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달려라 (6)
난 턱시도를 챙겨 입었다.
마지막 시합을 앞두고 기념행사가 열렸다. 간단한 디너 파티였다.
선수들은 굳이 참가하지 않아도 되지만 난 참석한다고 말했다.
“생각보다 조용했어.”
찜찜한 기분이다.
이대로 무사히 결승전을 치르면 다행이겠지만, 이런 흐름이라면 꼭 지랄 맞은 상황은 마지막에 터지지 않던가.
머리에 왁스를 발라 리젠트 스타일로 꾸몄다. 보타이나 시계 등 액세서리는 최소화했다. 아이스독들이 내게 남기고 간 ‘하얀 머리카락’이 꽤 화려한 느낌이라 몸은 수수한 게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멋을 내고 야외 파티장으로 향했다. 과연 많은 돈이 엉킨 곳이라 하룻밤의 저녁 파티치곤 꽤 화려했다. 스위프트덕 경주가 유럽에서 시작한 탓인지 파티장도 유럽식이었다.
연주단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술을 찾았다. 스위프트독을 조형한 얼음 조각상 아래에서 샴페인 잔을 발견했다. 아니, 한여름에 얼음 조각상이라니, 역겨운 취향인데?
술을 들고 테이블에 앉을 때까지 내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선수들과 관계자 또는 딱 봐도 ‘나 부자요.’ 하는 자들이 모여서 하하, 호호 덕담을 나눈다. 그 속에서 나는 아웃사이더였다.
내가 일부러 무시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놈들이 노골적으로 날 무시하는 게 더 컸다.
하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모습일 테니. 나 때문에 도박쟁이들이 꽤 많은 돈을 잃었다고 듣긴 했다.
카르마 길드로 보이는 자는 없었다. 공식 석상이라 나오지 않았나? 아니, 녀석들은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
조용한 걸 보니 벌써 철수한 건지도 모르겠군.
혼자 홀짝이다 보니 샴페인 한 잔을 금방 비웠다.
“음식은 코스 상관없이 다 가져다주세요.”
“감사합니다.”
요리를 가져온 웨이터에게 팁을 주며 코스 요리로 준비된 디너를 한꺼번에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혼자 밥을 먹는 것을 느긋하게 즐기지는 못하겠다.
디너의 주제는 해산물이었다.
버터에 구운 블랙타이거 새우부터 살이 꽉 차 통통하고 단맛이 강한 새우 요리를 비롯, 다섯 가지의 해산물 요리까지. 꽤 맛있네.
음식을 맛보며 주위를 둘러봤다.
내게 시선을 두는 자들은 있지만 다가오진 않는다. 관심은 있지만 신경은 쓰지 않는 눈치다.
이상한 태도란 말이지.
그래도 난 우승 후보인데.
괜히 왔나?
학교 급식실에서 혼자 밥을 먹는 느낌이다.
웨이터가 가지고 온 샴페인을 홀짝이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걸어온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여자다. 드레스는 타이트하지 않았으나 풍만한 몸매 덕에 라인을 보기 좋게 드러내고 있었다. 팔다리는 조밀한 근육으로 꽉 찼으나 우락부락하기보단 잘 가꾼 관상용 나무를 보는 것 같았다.
“다정 씨.”
이탈리아 대표 선수이자 나와 우승을 경합할 선수, 렐리아 리나였다.
그녀는 내 맞은편 테이블에 앉았다. 내 이름을 부르며 다리를 꼬았는데, 드레스가 말려 올라가며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났다. 스위프트덕 기수답게 남자 선수 못지않은 굵은 허벅지다.
“그때 연습 경기장에서 봤을 때부터 알았어요. 다정 씨라면 여기까지 올라올 거라는 걸요.”
그렇게 말하며 내 샴페인 잔으로 손을 뻗는다. 자연스레 상체가 숙여지며 가슴골이 드러났다.
렐리아는 내가 마시던 샴페인을 천천히 마셨다. 일부러 그런 건지 입술에서 술 한 방울이 떨어져 나와 하얀 목선을 타고 흘렀다.
그래, 이건 유혹이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인간 수컷의 욕망을 자극시키겠지. 꽤 훌륭한 유혹 기술이야.
‘지랄하네.’
하지만 교배 목적은 분명 아니다.
만약 내가 ‘인간’이었다면 솔직히 말해서 혹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위프트덕과 몇 주 동안 열렬하게 교감한 난 지금 말하자면.
달리는 것밖에 모르는 고자 새끼다.
“여기까지라고요? 날 아래로 두지 마세요. 어차피 우승은 내가 할 테니까.”
시큰둥하게 대했다.
“그런 뜻이 아니에요. 다정 씨와 다정 씨의 스위프트덕, 모두 첫 출전이더군요. 전 대단한 재능이라고 생각해서…….”
나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그걸 알아봤어요? 왜?”
그녀는 꼬았던 다리를 풀고, 비스듬히 숙였던 상체를 꼿꼿이 세우며 대답했다.
“…라이벌로 생각하니까요. 조사는 해 봐야 될 거 아니에요?”
“그래도 선은 넘지 마세요. 내 침대는 왜 뒤져요?”
“침대라뇨?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약간 화난 듯 치켜세워지는 눈썹. 정말 억울한 모양이다. 일단 그녀가 내 방을 뒤진 건 아닌 것 같다.
그 뒤로 이어진 대화에서도 난 퉁명스럽게 대답만 하고 먼저 말을 건네진 않았다. 몇 마디가 오간 후 그녀도 입을 다물어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녀는 유혹의 기술을 접어 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떤 걸 써요?”
“뭘요?”
렐리아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기마다 보여 주던 그 자신감, 분명 그걸 숨겨 두고 있는 거겠죠. 결승전에서 쓸 생각이죠?”
음흉하기까지 한 표정에 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뭔데, 진짜 몰라서 그래.
“아니, 진짜 뭘 말하는 거야?”
“한국에선 어떤 걸 쓰냐는 말이에요.”
“뜬구름 잡는 소리하지 말고 그냥 말해 봐요. 뭘 쓴다는 건데?”
그녀는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흐음. 끝까지 모른 척이네요. 걱정 말아요. 경기가 끝나도 검사 따윈 하지 않으니까. 알다시피 마물 경기는 공식 스포츠가 아니잖아요?”
공식 스포츠가 아니다.
그녀의 말에 난 문득 카르마 길드가 생각났다.
난 그녀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나 맞장구를 쳤다.
“후우. 맞아요.”
마치 들켰다는 듯 능청스럽게 연기했다. 손수건을 꺼내 흐르지도 않는 땀을 닦는 척하며 말했다.
“피차 다 아는데 뭘 감추겠어요. 그걸 내일 쓸 생각이에요.”
“역시! 당신도 ‘그들에게’ 제공 받았나요?”
“네. 길드 카르마…….”
떠본 것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녀는 맹렬하게 반응해 줬다. 이 여자, 보기와 달리 헛똑똑이네.
“이런! 무슨 짓이죠? ‘그들이 누구인지’ 말하지는 마세요! 지금도 우릴 보고 있을지 몰라요. 죽고 싶어요?”
난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구나, 카르마 길드.
무슨 짓을 꾸미고 있어.
그녀는 내가 어떤 걸 ‘제공 받았든’ 결승전에서 자신을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소리쳤다. 단지 노파심에 날 떠보고자 온 그녀였으나, 덕분에 난 그녀로부터 정보를 얻게 되었다.
*
난 홀로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뭔가 이상해.”
무엇을 제공 받았든, 기수가 중요한 건 아니다. 아마 스위프트덕에 관련된 어떤 것이겠지.
도둑고양이처럼 기척을 숨기며 마구간으로 향했다.
마지막 경기가 코앞이다. 사람들은 행사로 바쁘고, 지금쯤 스위프트덕은 체력을 비축해야 하기에 마구간은 조용해야 했다.
하지만 그곳에 사람들이 있었다.
난 놈들을 안다.
그때 돈 가방을 옮기던 동양인 남자들. 옷깃에 업 문양을 새긴 카르마 길드다.
기척을 숨기고 잘 보이는 곳까지 다가갔다. 무슨 짓이지? 놈들은 마구간 안의 스위프트덕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놈들의 손에 들린 건 주사기였다.
그리고 땅에 펼쳐 놓은 물건들은 수상한 액체가 담긴 병들.
놈들이 주사기에 액체를 주입한다. 그리곤 스위프트덕들에게 다가가서, 주사하려고 한다.
피슝-!
그 즉시 뒤에서 총을 쐈다.
포근이와 교감하지 않아 불꽃 탄은 만들 수 없지만, 내겐 마물원에서 마물들에게 쓰는 강력한 마취약이 담긴 총알들이 있었다.
소란이 일어나선 안 돼.
원장님의 마도구인 턱시도에 의해 생성된 총에 마취탄을 장전하고, 놈들이 방심하는 사이 네 명의 빡빡이를 모두 잠재웠다.
총이 아닌 마도구라 총성도 크지 않다. 주변에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더 이상 빡빡이들이 없는 걸 확인하고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마구간에 들어오자마자, 난 기괴한 비명을 내지르는 스위프트덕을 마주해야 했다.
[왜에에! 내겐 안 해 줘!]
뭐?
비명을 내지른 건 카르마 길드가 주사를 놓으려던 스위프트덕이었다.
“야, 잠깐!”
당황하며 녀석에게 뛰어가던 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젠장.”
이미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마구간 안의 스위프트덕들.
모두 쓰러져 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녀석들이 원래 풍기던 기운이 아니다. 어딘가 변질되었어.
경기가 열리는 도중에도.
경기가 끝난 후에도.
놈들을 주시했다.
경기 중에 어떤 일이 발생할 사소한 조짐이라도 보이면 곧장 원장님에게 보고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놈들의 목적은 경기를 중단시키거나 조작하는 게 아니었다.
“주사기, 액체. 도핑이로군.”
깨달았다.
설마 도핑이라니.
어쩐지 잠잠했다.
재빨리 놈들이 들고 있던 주사기와 액체 통을 살폈다. 가방엔 이미 사용한 걸로 보이는 주사기가 스물세 개나 있었다.
즉, 이 마구간의 반 이상의 스위프트덕이 주사를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상하건대 주사를 맞은 스위프트덕은 모두 결승전에 참가하는 녀석들이겠지. ‘예비용’ 스위프트덕들을 포함해서!
[너 때문이야! 왜! 내겐 안 주는 거야!]
“뭐? 왜 나한테 화내고 지랄이야?”
놈은 내게 역정을 냈다.
[모두 다 저걸 먹고 강해졌어. 하지만 난 먹지 않았으니까 약해질 거야. 뒤쳐질 거야. 안 돼.]
도핑.
돈 가방에 담긴 돈의 출처는 도핑 비용이었다. 카르마 길드는 스위프트덕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약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젠장.
하지만 스위프트덕들이 강제로 주사를 맞은 건 아니었다.
놈과 대화를 나눴다.
[이기기 위해선 뭐든지 할 거야. 제발 부탁이야. 내게 그걸 줘.]
난 약물과 주사기를 챙겼다.
물론 녀석에게 주사하진 않았다.
“너무 위험해.”
[안 돼! 목숨이 끊어져도 좋아. 이길 수만 있다면!]
스위프트덕들이 가진 경주에 대한 광기. 놈만이 아니었다. 이미 주사를 맞은 스위프트덕들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나 또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 녀석들 모두 원해서 주사를 맞은 것이다.
1등을 하기 위해서.
상태가 지독하다.
마물들과 오래 지낸 나라서 잘 알았다. 부자연스러운 상태의 스위프트덕. 일시적으로 강해질지는 모르나 약효가 끝나면 심각한 부작용이 일어날 거야.
…죽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결승전에서 사용하는 거군.”
결승전에 참가하는 모든 나라들,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모두가 약물을 구입했다.
이 무슨 지독한 짓인가.
역시 마물은 마물이라는 건가?
좋은 대우, 라이더와 스위프트덕의 교감. 다 걷어 내고 이 상황을 보아하니 마물은 ‘물건’이라는 인식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가장 끝의 마구간,
녀석은 겁에 질려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후다닥 다가와 노란 주둥이를 뺨에 비볐다.
“괜찮아?”
[무서웠어. 다른 녀석들이 이상해. 모두가 미쳐 가고 있어.]
난 녀석의 날갯죽지를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끝을 내야 할 것 같았다.
녀석은 똑똑한 마물이다.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겠지.
난 도핑에 대해서 설명하며, 절대 이 경기는 이길 수 없음을 설명했다. 아무리 내가 녀석과 교감한다고 한들 도핑한 스위프트덕들과 큰 격차가 발생하겠지.
[아니야. 난 끝까지 달릴 거야.]
녀석은 이해했다.
하지만 경기를 포기하진 않았다.
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 너도 주사를 맞겠다는 거야?”
내 물음에.
녀석은 느긋하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런 게 아니야.]
녀석이 말했다.
[우리 아빤 최고의 챔피언이었어. 그리고 아빤 내게 챔피언으로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가르쳐 줬지. 진정한 챔피언이 되기 위해선 새하얗게 불태우랬어. 모든 힘을 다해 새하얗게 불태우면, 1등이든 꼴등이든 중요하지 않대. 그게 가장 중요한 거랬어.]
녀석이 이렇게 의젓했던가?
이렇게 의지가 강한 녀석이었나?
아니, 녀석은 처음부터 다른 스위프트덕들과 달랐지. 근성이 있는 놈이었어.
[물론 난 1등을 하는 게 좋아. 하지만 무엇보다 달리고 싶어. 그런데 달리지도 못하고 단지 겁먹어서 지는 건 안 돼!]
녀석은 열망했다.
[그리고 내가 저런 약 따위 하지 않고도 만약 저 녀석들을 이기면, 그야말로 최고의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거잖아. 아빠보다 더 빠른, 가장 빠른 사나이가 될 수 있는 거야!]
챔피언이라는 자리를.
녀석도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마물은 마나의 변화에 민감하다. 하지만 녀석은 주변 친구들이 전과 달리 변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음에도 계속 달리길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