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출가 (5)
원장님이 도착했다.
연락이 안 되어 와 봤다며, 별일 없냐고 물어보는 질문에 나는 담담히 무지막지한 사건이 있었다고 말했다. 산재 신청은 거르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원장님은 포근이와 작별 인사를 하라며, 나에게 공간 이동 마도구를 주고는 다시 가 버렸다.
“크흡.”
헤어질 때가 왔다.
의외로 담담한 것 같았다.
그냥 2년 동안 지낸 친구.
그리고 자식과도 같은 존재.
2년이면 내가 살아온 삶의 10의 1도 되지 않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정이 들었다면 얼마나 들었을까.
그리고 완전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다. 보고 싶으면 원장님에게 부탁해서 오면 되잖아.
…그러면 되잖아.
“크하흡.”
담담하긴,
개뿔.
눈물이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와, 나는 꼴사납게 울고 말았다.
담담한 건 오히려 포근이였다.
같이 가자고 매달리면 어쩌지 생각했으나 이곳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러지는 않았다.
녀석은 빨간 혓바닥으로 내 뺨을 핥았다.
“잘 살아, 인마.”
나도 마지막으로 녀석의 뺨을 문질러 주던 그때였다.
“너…….”
포근이의 눈가에 고인 붉은 물방울, 천천히 흘러내려 양해의 바다에 닿았을 때 작고 붉은 구슬이 되었다.
‘눈물?’
포근이가 흘린 붉은 구슬.
나는 구슬을 주머니에 챙기고, 포근이를 꽉 안아 줬다.
2년 전에 어미를 잃고 태어난 새끼, 그때의 나는 무슨 생각으로 마물의 새끼를 키우겠다고 말했던 걸까? 그땐 지금보다 어수룩했는데.
그 아이가 이젠 자라나 내 품을 떠난다.
정말, 슬프고도 기쁜 날이다.
*
마물원으로 돌아온 지 일주일.
포근이가 없는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항상 아침은 녀석의 밥을 챙겨 주고, 한바탕 놀아 주는 걸로 시작했는데.
이제 아침에 딱히 할 일이 없어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어머, 그게 뭐예요?”
손으로 빨간 구슬을 가지고 요리조리 장난치고 있자 원장님이 묻는다.
“아, 이거요? 포근이가 흘린 건데… 이게 뭘까요?”
“잠시 보여 주실래요?”
구슬을 받아 든 그녀는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갑자기 특유의 ‘신났을 때 하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원장실로 향했다.
“뭐야?”
이어 원장실에서 나온 원장님은 이 구슬이 ‘진주’라고 말했다.
“진주요? 그건 조개가 만들어 내는 보석이잖아요?”
포근이가 흘린 건데 왜 진주라고 말하지? 원장님이 설명했다.
“다소 미적으로 표현한 거죠. 사실 ‘노폐물 덩어리’예요.”
“노폐물이요? 윽.”
포근이가 남긴 구슬이 포근이의 노폐물이라는 거지? 그것도 모르고 포근이의 기운이 느껴진다며 계속 만지고 다녔는데.
“더러운 건 아녜요. 마물의 노폐물은 상당량의 ‘마물 찌꺼기’거든요. 마나를 가진 마물이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 낸 게 이 마물의 진주. 봐요, 영롱하게 빛나는 구슬 안에 휘몰아치는 마나를.”
확실히 포근이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더니, 착각이 아니었군.
이어 원장님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용조차 모르죠. 몹시 탐나지만… 어쩔 수 없죠. 이건 다정 씨가 가질 물건이니.”
나는 그녀가 건넨 구슬을 받았다.
용이 탐낼 물건이라고 하자 왠지 다르게 보였다. 하지만 절대 팔 생각은 없었다. 포근이의 선물인데.
“삼켜요.”
“네?”
절대 팔 생각이 없다.
그리고,
절대 삼킬 생각도 없다.
원장님은 농담이 아니라는 듯 다시 한 번 내게 말했다.
“그냥 둔다면 그저 작은 구슬일 뿐, 삼켜요.”
“아니, 방금 전에 이거 노폐물 덩어리라고…….”
“괜찮아요. 마물의 몸속에 있던 마물 찌꺼기라서 다정 씨에겐 괜찮을 거예요. 삼켜요. 포근이가 새끼 때부터 2년 동안 쌓아온 마나니까 많은 도움을 줄 거예요. 포근이도 그걸 원할걸요?”
으윽, 내키진 않았는데 결국 그녀의 사탕발림에 빨간 구슬을 사탕처럼 입에 넣고 말았다.
꽤 나쁘지 않았다.
빨간 맛이 나네.
웨에엑-!
그러나 구슬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나는 지옥을 맛봤다. 그래, 지옥을 ‘맛’본 것이다.
“엄청 매워요! 이게 뭐죠? 이거 가능한 캅사이신 수치인가?”
목구멍과 속과 입과 아니 온몸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
고통스러워하는 내 모습에도 그녀는 미소만 지었다.
“매운 게 아닌데요. 뜨거운 거죠. 호호.”
웨엑!
마침내 내 똥구멍마저 타들어 간다.
고통에 허덕이며 한참을 뒹굴었다.
겨우 뜨거운 매운 맛이 멈춘 건 속을 태우던 뜨거움이 아랫배 부근에서 사라지고 나서였다.
화륵!
그때였다.
내 입에서부터 불꽃이 흘러나온다.
화르륵.
비단 입에서만이 아니다.
귓구멍, 콧구멍, 심지어…….
다행히 턱시도를 입고 있던 터라 옷을 타지 않았지만.
“이게 뭣! 카아악!”
말하다 말고 불꽃을 토해 냈다.
내 모습에 퍽이나 재밌는지 원장님은 호호 웃기만 하더니 걱정 말라며 다독였다.
“힘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니까 염려하지 마요. 조금 있으면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 으음, 근데 그 눈동자는 안 돌아올지도 몰라요.”
눈동자?
“왜요? 카악! 뭐가 카악! 이상해요?”
“거울 봐요.”
나는 사방에 불꽃을 뿌리며 거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내 꼴을 확인한 순간 두 눈을 부릅떴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바라봤다.
“내 눈깔 색깔 왜 이런답니까?”
컬러 렌즈라고 낀 듯 내 눈동자는 붉게 변했다.
“적안이라, 멋있네요.”
멋있긴, 개뿔.
“안 돼요. 이건 진짜… 관종 같잖아.”
옛날에는 빨갛고, 파랗고, 보라색인 눈이 희귀하여 매력적이었다지만 전이로 인해 세상은 달라졌다.
빨간 눈 코스프레는 그냥 이종족을 숭배하는 멍청한 관종에 불과했다.
나는 관종과 같은 취급을 받기 싫었다.
다행히 붉은 눈동자는 시간이 지나자 불꽃을 토해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포근이의 힘을 사용하면 다시 눈동자가 붉게 변한다는 걸 얼마가지 않아 깨달았다.
‘힘은 더욱 강해졌긴 하지만…….’
포근이가 남긴 선물,
이제 포근이가 없지만, 오히려 포근이와 교감했을 때보다 훨씬 강력한 불꽃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쓸 때마다 관종이 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확실히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백발 브리지에 붉은 눈. 이러다 왼손에 흑염룡이라도 깃들겠네.’
문제는 힘이 강해질수록 내 모습이 점점 바뀐다는 것. 왜 점점 유치한 꼴로 변할 수밖에 없는 거지?
*
한 남자가 마물원에 찾아왔다.
원장님과 마주 앉은 남자.
이계인이다.
그리고 우린 그를 이렇게 불렀다.
‘무림인.’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들리지 않는다. 응접실은 개방된 장소이니, 아마 원장님의 마법이겠지.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구경을 했다. 이계인이 드문 것은 아니지만, 무림인은 정말 극소수다. 특히 평범한 사람들은 무림인을 평생 마주치기도 힘들다. 그들은 이종족 중에서도 유별나게 강했으며, 인류에게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마물원 일을 하며 드워프와 수인, 오크와 오우거까지 많은 이종족을 만났지만 무림인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온화한 느낌인데.’
무림인이라고 하여 긴장했지만 예상보다 착해 보였다.
비슷한 부류라고 하면 카르마 길드의 헌터들이겠지만, 놈들이 잔뜩 날이 선 성격 파탄자라면 이 사람은 겉보기에는 평범한 중년인 같았다.
하지만 기운이 다소 온화하고, 생김새가 평범하게 생겼다 뿐이지 절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낡은 회색 도복을 입고,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을 댕기로 땋은 머리.
풍성하지는 않지만 예스럽게 수염이 난, 분위기가 차분한 남자다.
비오는 날에 산속 절간이 생각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비범하기도 했다.
마나를 어느 정도 읽을 줄 알게 되었지만, 그의 기운을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무엇보다 ‘용’과 대화하며 저렇게 반듯하고 차분한 자세라니. 알지는 못해도 대단한 남자임이 분명했다.
잠시 후 둘의 대화가 끝났는지 남자가 일어나 원장님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떠날 때 내게도 묵례를 하여, 나도 덩달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어? 등에 원래 저게 있었나?
“
관리실을 나서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분명 방금까지 아무것도 없던 남자의 등에 웬 기다란 장검 한 자루가 메어져 있는 것이다.
‘무림인이 마법도 쓰나.’
어깨를 으쓱하고 원장님에게 걸어갔다.
“무슨 대화를 나누셨어요? 무림인이 왜 마물원을 찾아왔답니까?”
“옛 지인이에요.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하려고 무림에서 건너왔더군요. 그리고 난 흔쾌히 들어줄 생각이구요”
음,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한 가지 이상함을 발견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원장님의 말은 이상했다.
“무림에서 찾아와요? 전이 당한 게 아니라요?”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이종족은 전이를 ‘당한’ 것이다. ‘찾아왔다는’ 말은 이상했다. 지구가 옆집에 사는 친구 집도 아니고.
“그는 차원을 왕래할 수 있는 존재예요. 차원 왕래자, 혹은 워커라고도 하죠.”
원장님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뒤통수에 못을 박고 망치로 쾅쾅 두들기는 충격을 받았다.
생각해 보면 엄청난 모순이며 이질적인 현상이 아닌가?
전이는 강제로 여러 차원을 뒤섞는 것이며, 그 무대는 지구다. 보통 전이 당한 이계인들은 지구에 눌러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장님이 힘이 있다면?
실제로 마물들을 원래 살던 세계로 자주 보내지 않았던가, 반대로 전이로 파괴당한 세계의 존재들을 지구로 불러들이기도 했었다.
“이런, 다정 씨가 이런 ‘평범한 상식’조차 모르는 무지한 남자였다는 걸 깜빡했네요. 차원 왕래자는 드물지만 아주 없는 건 아니에요. ‘전이’에 휩쓸린 대부분의 존재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지만, 왕래자들은 대전이 이후, 개인의 의지로 많은 차원을 오고갈 수 있게 되었죠.”
그래, 인정한다.
내가 원체 호기심이 없는 놈이라는 걸. 조금 더 자조적으로 말하자면 이 사실을 뒤늦게 궁금해 하는 머저리라는 걸.
“좀 더 자세히 가르쳐 주세요.”
“왕래자는 차원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요. 어떤 이는 혼자서 이동하지만 저처럼 대규모로… 아, 전 특이한 경우니까 제외하죠. 대전이 이후 생겨난 그들은 분명 특별한 존재예요. 전이가 끝날 때, 우주가 어떻게 될 지 생각해 본다면 말이죠. 아마 지구인들 중에서도 더러 있을 거예요. 랭커라고 하던가?”
그럼 그렇지.
잘난 놈들은 더 잘날 수밖에 없었구먼. 무공이나 마법 따윌 사용하는 ‘유저’들의 힘의 출처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차원 왕래라는 건 어떻게 하는 거랍니까? 원장님처럼 공간 이동 마법이라도 쓰나요?”
“그건 저도 몰라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세상에, 원장님이 모르는 것도 있다니.
“너무 많은 변수, 너무 많은 비틀림. 대전이 이후, 규칙과 상식은 없어졌어요. 한 가지 진실은 우주는 점점 하나로 합해지고 있다는 것. 그 외엔 만년의 지식을 가진 용이라도…….”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빨간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머리를 긁었다.
단지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런 히스테리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경청했다.
“보통 존재력이라고 해요. 존재가 가진 힘. 대전이가 일어나기 전엔 차원마다 수용할 수 있는 존재력이 정해져 있었기에, 힘이 과도하게 집중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대전이 이후, 힘은 비틀리고 집중되고 꼬이고 분해되었죠. 내가 자주 말했죠? 진짜 전이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이 기세라면 전이는 점점 커지고 벌어져서, 마침내 터져 버릴 거예요. 존재력의 수용이 무한대로 늘어나면, 결국 지구를 넘치게 만들 강력한 존재력을 가진 자들마저 강제 전이를 당할 테죠. 그때가 전이의 끝이 되겠죠. 차원을 붕괴시킬 만큼 강력한 존재들은 아직 지구에 단 한 존재도 오지 않았어요. 지구인들이 부르길, ‘신’이라고 하는 자들은…….”
잠깐,
내 머릿속이 과부화로 어지러워진다. 지금 원장님은 어쩌면 지구인들 중에 단 한 명도 몰랐을, 중요하고도 경이로운 사실을 담담하게 내게 풀어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또한 존재력이 강해도 저자나 ‘캣 맘’ 마담, 그리고 나처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존재도 있어요. 법칙은 없어요, 수년 동안 연구하여 일정한 법칙을 찾아내도 또 비틀리며 변덕을 일으키죠. 글쎄, 전이를 일으킨 범인이 있다면 그자만이 알겠죠. 절대, 그럴 리는… 없지만. 하지만…….”
원장님의 설명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끝이 났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해 볼 게 있다며, 내게 오늘 하루 일찍 집에 가서 쉬라고 했다.
*
그날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많은 생각으로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감히 나 따위가 생각하기에는 너무 창대한 주제였으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으로 새벽까지 망상에 잠겼다.
정말 전이는 왜 일어난 것일까?
이 전이의 끝은 어떻게 끝날까.
어쩌면 다사다난했던 20년이,
사실은 평화로웠던 시절이며,
지금은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