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68화 (68/258)

# 68화 조미료 (1)

무대에 난입하자 동만이가 멍청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난 씩 웃었다. 가면을 써 내가 누군지 모르겠지. 그의 몰락을 마음껏 비웃어 주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다.

끼야야약-!

방청객들의 놀란 비명이 울려 퍼진다. 가면을 쓴 무뢰한의 침범에 당황한다. 단지 무대에 난입한 괴한 한 명에 대한 반응치곤 과하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미국에서 엘존 쇼를 제외하고 생방송 프로그램이 계획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전이 이후, 미친놈들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겠지. 방송 사고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로 터져 나오니.

엘존 쇼는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3류 방송사에서 방영하는 미숙한 쇼가 아니다. 지구촌 미디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쇼인 만큼, 이런 허접한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곧바로 송출은 중단되고 난 경비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는 꺼지지 않았다.

난 빨간 불빛이 들어온 카메라들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쇼를 시작하겠다는 신호였다.

그래,

이건 원장님이 미리 방송국에 언질을 줬을, 쇼의 일부분이다.

메인 PD들도 그렇고 진행자 엘존도 다 알고 있는 거겠지.

“록스 CP! 이게 대체 무슨……?”

“경비! 경비!”

잠깐,

그렇다기엔 너무 당황하는데?

주변 상황이 내 등장으로 난잡해졌다. 미리 손발을 맞춘 것 같지가 않았다. 엘존은 기겁하며 카메라 화면 바깥으로 도망쳤고, 방송국 스태프들은 우왕좌왕한다. 무대에 난입해 놓고 머쓱하게 서 있던 난 슬슬 불안감을 느꼈다.

‘설마 미리 얘기를 안 해 놓은 건가?’

삐익-!

호루라기를 불어 대며 경비들이 몰려왔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희미한 마나의 기운을 보니, 능력자들인 것 같다.

“아니, 잠깐, 잠깐!”

으윽,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육체파 능력자들이 날 순식간에 제압했다.

난 머리가 목제 패널 바닥에 처박히는 동안에도 어리둥절했다.

설마 원장님이 날 엿 먹이기 위해 진짜 방송 사고를 일으킨 건가?

‘그럴 가능성도 있어.’

같이 일한 지 일 년이 넘어서야 원장님에 대해 깨달은 게 있었다. 그녀는 의외로 장난이 많아.

젠장.

“에라이!”

질질 끌려가던 난 주먹을 불끈 쥐고 내 양팔을 잡은 경비들을 날려 버렸다. 경비들이 능력자라고 하더라도 황소 마물과 교감하여 괴력을 가지게 된 나도 만만치 않다.

쿵!

등 뒤에서 덤벼드는 경비를 엎어치기로 제압했다. 단지 맡은 일에 충실할 뿐인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이대로 끌려가면 난 관종 머저리밖에 되지 않잖아.

내가 경비들을 다 제압할 동안에도 카메라는 계속해서 돌아갔다.

씩씩거리며 땀을 닦는데 어딘가에서 시선이 느껴진다.

무대 바깥에서 유일하게 태연히 서 있는 남자, 우왕좌왕하는 군중들 사이로 고개를 추켜든 채 날 바라보고 있다. 노란 캡 모자를 쓴 중년의 백인 남자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미소 지었다.

‘엘존이 저 남자를 CP라고 불렀지.’

그는 이 프로그램을 책임지는 프로듀서였다. 혼잡한 방송국에서 홀로 유유히 서 있는 그는 날 보며 조용히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저자구나.’

원장님은 쇼의 모든 스태프들을 매수한 게 아니었다. 단지 카메라가 돌아갈 수 있도록, 최고 권력을 가진 CP만 매수한 것이다.

어찌할 줄 몰라 땀나는 발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그가 소리 없이 말했다. 난 남자의 입모양으로 어떤 말을 하는지 유추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suit yourself.

꼴리는 대로 하라는 뜻이다.

난 다시 성큼성큼 무대에 뛰어올라 갔다. 기겁하는 서동만을 지나쳐 우리에 갇힌 마물들에게로 향했다.

“보세요. 여러분, 제 말 좀 들어 봐요. 얘가 지주호라는 마물은 맞아요. 하지만 저 새끼가 말했던 것처럼 먹이의 체액을 빨아먹진 않아. 여기 호랑이 주둥이가 안 보입니까? 어떻게 거미 몸뚱이를 가졌다고 거미처럼 먹이를 먹는다고 생각했지?”

난 그가 말한 엉터리 말들을 하나하나 고쳐갔다.

“얘가 돼지 머리를 좋아한다고? 보아하니 쫄쫄 굶었네. 야, 며칠 굶었어? 3… 4일? 4일이나? 와, 미쳤네. 여러분, 얘가 육지 마물처럼 보이지만 사실 돌바위 물개라고, 깊은 강에서 사는 녀석입니다. 육지 고기가 아니라 해산물이나 해초를 좋아하고요. 애초에 육식을 즐기는 녀석이 아닌데 배고파서 억지로 돼지 머리 먹어야 했어요. 얼마나 싫어했겠습니까? 억지로 먹는데! 어유, 불쌍해서 참…….”

한참을 떠들다 서동만을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보세요, 저 새끼는 아무것도 모른단 말입니다. 응? 내가 어떻게 아냐고? 그럼 넌 얘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어디 한번 말해 보지? 들어 보니 네놈이 마물들을 엄청 괴롭혔구먼.”

말대꾸를 하던 동만은 내 물음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었다. 역시 그는 똑똑했다. 지금 상황에서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열 받는다.

마물들의 목소리가 쳐 들리지도 않으면서 헛소리나 찍찍 해 대는 동만 씨, 앞으로 바른말만 할 수 있게 헌 입을 뜯어내고 새 입을 달아 주고 싶다.

방송국 무대 위에서 카메라와 방청객 앞에서 말을 하자니 참으려고 해도 나도 모르게 격정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난 다 들려! 얘는 불가사리, 저 사람 말과 달리 철분을 섭취하고 그리고 또…….”

말을 멈춰야 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생각해 보니 내가 하는 말은 일반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것들이다. 이 마물들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터인데, 난 서식지와 좋아하는 먹이, 그뿐만 아니라 마치 대화를 나누듯이 말해 버렸으니.

[나가고 싶어.]

[너에게서 무서운 냄새가 난다. 하지만 저자보단 낫다. 날 여기에서 풀어 줘.]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물론 진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 맞지만.

난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어떻게 하면 이들이 믿어 줄지 생각해 봤다. 솔직히 말해서 난 말재간이 없다. 싸늘해진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곳의 미친놈은 나였다.

‘결국 방법은 하나밖에 없겠지.’

우리의 잠금 장치는 단단했지만 부수지 못할 것도 없다.

‘포근아.’

무대 뒤편에 숨어 있는 포근이가 내게 힘을 건넨다.

불꽃이 응축되고, 난 허리춤의 권총집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존!”

잠자코 있던 CP가 엘존을 부른다.

카메라가 그들을 따라가고, CP가 귓속말로 사회자 엘존에게 무어라 속닥속닥 거리더니 이내 엘존이 미소 지으며 소리쳤다.

“하하, 당황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마스터 CP 록스가 준비한 엘존 쇼 복귀 기념 몰래카메라였습니다!”

뭐?

지금까지 구석에서 얼 타던 엘존은 평소처럼 프로의 모습으로 돌아와, 엉망진창이 된 쇼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자, 소개합니다. 가면을 쓴 채 미친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해 내신 이 남자는 사실 미리 섭외한 출연자이며……!”

엘존이 날 보고 오라고 손을 까닥까닥한다. 그제야 CP가 했던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다 쇼의 일부분이라는 거지?’

과연 엘존 쇼를 만들 만큼 능력 있는 CP라는 건가? 이 상황을 잘도 몰래카메라와 연결 지었구먼.

나도 침착히, 연기를 한 척하며 엘존에게 다가갔다.

“정말 대단한 연기였어요. 선을 아슬아슬 넘나드는 위태로운 연기로 엘존 쇼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셨군요! 어찌나 놀랬던지 난 패트릭 쇼에서 첩자를 보낸 줄 알았잖아요.”

떠올려라, 백수 생활 때 수없이 보았던 미국 토크쇼들을!

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크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패트릭이요? 아~ 그 ‘똥 싸는 마법사’로 유명한 사람? 조금 충격인데요. 그가 보낸 첩자라면 분명 똥 싸는 연기밖에 못할 텐데.”

“와우, 패트릭. 혹시 이 쇼를 보고 있다면 진짜 첩자를 보내 봐요. 들켜도 걱정 말아요. 우리 방송국엔 비데도 있으니까.”

이게 미국 조크인가, 뭣인가인가?

혼잡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방청객들도 쇼의 일부분이라며 생각하는 듯했다.

난 경쟁사 프로그램을 우스갯거리로 만들며 엘존과 함께 쇼를 진정시켰다.

엘존이 물었다.

“가면은 왜 쓴 건가요?”

잘난 체하며 대답했다.

“초상권 보호를 위해서요. 사실 제가 너무 잘생겨서 유명해질 것 같거든요. 그런 인기는 부담스럽잖아요.”

정말 방금까지의 행동들이 연기라고 믿게 할 만큼 능청스럽게 말이다.

어쩌면 나 쇼 엔터테인먼트에 재능이 있는 건가?

엘존도 인기 사회자답게 방금 전에 CP에게 상황을 전해 들었음에도 능숙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러다 외톨이가 된 서동만에게 말한다.

“미스터 서, 얼굴이 하얗게 질리셨어요. 미안해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셨군요.”

엘존은 나와 서동만을 양옆에 세우고 말했다.

“사실 미스터 서의 능력에 대해선 유난히 왈가왈부하는 목소리들이 많았지요. 엘존 쇼에서 확실하게 증명하는 겁니다.”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하던 서동만은 엘존의 말에 상황을 깨달았는지 서서히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이 익살맞은 연기자도 사실 ‘마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하네요! 그러니 서로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엘존 쇼에서 특별히 마련했습니다!”

푸쉬쉬!

이상화탄소를 분사하며 요란한 특수 효과와 함께 무대가 또다시 바뀐다.

마물 우리와 무대 사이를 두고 거대한 블라인드가 설치되었다.

‘여기까지 다 생각한 거야?’

저 프로듀서, 확실히 원장님과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래곤인 그녀는 허투루 친구를 만들지 않을 테니까.

방송국 인맥이라면 저 정돈 돼야지.

서동만은 당황했고, 난 처음 난입했을 때처럼 씩 웃었다.

암 그럼, 원장님이 다 준비해 놨겠지.

다소 난잡하게 돌아가던 쇼도 진정되고 방청객들도 ‘능력자 VS 능력자’라는 슬로건에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내 쪼다 같았던 연기조차 정말 몰래카메라이며, 이 대결을 위한 오프닝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내겐 좋은 일이다.

다 차려진 무대라면 난 결코 녀석에게 질 리가 없다.

이제 이 무대에서 어리둥절 정신을 못 차리는 건 서동만, 그밖에 없었다.

“엘존 쇼는 잠시 후, 2부로 돌아옵니다.”

엘존의 말이 끝나자 미국 버라이어티쇼 특유의 연출로 생방송 화면이 브루클린 다리를 비추고,

“좋아, 컷! 1부 디렉팅 종료하고 광고 보내!”

록스 프로듀서의 우렁찬 컷 사인과 동시에 카메라 녹화가 중단되었다.

*

방송국 스태프들은 프로였다.

내 난입으로 혼잡했던 1부가 끝나고 광고가 나가자 예정에 없던 2부를 분주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난 멀뚱히 서서 구경만 했다.

그리고 웅성거리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저 남자의 등장과 동시에 시청률이 가파르게 상승했어.]

[인터넷 송출 서버가 터졌다는군. 긴급 복구를 위해 방송국 서버 관리자들 모두 그쪽으로 투입했다는데?]

들어 보니 록스 CP가 의도했든 안 했든 시청률이 많이 상승한 것 같았다.

이쪽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는진 몰라도, 일단 스튜디오 내에선 방송이 중지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난입한 나라도 방송사고가 아니라, 이 쇼의 한 부분으로서 인정받았다는 얘기다.

즉, 방청객들에게도, 시청자들에게도 내 행동과 말은 이제 합당한 근거를 얻는다. 단지 방송 사고로 끝났더라면, 놈의 구라를 밝혀내더라도 신뢰를 얻을 수 없었을 거야.

2부가 시작되기 전에 사회자는 대기실에서 방송을 준비했고, 스태프들도 준비하기에 바빠 무대 위엔 나와 서동만, 단둘만이 남은 듯했다.

슬쩍 곁눈질로 보니, 그도 날 쳐다보고 있다가 기겁하며 고개를 돌렸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잔뜩 긴장했겠지. 당황스러울 것이다. 거짓말이 들통 나기 일보 직전이니.

내 마음은 그와 상반되게 여유로웠다. 난 해리 후디니처럼 구라쟁이의 구라를 밝히러 무대에 올랐지, 내 능력의 진위를 평가 받기 위해 오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무대를 단두대처럼 느낀다면, 난 단두대의 스위치를 잡은 사형 집행인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광고를 보며 2부 방송을 기다렸다.

‘광고 시간만 10분이 넘네.’

미국 방송도 광고가 참 많다고 생각할 때였다.

“당신, 나… 당신 알아. 제이 에이전시의 정 팀장이지? 가면을 쓰고 목소리를 변조했지만 나… 난 못 속여.”

슬그머니 다가온 그가 묻는다.

당신, 제이 에이전시의 정 팀장이냐고. 난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봤다. 작고 마른 남자가 울분에 찬 눈으로 날 노려보고 있다.

‘악취가 심해진다.’

놈의 벌렁거리는 콧구멍을 보던 난 불현듯 깨달았다. 지금 드는 생각은 추측에 불과하나 왠지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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