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바캉스 (2)
섬은 물론 연해 바다에도 마물은 물론 이종족도 없었다. 섬에는 오로지 사람들만 산다. 이종족을 싫어하는 다소 레이시스트, 아니 종족 차별 주의적인 곳이지만 나는 다른 이유에서 왔다.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 정말 한 마리도 없구나.”
바로 마물을 피하기 위해서 찾았다. 이제 도심의 길거리에서 흔히 마물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섬에는 보이지 않았다.
마물이 싫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 능력이 강화되며 마물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만큼, 가끔씩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다른 곳을 들리지 않고 곧장 예약한 리조트로 향했다. 오로지 힐링만이 목적이기에 밤에 열리는 축제를 제외하고는 리조트에만 있을 예정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곧바로 방에 들어와 여행 가방을 던졌다.
“흐아!”
오랜 비행으로 피곤해진 몸을 침대에 누이자마자 잠이 몰려왔다. 나는 잠결에 속옷과 팔찌까지 다 벗고 곧바로 곯아 떨어졌다. 그리고 오랜만에 꿈을 꾸게 되었다.
꿈을 꾸고 있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아니라 곱슬머리의 외국인이 되어 있었다. 이내 내가 꾸는 꿈이 1986년도 영화 플라이(The Fly) 속이라는 걸 깨달았다. 전송기를 발명한 나는 우연히 실험을 하다 파리와 몸이 합성되어 버린다. 그 후 몸이 변하고 유연해질수록, 힘이 세지고 성격이 난폭해진다.
그러다가 점점 흉측한 형상으로 변하고, 결국 이성을 잃은 파리 인간이 되어…….
쾅-!
나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끔찍한 악몽에서 나를 깨워 준 건 문이 부서져라 두들기는 노크 소리였다.
쾅쾅쾅-!
악몽에서 깨워 준 건 고맙지만 바깥의 손님은 예의가 너무 없었다.
“벌써 청소 시간인가?”
창문 밖을 보니 날이 저물어 있었다. 나는 청소 아줌마가 다소 신경질적이라고 생각하며, 대충 옷을 걸쳐 입고 문을 열어 줬다.
“응?”
어이없어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문을 열자마자 내 이마빡에 총구를 겨누는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방탄복과 이어마이크를 착용하고, 얼굴을 검은 마스크로 가린 그는 훈련받은 전형적인 용병으로 보였다.
남자는 윽박지르며 말했다.
“come here!”
이젠 괴한이 총을 들이대는 상황이라도 솔직히 무섭지 않았다. 그냥 상황 자체가 어이가 없어 곧바로 반응을 하지 않았다.
이상한 상황이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이곳에 무장 강도라니?
“fuck!”
내가 멀뚱히 서 있기만 하자 심기에 거슬렸나 보다. 괴한은 내 어깨를 붙잡고 끌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내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위협을 해도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장담하건대 내가 새끼손가락으로 팔씨름을 해도 녀석을 이길 수 있을 거야.
“come here! ching chong!”
“뭐야? 욕한 거야?”
인종 차별까지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평소의 나라면 당장 녀석의 이빨을 분리시켜 공기놀이를 했겠지만, 나이트메어에 당한 후유증으로 몇 년 치 울화를 한 번에 폭발시키고 난 후라서 그런지 담담했다.
일단 녀석이 시키는 대로 따라 나갔다. 복도는 이미 난장판이었다. 무장 강도는 한 명이 아니었다. 투숙객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는 괴한들의 수는 얼핏 봐도 열댓 명에 다다랐다.
‘평범한 강도들이 아니야. 몇 놈은 마나도 느껴져. 근데 왜 이 섬에?’
단지 리조트를 털기 위한 강도라기에는 무력이 뛰어난 용병들이었다.
‘카르마?’
의아함은 곧바로 풀렸다.
나는 복도 끝에서 상황을 지휘하는 용병을 마주했다. 놈은 잔챙이가 아니었다. 꽤 강한 마나를 지닌, 힘깨나 쓰는 능력자.
놈의 방탄복 가슴팍에는 어떤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카르마 길드를 뜻하는 ‘업’ 문양이었다.
내 가슴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저놈들이 카르마 길드라는 걸 안 순간 지금 벌어지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턱시도와 통신기도 챙겨 오지 못했다. 입고 있는 옷은 총탄을 막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놈들을 다 제압할 수는 있을 것이다.
‘사람이 너무 많아.’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몇 명의 투숙객이 죽을지 몰랐다. 인질이라도 원했던 걸까? 흉악한 명성과는 달리 놈들은 투숙객들을 데리고 호텔 로비로 향했다.
나는 일단 놈들의 목적을 알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여느 때와 달리 차분해진 내 마음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냥 지나가라.
나중에 원장님에게 일러 줄 테니까 나를 귀찮게 하지는 마.
그런 심정이다.
호텔 로비에는 더 많은 헌터들이 있었다. 놈들 대부분은 소총을 지닌 용병이었으나, ‘업’ 문양이 새겨진 방탄복을 입은 헌터들은 창칼과 같은 냉병기를 들고 있었다.
특히 강해 보이는 자가 창잡이 두 명과 칼잡이 한 명으로, 총 세 명. 난 이들의 움직임을 살피며 지시대로 따랐다.
‘엿같이 흘러가면 우선 칼잡이 놈부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면 했지만, 잠자코 당할 생각도 없었다.
내가 눈치를 살피던 사이 모든 투숙객과 리조트 직원들이 호텔 로비에 모였다.
“don’t move!”
이들은 우리더러 엎드리라고만 했다. 다른 짓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귀금속과 돈을 달라고 하든가, 건물에 폭탄을 설치하는 테러를 한다든가.
‘하긴 카르마 길드가 그런 조잡스러운 놈들도 아니고.’
마물 경매, 콘테스트, 경마장, 마물 서식지 점거. 놈들은 노는 물이 달랐다. 이런 허접한 강도짓을 할 새끼들이 아니다.
뭔가 다른 목적이 있음이 분명하다.
“때는 언제지?”
“대장의 지시를 기다려.”
놈들은 우릴 한곳에 모아 놓고 잠자코 기다렸다. 그들은 인질들에게 들리지 않게 먼 곳에서 얘기했지만 내 귀에는 다 들렸다.
“곧 발생한다. 스프레이 작동 준비나 해.”
때를 기다려? 곧 발생한다고?
뭔가를 기다리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어떤 작당 모의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물과 이종족이 없는 이 섬에서 뭘 기다리는 거지?
*
한 시간쯤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세 명의 대장 헌터들의 지시에 놈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기계를 리조트 마당에 설치했는데, 폭탄 같지는 않았다.
놈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건 기다란 대검을 든 대장 헌터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대방주님이 예언하신 시간이다. 전이를 대비하라.”
전이.
그 한 단어에 나는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전이는 예상할 수 없는 천재지변에 가깝지만 모든 정부와 길드는 은근슬쩍 전이를 바랐다.
심지어 전이가 일어난 곳을 차지하기 위해 국토 분쟁까지 일어난다.
위협 대응을 위해?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의미가 조금 달랐다. 비유하자면 석유 매장지라고 해야 할까. 전이로 튀어나온 이계 비경이 오리하르콘 광산이라면? 이계 마물이 ‘세이렌’처럼 믿기지 않을 힘을 안겨다 준다면?
대전이 이후 20년이 훌쩍 지났다.
이제 영리한 인간은 전이를 이용할 줄 알게 되었다.
‘카르마 길드가 전이를 노린다. 어떻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이를 예측할 수는 없었다. 전이가 날씨 상황처럼 기상 일보로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드래곤’인 원장님이 아니고서야 인간들은 결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놈들의 움직임은 전이가 일어날 것임을 확실히 예상하고 있는 눈치였다.
젠장,
이렇게 되면 잠자코 지나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분명 이 상황은 원장님이 몹시도 궁금해할 상황이겠지. 그녀에 대한 충성심(돈 주는 사람에 대한 충성심)으로 나는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시작되었다.’
기계가 설치된 리조트 마당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멀쩡하던 나무가 말라 비틀어지고, 돌이 풍화되어 먼지로 흩날렸으며, 그곳만은 ‘밤하늘’이 아닌 태양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쿠쿠쿵-!
휘몰아치며 한곳으로 집중되는 마나. 그 광경에 헌터들이 미소를 짓는다.
“마나 대기 농도 15,000% 상승 중, 전이가 시작되었습니다!”
“굉장하군.”
전이의 징조는 더욱 커져 갔다. 마침내 앞마당의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계 비경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휘몰아치는 마나는 공간을 찢었고, 주변을 무너트리며 재정립시켰다. 마치 원장님의 공간 이동 마법처럼.
‘위험해. 대규모 전이다.’
처음엔 침착히 구경하던 나는 전이가 진행될수록 경악에 찼다.
전이가 일어나는 광경은 나도 몇 번 겪어 본 적이 있다.
원장님을 따라 전이가 시작되는 곳을 따라갔었다. 작은 전이는 주변 풍경을 바꾸지 않고, 기껏해야 전이에 휩쓸린 마물이나 이계 문물이 하나둘 튀어나오는 수준이다. 그러나 전이 규모는 클수록 지구의 환경마저 바꾼다.
인천에 있는 마물 경주 경기장처럼 ‘섬’이 생겨나는 대규모 전이도 있었다.
나는 지금 일어나는 전이가 그 정도 규모라고 짐작했다.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마나와 지형 자체가 바뀌고 있는 현상.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경험상 전이가 클수록 위험한 마물이 튀어나왔다.
‘헌터들은 지금 상황을 몰라. 저 새끼들은 감당하지 못할 거야.’
카르마 길드의 헌터들은 제법 강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전이를 감당할 만큼 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 움직일까?’
속옷도 없이 샤워 가운만 입고 있어, 나는 원장님을 부를 수도 없었다.
내가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시작된 전이는 ‘원장님이라도’ 막을 수 없었다.
크르르-!
망설이고 있을 때 완전히 이계 비경으로 변해 버린 리조트 앞마당에서 섬뜩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전이에 휘말린 첫 번째 마물이 나타난 것이다. 놈은 흉포한 성질을 가진 육식 마물이었다. 기다란 송곳니가 여섯 개나 나 있는 거대한 입을 가진 마물, 나는 녀석을 마물원에서 이렇게 불렀다. 빅 마우스.
마물원에서도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놈이었다.
굶주린 놈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리조트 안의 사람들을 발견하자마자 거칠게 뛰어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헌터들이 설치한 기계에서 붉은색 안개가 분사되었다. 안개에 닿자 놈은 기겁하며 코를 실룩거렸다.
크르르……!
녀석은 낮은 울음소리로 위협할 뿐 안개가 분사되는 기계를 넘어가지 못했다, 사각의 링처럼 네 군대에 설치한 기계는 빈틈없이 안개를 분사하여 빅 마우스를 가뒀다.
‘가두는 건가? 하지만 소용없다. 약을 바짝 올릴 뿐이야.’
예상대로 빅 마우스가 몸의 털을 바짝 세우며 다시 뛰어올 준비를 했다. 처음에 당황했을 뿐, 점점 냄새에 익숙해진다면 빅 마우스에게 안개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까악!
헌터들이 두려워 엎드려만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도망친다.
탕! 타타탕-!
혼란을 잠재운 건 요란하게 울러 퍼진 총성이었다.
“가만히 엎드려 있어. 먼저 죽기 싫으면.”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쩔 수 없이 놈들의 말에 따라야 했다.
얌전히 엎드리는 사람들, 하지만 나는 혼자 꼿꼿이 서서 놈을 노려봤다.
“우릴 먹잇감으로 삼게?”
헌터들이 총구를 겨눴지만 나는 무섭지 않았다. 당돌한 태도로 연신 소리를 지르는 헌터들을 대했다.
“떽떽 거리지 마. 그냥 물어보는 거잖아.”
놈들이 방아쇠를 당기려던 찰나에, 검을 든 헌터가 나섰다. 그는 예전에 내 팔을 자른 창잡이 놈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너, 일반인이 아니군.”
탕-!
그리고 말을 끝마치자마자 동료 헌터의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내게 쐈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