는 게 아니라 녀석들의 ‘천적’들도 있었다. 새로 태어나는 어린 새끼들과 천적에게 잡아먹히는 훔바바다들을 관찰해 보니, 자연의 순환은 절묘하게 지켜지고 있는 것 같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 되던 날.
녀석들과 같이 사냥을 나가고 음식을 먹었다. 경계심이 많은 훔바바다였지만, 일단 무리로 인정받자 상당히 친밀하게 굴었다.
난 완전한 ‘훔바바다’가 되어 생활했다. 서로의 털을 골라 주기도 하고, 천적과 맞서 싸우며 음식을 찾아다녔다.
야생에서 지내니 첫날처럼 맨몸이기에 느끼는 시원함이 더 이상 이질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수건도 벗어둔 채 마음껏 돌아다녔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며 자연의 순환에 몸을 맡긴다. 위험과 배고픔도 있다. 하지만 자유롭고 상쾌하다.
3일째 되던 날, 녀석들이 잘 적응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때마침 짝짓기 철, 그러니까 발정기가 찾아왔다.
‘알아봐 두는 게 좋겠지.’
무엇보다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기 위해선 먹이와 생존뿐만 아니라 생식도 중요하다.
난 마지막 사항까지 확인하기 위해 잠시 구경이나 해 보기로 했다.
[새끼! 새끼!]
물론 녀석들이 진짜 새끼라고 외치지는 않는다. 다만 언뜻 처절하게 들리는 울음소리에는 그러한 뜻이 담겨 있었다.
“흥미로운데.”
훔바바다들의 발정기는 몹시 신기했다. 마물임에도 불구하고 동물들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수컷들이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건 똑같다. 그러나 암컷은 단 한 마리뿐이었으며, 대충 뜻하기로 유일한 암컷은 훔바바다들 사이에서 ‘공주’라 불렸다.
훔바바다들은 공주를 차지하기 위해서 싸웠다. 하지만 난폭한 방법이 아니다. 녀석들 나름대로 규칙이 있었다.
“1 대 1 승부인가? 토너먼트식이라니, 짜식들. 낭만을 아네.”
공주를 차지하기 위해서 수컷들은 ‘최후의 1인’이 되고자 했다. 서로 힘을 겨루며 한 녀석이 항복하거나 중상을 입으면, 이긴 자가 올라간다.
놀라운 건 무작위로 싸우는 게 아니라 이긴 자에겐 휴식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토너먼트가 따로 없다.
이기고, 이기고, 이기다 보면 결국 최후의 1명이 정해지고, 그자가 공주라고 불리는 유일한 성체 암컷을 차지하게 되는 거겠지.
한참을 구경하던 그때였다.
모든 싸움이 한차례씩 끝났다.
그러나 열띤 열기는 가시지 않는다.
“응?”
다들 날 쳐다본다.
난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최대한 교감으로 내 의지를 피력했다.
[난 상관없어. 너희 해.]
[안 돼. 모든 수컷이 참가해야 해! 새끼! 새끼!]
[새끼! 새끼!]
이것도 그들만의 룰인가.
수컷들이 흉흉한 눈빛으로 날 잡아먹을 듯 쳐다본다.
‘도망가야겠군.’
충분히 잘 적응하고 있다.
이제 원장님에게 돌아가서 보고만 하면 끝, 내가 굳이 훔바바다의 공주를 차지하기 위해 싸울 필요는 전혀 없다.
슬며시 일어나 뒷걸음질 치던 그때였다.
[넌 겁쟁이다. 거기도 작다.]
…….
뭐?
*
[작다! 작다! 작다! 작다!]
수십 마리의 수컷들이 모두 같은 말을 외친다. 비난과 약올림의 대상은 나였다.
녀석들이 마물치곤 꽤 언어 체계가 발달한 건 알았으나, 이런 짓까지 하다니.
아무리 교감의 힘이 마물의 속마음까지 이해한다고 해도, 세상 이런 일을 다 겪어 보네.
“작아? 이 새끼들아? 내가 작아?”
인간은 덩치에 비하여 포유류 중 가장 크다.
하지만 녀석들은 내 말에 모두 일제히 허리를 내밀었다.
“아, 젠장. 망할 새끼들.”
패배다.
약이 오른다.
너무 무시당한다.
녀석들은 마물치고 남자의 자존심을 짓밟는 법을 상당히 잘 알고 있다.
도망치고자 했다.
하지만 작다고 마물들에게 놀림 받으며, 도망치는 꼴은 그야말로 추한 패배자가 아니던가?
“그래, 함 뜨자.”
결국 분을 이기지 못했다.
냥!
야옹이가 응원이라도 하듯 힘을 빌려 준다.
좋아, 새끼들아.
옛말에 작은 고추가 더 맵다고 했다.
한번 보여 줘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