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장마 주의 (2)
그녀의 말이 맞았다.
집으로 돌아온 난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그때부터 고통이 뒤늦게 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꼼짝 없이 일주일 동안 침대에 누워 지내야 했다.
다행히 출근 날엔 씻은 듯이 나았다. 원장님은 정말 무서운 상사였다. 어쩜 하루도 틀리지 않고 내가 멀쩡해지는 날을 맞힐 수 있는 거지?
“다정 씨!”
출근을 하자마자 그녀가 날 반겼다. 으레 어떤 일이 발생하면 날 저렇게 기다리기도 했지만, 오늘은 좀 더 반겨 주는 것 같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몸은 괜찮으세요?”
“다정 씨, 뭐 얻은 거 없어요?”
원장님은 내 안부 인사조차 무시하고 싱싱한 과일을 고르듯 날 이리저리 둘러보며, 팔뚝을 만지거나 귓불을 잡아당기거나 배꼽에 손가락까지 넣으려고 했다.
난 옷을 벗기려는 손길에 티셔츠를 필사적으로 사수하며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뭘 말하는 겁니까?”
그녀가 대답했다.
“항상 마물들과 깊은 교감을 나누면 뭘 얻었잖아요. 아라크네의 거미줄, 황소 마물의 힘처럼. 이번에도 삼 일 동안 연결되었으니 무언가를 얻었을 거 아니에요? 어때요? 뭐가 달라졌어요? 빗물이 배꼽에 저절로 고이기라도 하던가요? 자기도 모르게 자고 일어났는데 침대가 흠뻑 젖어 있던가요?”
그녀는 날 장난감처럼 여겼다.
그러니까 저렇게 새 장난감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신나 하며 물어보지.
호들갑을 떠는 그녀. 요즘따라 뜻밖의 모습을 자주 보는 것 같다.
“딱히 없던데요.”
“정말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고요?”
“제 몸은 제가 잘 알잖아요. 뭐,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요.”
내 말에 그녀가 입술을 삐죽 내민다. 실망하는 것 같다. 관리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혼잣말을 해 댄다. 들어 보니 ‘아직 부족한가? 어쩌지? 될 줄 알았는데.’ 라고 말했다.
항상 어른스럽기만 하던 원장님이 내 앞에서 저런 귀여운 꼴을 보여 주다니.
“그래도 굉장해요!”
갑자기 달려와 어깨를 잡는 그녀 때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흐뭇하게 올라가던 입꼬리를 들키진 않았겠지?
“다정 씨!”
다행히 괜찮은 것 같다.
용을 그딴 시선으로 봤다고 하면 아무리 그녀라도 날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네?”
평소에도 내가 일을 잘해 내면 격려를 아끼지 않던 원장님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녀에게 꽤 특별한 것 같았다.
“사실 긴가민가했거든요. 이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꽤 좋은 결과가 나왔어요. 설마 한낱 인간이 신수하고도 대화를 나누려는 ‘시도’를 할 수 있다니요.”
그녀는 내 어깨에 계속 손을 올린 채 말을 이어 나갔다. 평소에도 눈을 보고 대화를 나누나, 이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계속 시선을 마주하자니 부담스러워 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다정 씨, 미리 말해 둘게요. 제가 다정 씨를 가디언으로 삼은 이유를.”
그러다 퍽 궁금한 내용에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봤다.
날 가디언으로 삼은 이유. 교감 때문이라는 건 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었던가?
“난 다정 씨의 가능성을 믿어요. 다정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그 이상을.”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거리면 들릴 텐데.
“다정 씨가 신수하고도 무리 없이 교감할 만큼 강해졌으면 해요. 지금처럼 신수가 오더라도 힘들이지 않고 돌려보낼 수 있도록.”
검은 바다에 가라앉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런 넓은 세계를 가진 신수들과 교감을 나눌 수 있을까?
가능할 거야.
혼자만의 생각이라면 자만에 불과하겠지만 무려 드래곤인 원장님이 믿어 주고 있다.
상처 없이 돌려보내기 위해 많은 힘을 사용하긴 했지만 신수는 드래곤인 원장님조차 버거워했다.
만약 원장님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물바다가 되어 정말 노아의 방주를 띄워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마물들처럼 내가 신수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면?
그 물음의 답에 의해 그녀가 날 가디언으로 삼은 이유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 받아요.”
원장님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선물.”
선물이라 말하는 그녀의 손에 들린 건 보석함이었다. 선물이라니, 괜히 어색해진 난 뭔지 물어보지도 않고 덥석 받았다.
“열어 봐요.”
함을 열어 보니 안에 부서진 보석 조각이 있었다. 하얗고 매끈한 게 진주의 파편처럼 보였으나, 파편의 크기를 통해 원래의 크기를 짐작하니 진주보다 훨씬 커다란 보석인 것 같았다.
“힘들게 구했어요.”
보통 원장님은 내게 거액의 수고비를 주거나 오리하르콘 브로치같이 뛰어난 마도구를 선물로 줄 때 생색은 전혀 내지 않았다.
드래곤이었으니까.
‘어떤 가치가 있을까?’
이 볼품없이 부서진 진주 조각은 그런 드래곤이 스스로 ‘구하기 힘들다.’라고 말하는 선물이었다.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선물에도 난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보아하니 장식품 같은데, 용이 준 선물이니 액땜 효과정도는 있지 않을까? 침대 옆에다가 놔둬야겠다.
“먹어 봐요.”
“…네?”
선물의 용도는 선물을 준 자가 가장 잘 아는 법이다. 하지만 원장님은 누가 봐도 장식품, 그 이상의 용도론 활용하지 못할 것 같은 깨진 조각 따위를 나보고 먹으라고 했다.
“먹으라니까요. 제가 보는 앞에서, 지금 당장.”
농담 따위가 아니었다.
원장님은 친절하게도 친히 내게 선물을 먹여 줄 생각인 것 같았다. 조각을 들고 내 입으로 들이민다.
깨진 조각은 뾰족해서 먹고자 한다면 야금야금 깨물어 먹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뒈지기야 하겠어?’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맛과 식감은 더럽게 없겠지만 어떤 효능이 있을 거라고 말이다.
진주 가루를 물에 타서 먹으면 피부가 매끈해진다던데, 단지 그 정도 효과는 아니겠지?
입을 벌렸다.
그녀는 조각을 내 입에 밀어 넣었다. 나는 한 입만 와그작 깨물고 밀어낼 생각이었다.
“엉?”
하지만 조각이 혓바닥에 닿자마자 솜사탕 녹듯 사르르 녹아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액체가 되어 입에 고인 것이다. 당황하며 원장님을 바라봤다.
“음음음?”
입에 고인 액체를 뱉어내지도, 삼키지도 못했다. 난 원장님에게 이걸 삼키냐고 물어보기 위해 물을 마시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꿀꺽.
목 넘김은 부드러웠다.
아무 맛도 나지 않았는데 멘솔 담배라도 핀 듯 목구멍이 시원해졌다. 기이한 건 시원함이 목구멍을 넘어 식도를 타고 온몸 구석구석까지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슴과 명치 부근이 얼얼할 만큼 시원해졌고, 팔다리도 차가운 냇물에 담근 것처럼 시원해졌다. 종국엔 온몸이 냉수마찰을 하고 있는 것처럼 시원하게 느껴졌다.
피부뿐만 아니라 오장육부, 심장, 눈과 코와 귀! 심지어 머릿속의 뇌까지!
“으아, 이거 정말 괜찮아요?”
기분 나쁜 경험은 아니었으나 이질적인 경험이다. 태어나서 이렇게 깨끗하고 시원한 느낌은 처음이야.
원장님은 당황하는 날 진정시키며 말했다.
“견뎌요. 정순한 기운이 몸을 세척하는 중이니까 위험할 것 없어요.”
“정순한 기운? 세척이요?”
“다정 씨가 먹은 건 여의주의 파편이거든요.”
지금 내 기분을 비유하자면 27년산 중고차인 내 몸을 분해하여 고치고 광내고 있는 느낌이었다.
몸을 타고 흐르는 맑고 신비한 기운이 뼈 마디마디를 씻겨 준다. 과장하자면 세포 하나하나가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다.
난 ‘기운’이 지나간 자리를 바라봤다. 팔목에 났던 뾰루지가 사라졌다. 어릴 때 고아원에서 입었던 허벅지의 화상 자국도 없어졌다.
입을 벌렸다. 흔들리는 이를 혓바닥으로 건드리자 레고 부품도 아니고 툭 하고 빠져 버렸다. 하지만 이를 뱉어내자마자 새 이가 돋아났다.
버려진 치아엔 허접한 솜씨로 덧씌워진 철색 아말감 자국이 있었다.
충치마저 뽑히다니.
내 몸에 일어나는 모든 변화는 아프지 않으며, 신비롭기만 한 경험이지만 알지 못하는 것이라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여의주의 파편이라고 하셨나요? 정말 평범한 조각이 아니었군요.”
내 물음에 원장님이 말해 줬다.
“여의주는 날개가 없는 용의 날개. 본래 구하고자 한다 하여 구할 수는 없는 것.”
여의주.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힘을 발휘하는 보주. 정말로 용의 것이라고?
“하지만 유일하게 전이에 휩쓸려 조각나 버린 여의주가 있었죠. 다정 씨가 먹은 게 마지막 여의주의 조각. 세상 모든 힘은 저마다 달라 쉽사리 융합될 수 없지만 여의주는 달라요. 그 어떤 기운보다 정순하기에 부작용 없이 누군가의 마나로 깃들 수 있죠.”
그녀는 사실 내 선물을 예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날 기특하다고 여겼다나?
“천천히 지켜볼 생각이었으나 뜻하지 않은 기회로 알게 됐어요. 아까 전에도 말했듯이 난 다정 씨가 강해지길 바라요.”
마침내 여의주의 기운은 내 몸을 모두 휩쓸고 배꼽 아래 부근에 자리 잡았다. 들어 본 적이 있어. 무림인들은 이곳을 단전이라 부른다지.
늘어났다.
검사를 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마나, 늘어났어. 확실하게!
엄청나다. 그저 먹고 기다리는 것만으로 현대인이라면 모두 꿈꾸는 마나의 상승을 이룩했다.
“신수들과 대화를 나누라고 말씀하셨죠.”
원장님이 내게 이런 값진 선물을 준 이유였다. 청동 잉어와는 교감이 전혀 되지 않았었다.
그리고 마나가 늘어난 지금 상태라서 더 잘 알겠다. 확신하건대 지금 내 힘으론 다시 교감을 시도해도 녀석에게 닿지 않을 거야.
“그럼 저런 괴물들이 지구로 다시 온다는 말인가요?”
만약 다시 신수가 온다면 난 교감을 나눠야 할 거야.
원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세상의 비밀을 한층 더 깊게 알게 된 날 위로라도 하듯이 등을 두들겨 주며 대답했다.
“이제 시작일 뿐, 그들은 앞으로 지구에 무수히 많이 찾아올 겁니다.”
아, 젠장.
“전에 말했죠? 아직 전이가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것, 이제 이해하세요?”
“네. 충분히, 과하다 못해 넘칠 만큼 이해해요.”
뭐 신나는 일, 어려운 일, 흥분되는 일이 없을까 기대하던 예전의 날 탓하고 싶다. 말이 씨가 된다고, 설마 이런 일들이 남아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원장님의 말은 아직까지 경기의 본라운드도 시작되지 않았다는 거잖아?
그거 정말…….
그날, 마츄들의 우리를 돌보고 포근이와 야옹이와 놀아 주며 마물원 일을 하는 동안에도 내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늦바람이 무섭다더니.’
이상하게 설ㅤㄹㅔㅆ기 때문이다.
걱정은 찰나였다.
전이가 시작되지 않았다는 말을 이해할 순 없으나 이상하게도 왠지 걱정되지 않고 기대되기 시작했다.
머저리 잉여 인간처럼 살던 예전의 나와는 다르게, 편의만 갖춰진다면 평생 좁은 방에 갇혀 지내도 괜찮을 것 같다는 병신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와는 다르게.
변한 세상에서 내 힘은 인정을 받는다. 그러니 난 더더욱 인정을 받고 싶다.
이게 늦바람이 아니고 뭐겠어?
*
# 기록1
사실 여의주의 기운은 파르바티가 말한 것처럼 정순하기만 한 기운은 아니다.
더없이 깨끗하여 어떤 기운과도 어울리는 건 사실이나 변덕이 심해, 만에 하나의 경우로 여의주에게 선택을 받지 못했다면 흡수에 실패하여 폭발할 수도 있다.
# 기록2
청동 잉어 바루나는 다정을 죽이려는 게 아니었다.
만약 죽이고자 했으면 다정은 일찍이 죽었을 것이다. 일부 신수들은 그에게 호의적이며 바루나도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