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모르모트 (3)
그날 저녁, 밥은 컵라면으로 대충 때우고(호주산 통조림 음식은 내 입에 맞지 않았다.), 릭스틴 연구소 회의에 참석했다. 다니엘 소장이 꼭 만나 보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난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당하고만 있을까? 다음번엔 포근이의 힘을 빌려 놈을 두들겨 패 줄 생각이다.
하지만 우선 가장 큰 목적은 치료제의 개발이었다. 일단 연구소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야겠지.
아홉 명의 연구소 직원들,
의사도 있고, 과학자도 있다.
하지만 책임자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다니엘 연구소장은 릭스틴 연구소를 대표하나 이번 백신 치료제에 대한 총괄 책임자는 아니었다.
소장이 만나 보라는 사람은 총괄 책임자였다. 듣기론 무척 저명한 학자이자, 마물 생리학의 권위자라고 한다.
“늦는군. 오스틴, 그녀에게 회의 시간을 알려 주긴 했나?”
“흥, 그년이 회의에 늦는 게 하루 이틀입니까? 저번처럼 똥통에 자빠져 자고 있겠지.”
“손님 앞일세. 말을 가려서 해.”
‘부하 직원의 불평이 많네. 대놓고 욕을 하다니, 무능한 책임자구나.’
30분이 지나도 ‘책임자’라는 양반은 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 없이 회의는 진행되었으나, 난 책상에 앉아 멀뚱멀뚱 지켜만 봐야 했다. c-023 원소니, 파라코늄제 배합이니 뭔 소리람?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겠다.
회의는 같은 주제로 계속 맴돌고 있다. 문외한인 내가 봐도 그들의 상황이 막막하다는 사실을 알 것 같았다.
“후우. 오스틴, 그녀를 데리고 오게.”
“제가 그녀 전담 심부름꾼이라도 됩니까?”
“어쩔 수 없잖은가. 그녀만큼 백신에 대해 잘 아는 자가 없으니.”
오스틴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여자를 업고 나타났다.
‘으음, 상상과 다른데.’
철퍼덕 소리가 날 만큼 거칠게 여자를 내팽개친 오스틴은 성난 얼굴로 자리로 돌아왔다.
그 덕에 여자는 정신을 차리고 부스스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난다.
첫인상은 솔직히 말해서, 내 안의 페티쉬적인 무언가를 대단히 자극했다.
검정 스타킹,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 무방비함, 삐딱한 안경, 약간 녹색 빛이 감도는 검은 곱슬머리와 앵글로 색슨족의 특징인 장신의 키, 좁고 큰 코.
천천히 일어나는 그녀가 묘하게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엉?”
일어나던 그녀는 반쯤 풀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날 보며 인상을 썼다.
“아, 안녕하세요.”
가까이 다가갈수록 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으나, 내 시선은 자꾸만 그녀의 뜯겨진 앞단추 사이로 향했다.
‘앞섶이 다 뜯겼잖아.’
난 조금은 두근거리며 어색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우당탕탕 뛰어오더니, 날 와락 안았다.
“이상해. 당신에게서 좋은 냄새가 나는군.”
킁킁-!
아예 목에 코를 박고 킁킁거린다. 여기까지라면, 나름 에로틱한 해프닝이겠지.
할짝거린다.
내 목에다가 대고 할짝거린다.
“올리비아! 뭐 하는 짓인가!”
“이 미친 여자가, 진짜!”
다니엘과 오스틴, 그리고 주변의 연구원들이 당황하며 달려왔지만, 난 손을 들어 제지했다.
“괜찮습니다.”
솔직히 이 기분, 나쁘지 않거든.
난 천천히 그녀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그녀는 날 보며 활짝 웃더니, 이내 다시 혀를 내밀었다.
“이제 그만!”
더 이상 진행하면 곤란하다.
“만나자마자 왜 이래요? 이게 그 외국 나라의 정열인가, 뭣인가인가?”
올리비아라는 여자, 내 말에 갑자기 정색하며 말한다.
“아니, 난 당신이 좋은 게 아니야.”
그러더니 다가와, 내 발 아래로 향했다. 하체가 나도 모르게 움찔거렸으나 그녀는 내가 아닌, 발아래서 자고 있던 포근이에게로 향했다.
“아하하, 요 녀석이었구나! 어쩐지 인간에게서 귀여움이 느껴지더니, 요 녀석 짓이었구먼!”
그녀는 또다시 혀를 내밀었다.
이제 내가 아닌 포근이를 핥는다.
녀석은 당황하며 벌떡 일어났으나 올리비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위험… 해야 하는데, 뭐지?”
샐러맨더의 기운은 공격적이진 않아도 보통 인간에겐 불과 같다. 저렇게 혀를 대면 활활 타는 불씨를 삼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바동거리는 포근이를 무참히 대하는 올리비아에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난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도 능력자구나.’
어떤 능력인진 몰라도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야.
한참 포근이의 귀여움을 느끼던 올리비아는 결국 포근이의 앞발차기에 맞아 기절하고 말았다.
*
올리비아는 마물 생리학과 병리학에 있어 가장 저명한 박사였다.
그녀의 명성은 그녀의 능력에 기인하는데 다니엘 소장의 말에 따르면, 마물의 마나를 맛볼 수 있단다.
형편없는 능력 같지만 올리비아는 자신의 능력을 숙련시켜서, 마물마다 느껴지는 맛으로 마나의 형질과 담긴 힘을 분석하는 그녀만의 분석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한다.
대단히 괴상한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마물과 프리 토킹이 가능한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올리비아 박사는 이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자이자 릭스틴 연구소의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다니엘 소장은 올리비아가 홀로 백신 개발의 70%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고 했다.
‘이미 백신의 토대는 만들어졌다면…….’
백신은 있었다. 반쪽짜리 백신이.
다만 환자들에게 임상 실험을 할 수 없으며 일반 병리학과 궤를 달리하기에, ‘확실한 백신’을 만들지 못해 이상 진척이 없다고 한다.
‘언제 깨어나려나?’
올리비아가 뒤척일 때마다 짧은 검정 치마가 올라갔다. 아슬아슬하다. 제발, 한 번만 더 뒤척이면…….
“에휴.”
윗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 줬다.
지금 난 그녀와 단둘이 있다.
올리비아는 포근이에게 맞고 기절했다. 지금 보니 술에 잔뜩 취해서 잠든 것 같지만 말이다.
니는 회의가 진행하는 동안 탕비실에서 그녀를 보살피는 역할을 맡았다. 내가 회의에 참석한 이유도 그녀가 날 만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일어나면 뭐라고 인사하지? 아직까지 목에 저 여자가 남긴 흔적이 있는데.’
어색하고 뻘쭘한 만남이 될 것 같다. 그녀는 여러모로 신기한 사람이었다.
포근이에게 한 파격적인 행동 외에도 연구소 박사라고 하면 떠오르는 고지식하고 케케묵은 느낌이 없었다.
백의 너머로도 느껴지는 매끈하고 탄탄한 몸매, 그녀를 멀뚱히 바라볼 때였다.
으음.
얕은 소리를 내며 눈을 슬며시 뜨는 올리비아에 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뒤통수를 부여잡으며 일어난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날 발견하고 흠칫 몸을 떨었다.
난 어색하게 웃어 줬다.
다시 날 핥으러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 아니 긴장했으나 그녀는 당황하며 고개를 푹 숙이더니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윙바레 사의 정다정 님이시죠? 초면에 실례를…….”
“기억나요?”
“…네.”
첫 만남과 달리 그녀는 생각보다 정상적이었다. 술이 깨자 자신의 실수를 부끄러워했다.
“모두?”
괜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올리비아, 쭈뼛거리며 당황하는 모습이 술에 취해 있을 때와 정반대다. 술이 들어가면 실수하는 타입이구만.
“어쩌자고 그런 일을… 하셨어요.”
난 목에 선명하게 새겨진 것을 보여 주며 말했다.
그러자 올리비아는 곱슬머리가 휘날릴 만큼 고개를 연달아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스트레스 때문에 과음을 해 버려서… 정신이 없을 때 그만 귀여운 냄새가 나서 제멋대로 행동해 버렸어요.”
“귀여운 냄새요?”
“저거…….”
올리비아는 내 발치에 누워 잠든 샐러맨더를 가리켰다. 사실 그녀가 포근이의 기운 때문에 날 덮쳤다는 건 알고 있었다.
“우리 포근이가 귀엽긴 하죠. 이리 와서 자세히 봐 봐요. 하지만 핥진 마세요! 엄청 싫어하더라고요.”
더 놀리면 데면데면할 뿐이라 포근이를 핑계로 그녀와 어색함을 풀고자 했다.
역시 그녀는 포근이를 좋아했다. 성체에 가까워지는 샐러맨더는 내 눈엔 아직 귀엽다. 하지만 솔직히 다른 사람의 눈엔 징그러운 마물 도마뱀일 뿐이다.
“와, 귀여워! 만져 봐도 돼요?”
그러나 올리비아는 붉게 홍조까지 띠며 사랑스럽게 바라보더니 이내 손까지 뻗었다.
뀨웅!
하지만 포근이는 받아 주지 않았다. 녀석, 자신의 몸을 무참히도 핥아 버린 올리비아를 잔뜩 경계한다.
올리비아는 다시 앞발 차기를 맞고 싶진 않았는지 후다닥 물러났다. 잠에서 깬 포근이는 내 무릎 위로 올라와 똬리를 틀었다.
“굉장해요.”
그녀는 내 품에 안긴 샐러맨더와 날 바라보다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사실 저 샐러맨더, 포근이라고 했죠? 아까는 언뜻 따뜻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제 보니 사랑, 혹은 믿음… 다정 씨를 향해 있네요! 어떻게 마물과 인간이 그럴 수가 있는 거죠?”
난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좀 마물도 반할 만큼 따뜻한 마음씨를 가져서 그래요. 그거 아세요? 다정이라는 뜻이 한국어로 번역하면…….”
“듣기론 마물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서요? 진짜예요?”
내 말을 무시하고 올리비아가 말했다. 난 귓불을 긁다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 나갔다.
“알고 계셨네요. 맞아요. 마물들과 프리 토킹도 가능하죠.”
“흐음.”
올리비아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럼 ‘그 마물’하고 대화를 나눌 땐, 어땠어요? 녀석이 무슨 말을 하던가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던가요? 아니, 대화가 통하긴 하던가요?”
“사이코패스. 악의에 찬 살인마. 대화불통.”
보통 사람이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표정을 찡그리며 콧바람을 냈다.
“흥!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올리비아 씨도 당하신 거예요?”
그녀의 능력은 나와 비슷했다.
대화는 할 수 없으나 마물들의 기분이나 마나의 힘을 맛으로 느낄 수 있었다.
“한 번. 딱 한 번 녀석의 말라비틀어진 피부를 느껴 본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3개월 동안 밥을 못 먹었어요. 다정 씨 말이 맞아. 놈은 살인마야.”
쾅!
난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는 올리비아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뭐지?
말을 하다가 감정에 북받친 건가?
“살인마, 살인마! 놈 때문에 환자들이 죽어 가고 있어! 으악! 짜증 나! 놈 때문에 내 청춘이 썩어 가고 있잖아!”
확실하다.
그녀는 조울증이다.
*
이틀째,
연구에 진척은 없었다.
애초에 내 능력은 마물과 대화를 하는 능력이다.
‘놈’은 대화가 통하지 않으니 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뿌우우-!
전기 주전자가 끓어오른다.
컵라면의 뚜껑을 열고 뜨거운 물을 붓던 그때였다.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만 손에 팔팔 끓는 물을 쏟고 말았다.
“따뜻해라.”
화상은 금방 나았다.
포근이의 힘이었다.
포근이의 힘.
“젠장.”
그러고 보니 내 도움이 아니라도 되잖아?
난 그길로 올리비아 박사의 연구실을 찾았다. 저녁 시간에도 한참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그녀에게 난 큰 소리로 외쳤다.
“올리비아 씨! 날 느껴 줘!”
당연하게도,
그녀는 안경 너머로도 선명하게 느껴질 만큼 혐오의 눈빛을 보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포근이와 교감한 날 포근이에게 한 것처럼 해 주세요. 아니, 아니, 일단 그건 그건데, 다 이유가 있어요.”
말을 할수록 오해가 쌓이는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