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검은 사제 (4)
“살았다.”
왼팔을 잃고, 몸은 만신창이지만 살긴 했다. 끔찍한 고통과 머릿속에 가득한 열기로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지만, 이 악물고 참아 냈다.
세상이 아직 검었기 때문이다.
금방 도로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이트메어를 죽였음에도 세상은 여전히 흑색이었다. 조바심이 나 지친 몸을 이끌고 신부 곁으로 돌아갈 때였다.
[그러나 죽기 직전에 시공간이 통용되지 않는 그림자 세계의 동족들을 불러 순식간에 한곳으로 집결하는 성질을 지녔다.]
하늘을 보며, 도감의 구절이 생각났다.
“한곳으로 집결하는…….”
나는 하늘에서부터 쏟아지는 검은 유성우들을 바라봤다. 작은 나이트메어를 죽여, 큰 나이트메어가 나타났다. 그러니 큰 나이트메어를 죽이면.
거대한 검은 말, 수백 마리의 그림자가 치솟는 모습에 나는 발버둥 칠 힘도 생기지 않았다.
오리하르콘 브로치를 꽉 쥐었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이미 포기했다는 걸. 한 마리의 나이트메어도 버거운 내게 수백 마리의 나이트메어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광경은 절망적이었다.
신부님이 있으니 가톨릭적으로 비유하자면 그래, 이건 묵시록적인 나의 종말이다.
움직일 힘도 없이 쓰러졌다.
고개를 살짝 들어 놈들을 바라봤다. 나이트메어들은 순식간에 기척도 없이 내 곁에 나타났다.
놈들은 검은 연기로 나를 들어올렸다. 마치 바닷물에 몸이 넘실거리는 느낌이었다.
“개새끼들. 먹을 거면 빨리 먹어.”
대자로 뻗어 기다렸으나 놈들은 검은 연기 같은 몸으로 나는 어루만지기에 바빴다.
이 거북하고 역겨운 행동이 그저 나를 차지하려는 나이트메어들의 조심스러운 다툼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 우연히 교감으로 인해 놈들의 속삭임을 들어서였다.
[내꺼… 야.]
[먹어. 맛있는. 이상한…….]
[그림자, 짙은 그림자. 먹어. 빛, 더 강해지는.]
[난 더 강해져. 빛, 빛을 먹고.]
놈의 말귀를 알아먹을 만큼 교감이 짙어져도 나는 놈들의 힘을 빌리지는 못했다. 당연했다. 놈들은 나를 잡아먹으려는 괴물들이니 힘을 빌려줄 턱이 없다.
“이, 개새끼들! 빠… 빨리 안 해?”
나를 잡아먹으려 다투는 놈들의 모습에 악이 차올랐다. 잡아먹히는 것도 억울한 판에 나를 차지하겠다고 지랄을 해 대는 꼴을 바로 밑에서 관람한다는 건 정말 개 같은 일이었다.
나는 한 놈이라도 조지겠다는 일념으로 오른손에 쥔 오리하르콘을 있는 힘껏 던졌다. 운 나쁘게 오리하르콘에 가격당한 나이트메어는 곧장 터져 버렸지만, 다른 그림자 괴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빈자리를 메웠다.
“끝… 났냐?”
마침내 가장 큰 덩치를 가진 나이트메어 한 놈이 붉은 촉수로 내 허벅지와 배를 꿰뚫었다.
이제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턱시도에 장착된 마취약을 모두 내게 투약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라도 잡아먹히는 공포를 맨 정신으로 대면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나는 꼼짝달싹도 할 수 없이,
그저 하늘만을 바라봤다.
어두웠다. 망할, 파란 하늘이라도 보고 죽고 싶었는데.
아그작-!
마취를 했어도 청각은 멀쩡했다.
나는 뼈가 부러지는 소리에 두 눈을 꽉 감았다. 어디부터 먹은 거냐? 두 다리? 배? 머리는 아껴 먹으려고?
까드득. 까드득.
소리는 실감나게 들려왔다.
마취를 한 게 오히려 잘못된 선택이었나 보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니 기절도 못했다.
까드득, 까드득. 내 몸에서 나는 최악의 소리. 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소리는 계속 되었고 놈은 아껴 먹는 타입인지 한참이 걸리기에, 그만 눈을 뜨고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
무어라 말을 하지 못했다.
그냥 신음만이 나왔다.
고통도, 공포도, 좌절이 담긴 것도 아니다. 그냥 어이없어서 놀라고 말았다.
“너, 야옹아.”
내 배 위에 야옹이가 있었다.
녀석은 무엇을 야금야금 씹어 먹었다. 나는 녀석의 입 안에 있는 게 작은 말처럼 생겼다는 걸 깨달았고, 이내 나를 둘러싼 수많은 나이트메어가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마취가 풀리지 않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죽을힘을 다해도 고개만 움직일 뿐이었다.
“대체?”
내 고개는 야옹이의 움직임을 따라갔다. 야옹이는 이 와중에 고양이가 내는 트릴링(trilling) 울음소리를 냈다. 고양이들이 기쁘거나 행복하면 저런 소리를 냈었지?
가만히 보니 녀석은 무엇을 사냥하고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라봤다.
“신이시여.”
결국 나는 믿지도 않은 신을 찾고 말았다. 야옹이가 사냥하여 입안에 주워 담고 있는 건 그림자로 이루어진 작은 말, 나이트메어들이었다.
대체 어떻게 집채만 하던 나이트메어들이, 야옹이의 입에 들어갈 만큼 작고 앙증맞은 사냥감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지금 상황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죽기 직전에 나를 구해 준 야옹이, 녀석이 저택 입구에서 알짱거리긴 했지만 설마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나이트메어는 뭔데 야옹이에게 씹어 먹히고, 야옹이는 뭔데 나이트메어를 씹어 먹는가? 생각해 보면 야옹이는 캣 맘에게서 받은 마물이며, 마물 박사인 원장님조차 잘 알지 못하는 유일한 마물이었다. 내가 속을 읽지 못하는 유일한 마물이기도 했고. 녀석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는 녀석이 무엇을 먹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야옹이는 생물이라면 필요한 에너지 섭취를 하지 않았지만, 알지 못하는 마물이니까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근데 먹을 게 없어서 나이트메어를 먹는다고? 골치가 아팠다.
아무튼 지금 상황은 마치 끔찍한 악몽을 꾸다가, 갑자기 어린 아이의 장난 같은 꿈으로 넘어가 버린 것 같았다.
냥냥-!
녀석은 입에 나이트메어를 물고 내게 왔다. 당황하며 바라보니 마치 칭찬해 달라는 듯 내 앞에 나이트메어를 가져다 놓았다.
“으응. 잘했어. 빨리 먹기나 하렴.”
꿈틀거리는 나이트메어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얼른 야옹이를 보챘다. 녀석은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내며 나이트메어를 날름 삼켰다.
사태는 어이없게, 싱겁게, 간결하게 정리되었다. 이곳에 모인 모든 나이트메어, 뭣 때문인지 작아진 나이트메어들은 빠짐없이 야옹이의 먹잇감이 되었다.
야옹이가 모든 나이트메어를 삼키자 세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아니, 우리들이 원래의 세계로 돌아온 거겠지.
내게 공격이 집중되어 신부님도 소녀도 다치지 않았다. 이내 정신을 차린 신부님이 날 보며 경악하더니 구급차를 불렀다. 나는 사양하며 통신기를 가리키며 ‘파고의 성자’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끄으으!
원장님이 도착하기도 전에,
마취가 풀리자 끔찍한 고통이 몰려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 뺨을 핥아 주는 야옹이를 바라보며 정신을 놓았다.
*
일주일이 흘렸다.
원장님의 마법으로 팔을 다시 복구하고, 몸의 뼈도 다시 붙었다. 하지만 후유증이 상당해 앞으로 한 달 동안은 병자로 살아야 했다.
“대체 저 녀석은 뭘까요?”
관리실 소파에 앉아 태연히 그루밍을 하던 야옹이. 내 말에 밤하늘 같은 눈동자로 날 바라본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눈 키스를 해 줬다. 녀석도 화답하며 눈 키스를 한다.
“그동안 조사를 해 봤어요. 아주 오래된 고대의 서적까지 들추어 보면서요.”
원장님이 말했다.
“아마도… 형체가 없는 세계에서 온 존재인 것 같아요.”
“형체가 없는?”
“옛 현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림자의 세계보다 더 깊은 곳이 존재한다더군요. 하지만 고대의 어떤 날을 기점으로 그곳은 어떤 이유에선지 갈 수가 없는 세계가 되었고, 그곳에 살던 모든 존재들도 멸했다고 전해져요.”
“그럼 야옹이가 혹시…….”
“네. 만약 살아남은 존재가 있다면, 아마 저 고양이가 아닐까 싶어요.”
결국 원장님도 야옹이에 대해서 모든 걸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저 지금은 멸망한 어떤 차원에서부터 온 존재라고 했다.
그루밍을 끝마친 야옹이는 내게 달려와 내 머리카락을 그루밍해 주기 시작했다. 고양이들 사이에서는 서열이 높은 고양이가 아래의 고양이에게 그루밍을 해 준다고 하지만… 뭐 어때.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야옹이가 어떤 존재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고맙다.”
녀석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도,
어떻게 나이트메어들을 작게 만들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녀석이 나를 좋아하고, 나도 녀석이 좋다. 그건 야옹이가 어떤 마물이었다고 하더라도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
몸이 다 낫고 오랜만에 마물원으로 출근할 때였다. 원장님은 출근한 나를 곧바로 어느 어두컴컴한 마물 우리로 안내했다.
그곳에 놈이 있었다.
마법적인 감옥에 갇힌 놈.
“으윽, 원장님?”
놈을 보자마자 왼팔이 시큰해졌다. 젠장, 나이트메어가 왜 여기 있어?
작은 나이트메어 한 마리밖에 없었지만, 흉측한 기운에 절로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 내게 확실한 트라우마를 남긴 놈이다.
“봐요.”
원장님은 씩 웃으며 나이트메어를 가둔 감옥 문을 열었다. 나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지만 원장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으로 나이트메어를 들어올렸다.
끼끼-!
나이트메어가 발버둥 치나 드래곤의 손아귀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이트메어라, 흐음. 드래곤도 악몽을 꿀까? 오히려 악몽을 두들겨 패지 않을까?
“제가 이 조그마한 녀석을 찾기 위해서 몇 개의 차원을 헤집었을까요?”
뜬금없는 원장님의 질문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대답해 봐요.”
그녀가 대답을 보채자 나는 눈썹을 씰룩거리며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다섯 개쯤 된답니까?”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날 놀리거나 재밌는 일을 앞두고 보이는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었다.
“3,600개요!”
“…3,600개의 차원이요?”
“그것도 아주 간신히. 다정 씨에게 남은 흔적을 통해서! 이제 그림자 세계, 그 추상적이던 마물들에 대해서 보다 본격적인 연구가 가능하게 됐어요. 고마워요, 다정 씨. 의도치는 않았지만 덕분에 정말 값진 선물을 받았어요.”
“네네. 덕분에 난 죽을 뻔했죠.”
“에이, 보상은 두둑하게 줬잖아요.”
그녀 말대로 정말 두둑하긴 했다.
내 몸을 고치며 몇 가지 영약을 투여해 줬으니까.
원장님은 바동거리는 나이트메어를 휙 감옥에 던져 놓고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녀석은 다정 씨를 공격했던 나이트메어와 같아요. ‘분노’의 악몽. 앞으로 며칠간은 조심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후유증 말씀이신가요?”
“네. 육체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인 영향. 저번에도 말했죠? 다정 씨의 ‘교감’의 힘이 강해지며, 마물에게 영향을 끼치는 만큼 다정 씨도 마물에게 많은 영향을 받게 됐어요. 그런데 분노의 사령과 엮였으니 꽤 심각할겁니다.”
나는 내 몸을 둘러봤다. 괜히 팔을 빙빙 돌려보고 발목을 돌렸다. 몸은 멀쩡히 다 나은 것 같았다.
“괜찮은데요?”
원장님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진 몸을 회복시키는데 정신을 소모하여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이제 몸이 나았으니 점점 정신이 오염될 겁니다. 며칠간 휴가를 드릴게요. 웬만해선 바깥에 외출하지 마시고 집에만 있으세요. 그리고… 아마 가구들은 지금 새로 주문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다정 씨가 다 부숴 버릴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