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그녀의 공간.
‘원장실’
곁으로는 평범한 방이나 그곳의 문을 강제로 여는 것은 드래곤이라도 불가능하다. 오로지 그녀가 허락해야지만 출입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이다.
“어쩜, 위기를 몰고 다닌담.”
파르바티는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에누아산 커피를 홀짝였다. 그녀가 대형 스크린 ‘TV’로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는 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한 한 남자였다.
팝콘만 있으면 영화를 관람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TV 안의 화면은 실제 상황이다.
화산을 터트리는 불의 어룡과 대치한 남자는 그녀가 아끼던 ‘가디언’
분명 위기였으나 그럼에도 파르바티는 전혀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묘한 미소를 짓는다.
“언제나 그랬듯, 날 만족시켜 줘요.”
그녀는 책장에 손을 뻗어 낡은 일기장을 꺼냈다.
그리곤 한 장의 페이지를 꺼낸다.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양해陽海의 어룡들에게 뚜렷한 약육강식의 섭리가 있었는데, 힘의 논리는 ‘큰 놈’이 ‘작은 놈’을 잡아먹는다는, 철저하게 ‘몸집’에 의해 분류되었다. 그러나 ‘샐러맨더’들만은 달랐다. 그들은 덩치가 작아 양해의 가장 손쉬운 먹이였음에도, 어룡들은 샐러맨더를 건드리지 않았다.
어떻게, 왜?
샐러맨더들은 어떻게 해서 어룡의 잔인한 먹이 사슬에 엮이지 않았을까?
나는 ‘지구’에 나타난 샐러맨더들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양해의 주인에게 몇 가지 선물을 주고, 다른 세계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은 불의 바다에서도 여유롭게 그들을 관찰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샐러맨더의 생태에 대해 관찰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나는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그들은 영역을 굉장히 소중히 여겼다.
때로는 무모하게 보일 지경으로 말이다.
용암 바다의 깊은 심해에 사는 거대한 어룡에 맞서기도 했다. 일반적인 양해의 먹이 사슬 구조라면, 크기가 샐러맨더의 수십 배나 되는 어룡이 샐러맨더를 몰살에 가깝게 잡아먹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승자는 샐러맨더였다.
나는 처절한 투쟁의 현장에서 단순한 이치를 깨달았다.
샐러맨더들이 제 덩치의 수십 배나 되는 어룡에 맞서 양해陽海에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굉장히 흥미로운 종의 특성에 있었다. 양해의 어룡들은 몸을 이루는 대부분이 ‘불의 기운’이다.
큰 불에 촛불이 삼켜지듯 몸집이 클수록 품은 불의 기운이 많아, 확실한 먹이 사슬을 구축했던 것이다. 그러나 샐러맨더들은 불의 기운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 불의 존재들은 결코 녀석들을 해치지 못할 것이다.]
때로 용이 기록한 ‘일기’라고 할지라도, 그 사실 자체는 진리가 되었다. 따라서 그녀의 이론은 틀린 게 되었다.
자신의 가디언이 이름 지은, ‘포근이’라는 샐러맨더. 평범한 개체였으나 자라오며 ‘불꽃’의 양이 변화했다.
그렇다.
진리가 비틀렸다.
결코 변해서는 안 될,
샐러맨더의 힘이 바뀌었다.
그 남자에게는 그걸 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다.
‘용들의 주술사’ 파르바티는 그 힘을 알고 싶어 했다. 그러기 위해서 소소한 희생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
그러나 침착하게 화면을 보던 파르바티는 그만 일기장을 놓치고 말았다. 어룡에 삼켜지는 자신의 가디언의 모습에 그녀의 손가락은 작게나마 떨리고야 말았다.
“으!”
그 뒤로 여러 번이나 파르바티의 엉덩이는 들썩거렸다.
*
“으아아아!”
놈에게 삼켜진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칼을 휘둘렀다. 젠장, 눈 깜짝할 사이에 먹히고 말다니!
다행인 것은 놈의 ‘신체적’ 능력이 생각보다 위협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 발버둥에 놈은 곧바로 아가리를 벌려 나를 토해 냈다.
“하아, 크아악 ㅤㅌㅞㅅ-! 포근이가 있어서 망정이지.”
순식간에 놈의 아가리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엿 같네.”
온몸에 묻은 붉은색 ‘액’, 놈의 아가리에 그득했던 불타는 타액.
끈적끈적한 타액에 뒤덮인 나는 불쾌함과 섬뜩함을 느꼈다.
턱시도와 몸을 제외하고, 통신 기구와 공간 이동 마도구까지 모두 녹아내린 것이다. 포근이의 힘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역대 가장 강렬하게 발휘되지 않았다면, 나도 ‘녹아내렸을지도’ 모르겠다.
쉬이이-
놈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무정해 보이던 눈빛에는 확실히 노기가 깃들어 보였다.
놈은 다시 나를 삼키는 대신, 아가리를 벌린 채 나를 바라만 봤다.
‘온다.’
그 모습에 온몸이 삼켜지던 공포보다 더한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공포를 느낀 건 놈의 생김새나 덩치, 육체적인 힘이 아닌, 마나가 제법 많아진 나조차도 읽을 수 없는 무지막지한 마력이었다.
‘브레스?’
놈은 그 막대한 마력을 투박한 방법으로 사용했다. 브레스! 몇 종의 마물과 ‘이종’이 사용하는 공격 수단. 가장 유명한 건 역시 드래곤이겠지.
불의 어룡의 주변으로 용암이 치솟는다. 휘몰아치는 용암과 불꽃이 모두 놈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용암은 마나가 결합하는지 용솟음치는 마력이 느껴졌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저 브레스가 분출된다면 앞에 놓인 모든 것들은 흔적도 없이 녹아내릴 거야.
내가 택할 수 있는 행동은 간결했다. 무조건 도망치는 것.
샐러맨더들은 용암의 바다 밑으로 몸을 파고들었다. 나도 녀석들을 따라갔다. 양해의 바다, 붉은 바다. 온통 새빨개, 마치 지옥의 업화와 같은 곳이지만 어룡의 브레스에 비하면 따뜻한 햇볕 같을 것이다.
‘그럼 그렇지, 망할 새끼.’
조금은 안심하며 위를 올려다본 때였다. 브레스는 멈추지 않고 쏘아졌다. 용암과 불꽃을 휘감으며, 양해의 바다를 가르며.
저건 용암 바다도 막아 주지 못해.
결국 피할 재간 없이 견뎌 내야 했다. 견뎌 낼 수 있을까? 내가?
포근이는?
“포근아!”
녀석은 이미 내 쪽으로 헤엄쳐 오고 있었다. 브레스가 덮치기 전, 나는 포근이를 꾹 안았고 어쩌면 ‘진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포근이의 온기를 느꼈다.
끄앙.
녀석도 내 온기를 느끼려는 듯 내 품으로 더 깊게 안겨 들었다.
마침내 어룡의 브레스가 나와 샐러맨더를 덮쳤다. 나는 죽음의 순간에서 온기만을 느끼며, 그래도 편안한 죽음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는데.
젠장.
*
눈을 떴다.
너무 이상했다.
기적적으로 살아나든가,
원장님이 구해 주러 오든가.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대충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어떤 기적도 없었다.
“멀쩡하잖아.”
용암마저 불태울, 막대한 마력이 담긴 브레스가 내 몸을 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몸은 너무나 멀쩡했다.
머리카락 한 올 타지 않았다.
뀨앙!
포근이도 마찬가지다.
녀석의 피부는 매끈하다 못해 윤기가 좔좔 흐르는 것 같았다.
게다가 다른 샐러맨더들도 멀쩡하다.
“왜?”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사실 정답은 있었다.
그 답을 나도 알고 있었다.
샐러맨더들이 도망가기에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 샐러맨더는 불꽃과 용암에서 태어나 용암에서 살아가는 마물.
제아무리 양해의 바다의 주인인 어룡이라고 할지라도 불꽃을 토해 내는 한 셀러맨더는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건가?
나 또한 샐러맨더 무리의 곁에서 교감의 힘이 강렬히 발휘되어 멀쩡하고?
곰곰이 생각하던 그때였다.
이제 어룡이 바다 아래까지 ㅤㅉㅗㅈ아와 브레스를 준비했다. 나는 방금 전보다 침착하게 공격을 대비했다.
“어디 한번 해 봐라.”
그저 놈이 찍 뱉어 내는 침에 지나지 않을지, 아니면 나를 녹여 버릴 공격이 될지.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알아보기로 했다.
크롸롸!
다시 한 번 쏟아진 브레스는 전보다 더 컸다. 하지만 이제 샐러맨더들은 도망치지도 않았다.
마침내 브레스가 내 몸에 적중했다.
“오오, 프레시한걸.”
기묘했다.
오히려 기분이 좋다.
따뜻한 물로, 제법 수압이 강한 샤워기로 샤워하는 것 같았다.
놈의 공격이 해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안 순간 나는 급격히 대범해졌다.
“뱀 눈깔 새끼, 또 해 봐!”
교감이 이럴 때 좋다.
마물이라고 할지라도 놈은 내 말을 모두 알아듣겠지.
격분하던 놈이 브레스를 또 분출했지만 나는 몸의 구석구석을 씻는 척, 연기까지 하며 여유를 부렸다.
결국 참지 못한 놈이 다시 아가리를 벌리고 덤벼든다.
흥, 그런다고 겁먹을까?
다시 생각했지만 놈의 육체적인 힘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저 막대한 마력과 브레스가 통하지 않는 이상 그냥 덩치 크고 성격 더러운 뱀 마물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아가리를 들이미는 두 개의 뱀 머리를 피하며 기회를 노렸다. 오히려 양해의 바다가 움직이기 더 편했다. 사방에다가 위아래로 피할 수 있으니 하늘을 나는 느낌이다.
‘뱀 대가리들이 꽤 재빨라.’
아무리 그래도 어룡은 어룡.
기회를 엿보나 쉽게 틈을 찾지 못했다.
끄앙!
그때였다.
괴물 샐러맨더 우두머리를 일격에 제압했던 포근이의 ‘브레스’.
그때보다 훨씬 강력하고 막대한 기운이 응축된 브레스를 포근이가 쏘아 냈다.
두 번째 보는 거지만 정말 놀랍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쓰는 거야?
쿵!
포근이의 브레스도 마찬가지로 어룡에게 어떠한 피해는 입히지 못했으나 잠시 행동을 멈추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그 즉시 나는 어룡에게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으악!”
포근이의 도움으로 수월하게 놈의 왼쪽 머리를 칼로 댕강 잘라 냈다.
그래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생각보다 너무 잘 잘려서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크롸롸-!
머리가 잘려 나간 어룡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다 도망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훨씬 싱거운 놈이었다.
하지만 나는 놈을 ㅤㅉㅗㅈ아가서 죽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잘려 나간 머리가 점점 ‘재생’되고 있는 꼴을 봤기 때문이다.
후우.
갑작스러운 싸움은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나를 너무 지치게 만들었다. 어룡의 기운이 사라진 걸 확인하자 온몸에 힘이 빠졌다.
내 몸은 점점 양해의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붉은 바다 아래, 검은 바다가 보였다. 하지만 왠지 안락한 기분이 든다. 잠시 이 기분을 느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끄앙.
하지만 포근이가 제 등에 나를 태우고 지면으로 솟구쳤다. 나는 씩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포근아, 친구들 온다.”
다른 샐러맨더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이제 포근이를 완전히 무리원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제 살을 포근이와 맞댄다.
어색해하던 포근이지만 기분은 좋아 보였다.
‘겨울날 전기장판 같아.’
나는 샐러맨더와 포근이의 등 위에 누운 채 생각했다.
포근이가 어릴 때부터 내게 찰싹 달라붙어 지내던 이유가 있었다.
샐러맨더들은 서로의 온기를 공유하는 걸 좋아했다.
잿빛 하늘과 용암 바다마저 포근하게 느껴졌다. 아마 이 기분은 영원히 잊지 않을 것 같다.
*
만족한 채 잠에 빠져든 남자를 보며 파르바티는 미소를 지었다.
“내게도 상식이란 게 있었던 걸까요?”
비록 포근이에게 몰래 ‘브레스’를 가르치긴 했어도, 정말 위급하다면 곧바로 샐러맨더들과 남자를 마물원으로 공간 이동시킬 마법진을 몰래 포근이에게 새겨 넣긴 했어도.
정말 진취적인 결과물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날 어디까지 놀라게 할 샘인지. 후후.”
용이자 주술사인 파르바티가 이렇듯 고양된 이유가 있었다.
샐러맨더들이 순수한 불꽃을 내뿜는 어룡의 마력에 비교적 영향을 받지 않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대상을 태워 죽이기 위해 쏟아 내는 브레스는 경우가 달랐다.
보통의 경우에는 용암에 사는 샐러맨더라도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리고 만다.
그러니 이번 ‘이변’은 모두 저 남자가 가진 기이하고 놀라운 힘에 있었다.
교감이라 이름 지었지만 보다 고차원적인 그 힘.
포근이를 비롯하여 순식간에 다른 샐러맨더들마저 어룡의 불꽃에 견딜 만큼 마나를 ‘증폭’시켰던 힘.
진리를 벗어난,
용마저 놀라워하는.
“모든 힘에는 뿌리가 있지요. 꼭 알아내 드릴게요, 다정 씨.”
파르바티는 용들 사이에서 일찍이 괴짜로 통했다. 비교적 착한 쪽에 가까운 마음씨를 제외하고도, 그녀는 유독 병적으로 진실에 집착했다.
그리하여 캐면 캘수록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다정의 능력은 그녀의 본성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과연 그녀가 알아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