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무림 (1)
다음 날, 출근을 하자마자 원장님이 다짜고짜 내게 옷 한 벌을 건넸다.
나는 인사도 생략한 채 졸린 눈을 부비며 말했다.
“뭐예요?”
“다정 씨가 입을 옷. 동화 마법을 걸어 놔, 턱시도처럼 입을 수 있을 거예요.”
얼떨결에 옷을 받아 든 나는 옷의 어깻죽지를 잡고 펼쳐 봤다. 옛 중국 스타일의 한 벌 옷이었다. 남자용 치파오인가?
“곧 그가 올 거예요.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알려 드릴게요.”
“어제 그 무림인이요? 다시 찾아온대요? 그보다 주의 사항이라뇨?”
“부탁을 받았다고 했잖아요. 다정 씨를 빌려주기로 했어요.”
나는 상상력이 좋은 편에 속한다.
그래서 지금 내가 처한 상황,
무림인, 내 능력, 용, 그리고 ‘빌려준다’라는 단어들의 연관성에서 아주 끔찍한 상상들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무슨… 절 빌려준다니…….”
“출장이라고 생각하세요.”
좋다. 나는 피고용인, 고용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일의 강도다.
“알겠어요.”
나는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물었다.
“예상하건대 끔찍하게 위험한 일일 테고, 제가 싫다고 해도 어차피 하게 될 테지만, 일단 무슨 일인지라도 알고 싶네요.”
평소의 원장님이었다면 내 말에 맞장구를 쳐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는 달랐다.
“사실 나도 내키진 않았어요. 옛 지인이자 제 계획에 꽤 중한 존재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다정 씨를 무림에 보내진 않았을 거야.”
용과 대화를 나누는 데 있어서 몇 가지 조심해야 할 게 있다. 그중에 하나가 습관적으로 반말을 쓰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어처구니가 없어 나는 반말로 되묻는 실수를 저질렀다.
“무림?”
다행히 원장님은 큰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다정 씨는 그를 따라 무림으로 넘어가서 한 가지 임무를 수행하게 될 거예요. 아마 지금까지 중 가장 위험한 일이 되겠죠.”
나는 마물원에서 일하며 다양한 위기들을 넘어왔다. 죽을 뻔한 적도 많다.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원장님이 이번 일이 가장 고난스럽다고 얘기한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불안감이 몽실몽실 피어올라 자꾸만 되묻는 나였다.
“자세한 얘기는 그가 해 줄 거예요. 자, 빨리 옷 갈아입고 와요.”
젠장.
적색의 치파오를 바라보던 나는 그녀의 재촉에 결국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
“주술사를 조심해요.”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원장님이 대뜸 경고했다. 주술사를 조심하란다. 나는 턱에 난 수염을 박박 긁었다. 이런, 아침에 깎는다는 걸 깜빡했네.
“주술사?”
이번 건 고의였다. 불평을 내 나름대로 표현해 본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원장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매섭게 노려보는 눈매에 말꼬리를 길게 늘려야 했다.
“사아아~라니, 음, 원장님 말대로 제가 무지해서 그런데 ‘무림’이라는 곳은 ‘무림인’이 사는 곳 아닌가요. 주술사라는 건 들어 본 적이 없어서 물어보는 거예요.”
그녀는 또 일반인이라면 결코 몰랐을 얘기를 해 줬다.
“사실 ‘무림’은 이미 멸망을 걷고 있는 차원, 주술사들은 무인이 마법을 잘못 받아들여 탄생한 타락한 자들.”
무림은 원래 지구만큼 크기가 컸으나 전이로 의해 작아지고 있다고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구가 커질수록, 무림처럼 작아지는 차원들이 많아진다고 한다.
“주술사들은 그릇됨으로 생겨난 무림의 악종. 자세한 내막은 다정 씨는 몰라도 되요. 알 필요도 없고요. 분명한 건 반드시 이번 임무에 그들이 엮일 거라는 거죠.”
“그럼 저는 어떻게 합니까?”
“그와 동행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다정 씨가 만약 싸워야 한다면…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어요.”
원장님은 내게 하나의 작은 상자를 건넸다. 예전에도 사용한 적이 있는 순간 이동 장치였다. 그러며 내게 진중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주술사를 만난 순간, 오리하르콘 브로치가 빛나지 않는다면 당장 이걸 사용해서 도망치세요.”
나는 턱시도 옷깃에 꿰어 둔 브로치를 꺼냈다. 전설의 금속인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브로치다.
이 오리하르콘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마법을 막아 주는 절세 보물이다. 나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마물 크루즈에서 마주친 마법사 유저를 이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브로치 때문이었지.
‘오리하르콘 브로치가 빛날 땐 마법을 막아 낼 때인데… 빛나지 않으면 도망가라고?’
나는 의아함이 생겨 물어봤다.
“주술사들도 마법을 사용하는 거죠?”
“네.”
“그러면 오리하르콘만 있으면 괜찮지 않나요? 마법을 다 막아 주니까 마법사들은 상대가 안 될 것 같은데요.”
그녀는 내가 한심한 듯 한숨을 쉬며 혀를 찼다. 머쓱해진 난 코만 훌쩍거렸다. 그래서 왜 그래야 하는 건데요?
“오리하르콘이 마법을 모두 막아 준다면 왜 내 공간 마법은 통하는 걸까요?”
음?
생각해 보니 그렇다. 내가 브로치를 차고 있을 때도 원장님은 공간 마법을 잘만 사용했잖아. 예전에 물어봤을 때는 원장님이 ‘맞을래요?’라고만 대답해서 깊게 물어보지 못했는데.
“오리하르콘은 보유자의 마나에 반응하여 외부 마법에 저항을 일으킬 뿐이에요. 잘 들어요. 오리하르콘을 탐색기라고 생각하세요. 마법이 통하지 않는 주술사라면 다정 씨가 충분히 이길 수 있어. 하지만 마법이 통한다면, 그자는 다정 씨 마나와 공명하는 오리하르콘마저 뛰어넘는 힘을 지녔으니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는 아득한 존재일 거예요.”
젠장, 진작 그렇게 설명하던가,
이 브로치를 처음 받았을 땐 분명 마법을 막아 준다고만 말하지 않았나?
“알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위험한 존재라면 싸우라고 부탁해도 내가 안 싸운다. 재빨리 도망쳐야지.
*
딱 10시 정각이 되자 그가 찾아왔다. 그는 전날과 달리 호전적인 복장을 하고 왔다. 검은 삿갓을 쓰고, 몸 전체를 가리는 검은 통옷을 입었다. 등 뒤에는 기다란 장도를 메고, 허리춤의 복대에도 검 몇 자루가 더 걸려 있었다.
새삼 무림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이와 이종족들로 인해 개성이 넘치는 세상에서도 조금 과하다 싶은 복장이다.
원장님은 그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원장실로 들어갔다. 그러며 내게 그를 응접하며 얘기를 들으라고 말했다.
나는 집에서 미리 가져온 해백초를 차로 내려 왔다. 어쨌든 원장님의 지인이자 손님이고 같이 일하며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남자였기 때문이다.
차를 내놓자 그가 삿갓을 살짝 내리며 말했다.
“고맙소, 아니 고맙습니다.”
“해백초라고 합니다. 건강에 좋은 차예요.”
그는 향을 즐기며 맛을 음미했다. 남자는 눈치채기 어려울 만큼 표정 변화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나는 그가 살짝 놀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객자(客子)에게 선뜻 내놓기에는 너무나 뛰어난 차로군요. 잘 마시겠습니다.”
“별말씀을요.”
단지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인데 나는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 중후하고 깊은 동굴 같은 목소리는 그렇다 쳐도 내게 존댓말을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도 편견이겠지. 그는 무림인이었으나 예의가 아주 바른 사람이었다.
차 세 모금을 마실 시간이 지나고, 그가 입을 열었다.
“전 천신수를 수호하는 기천 수호문의 수호대문장입니다.”
뭐지? 자기소갠가?
잠시 얼이 빠져 있던 나는 황급히 나를 소개했다.
“아… 전 마물원 직원인 정다정이라고 합니다.”
그의 소개에 비하여 뭔가 볼품없다. 나는 재빨리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드래곤의 가디언도 하고 있어요.”
그러자 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명예로운 일이지요.”
그러고는 다시 자신을 소개했다.
“지구인의 예법으론 별호보단 이름으로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곽운(郭雲)이라고 하니, 편하게 부르십시오.”
“저도 뭐 편하게 그냥 야, 너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농담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뭔가 실수라도 했나 싶어 당황했다. 초면에 너무 실없는 소리를 했어.
“원한다면 그리하겠으나 아직 어색하여 난감합니다. 이름으로 부르면 안 되겠습니까?”
나는 그가 꽤 진지한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시답잖은 말은 최소한으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소개를 나누고 차 한 잔을 다 마신 후, 남자는 본론을 말했다.
“풍설을 들었습니다.”
곽운이란 이름을 가진 무림인은 내 힘에 대하여 알고 있다며, 꼭 자신에게 필요한 능력이라고 완곡하게 말했다.
“그대가 가진 힘이 기천 수호문의 오랜 비원을 이뤄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는 품에서 낡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검은 먹과 붓으로 무언가가 그려진 종이였다.
또한 동물의 비늘을 건넸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비늘이었다.
나는 단지 어떤 생물의 비늘 한 조각에게서 엄청난 무언가를 느꼈다.
마치 거대한 다이아몬드, 혹은 산으로 쌓아 올린 황금산을 보는 것처럼 탐욕스러운 경이로움을 말이다.
“신수를 찾아 주십시오.”
나는 곧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신수.
저 비늘은 아마 신수의 비늘.
마물보다 신에 가까운 존재.
그는 내 힘을 이용하여 신수를 찾는 것을 원했다.
*
“신수 기린은 무림의 수호수이자 나아가 우주의 균형을 유지할 거대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수는 단지 뛰어난 힘을 지닌 마물을 뜻하는 게 아니다. 신수와 맞먹을 만큼 강한 힘을 지닌 마물은 더러 있다. ‘멸망 등급’의 마물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그들은 신수라고 불리지 않는다.
신수는 존재만으로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 저번에 만났던 ‘청동 잉어’ 신수가 존재만으로 ‘비’를 내리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기린이란 존재 또한 존재만으로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신수였다.
곽운은 기린을 ‘상서로움을 유지’하는 신수라고 하였다.
“무림은 무너지고 있지만 기린이 돌아온다면 붕괴를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기린을 수호하여 무림의 안녕을 기원하는 게 기천 수호문이 설립된 단 하나의 이유이자 숙명, 하지만…….”
그는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대전이로 인해 무림에서 기린이 사라졌으며, 유일하게 기린을 찾을 수 있는 가보마저 부서지는 바람에 오랫동안 기린을 보호해 온 기천 수호문이라고 하더라도 찾아낼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기천 수호문은 다시 한 번 기린에게 맹세의 증표를 내밀어야 합니다. 그가 무림에 다시 터를 잡는다면 무림은 평화로워질 겁니다. 그러나 만약 실패한다면 결국 무림은 완전히 붕괴될 테지요.”
그는 정말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얼마나 간절한지 그 어떤 대가라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부탁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음에도 말이다. 예상보다 훨씬 스케일이 컸다. 신수, 무림, 그리고 차원의 붕괴.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원장님은 이토록 중한 일을 정말 내게 맡길 샘인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원장실의 문을 두들겼다.
*
“원장님, 이건 너무하잖아요. 제가 싫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저한테만 맡기면 안 될 것 같은데요.”
“안 돼요. 다정 씨가 가지 않으면 무림은 붕괴되고 말 거예요. 그렇게 된다면 지구에 무림인들이 바글바글해질 텐데, 어휴, 나조차도 감당하지 못해요. 모든 무림인이 그와 같다고 생각하진 마세요.”
“그러니까 그렇게 위급하다면 원장님이 도와주면 되잖아요.”
그렇다. 이건 올바른 반항이다. 무림의 존망이 걸릴 일이라면 그녀가 나서야 한다. 드래곤쯤 되어야 ‘이야기’의 맥이 살지, 나 따위가 세계를 구하는 주인공 역할을 어떻게 맡는가.
하지만 원장님은 간곡히 거절했다.
“내가 나서면 더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무림에도 제 동족이 몇 명 살고 있어요. 가뜩이나 그들은 ‘동면기’ 전이라 잔뜩 날이 서 있을 텐데,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동족? 원장님의 동족은 용이라는 거잖아?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용님들이 원장님을… 그다지 반기지 않나 봐요?”
꽤 무례한 질문이었으나 그녀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목소리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난 드래곤 사이에서 왕따거든요.”
뜻밖의 대답에 당황한 건 나였다.
이런, 아픈 곳을 건드린 건가?
그 전에 드래곤도 서로 왕따 시키고 그러는 거야?
원장님을 말을 덧붙이며 확고하게 못을 박았다.
“‘비의 신수’를 돌려보낼 때 제가 말했죠. 난 근본과 엮이면 안 된다고. 다정 씨가 찾아야 할 기린도 근본 중의 하나. 내가 나서면 로드께서 가만두지 않을 테니, 다정 씨가 해결해야만 해요. 내 가디언이잖아요?”
부탁할 때만 지 가디언이래.
“신수는 탐색 마법으로도 찾아낼 수 없지만, 다정 씨라면 할 수 있을 거야. 힘내요! 아자!”
되지도 않는 격려와 응원에 힘이 축 빠진다. 그래, 부담 갖지 말자. 부탁한 건 원장님과 저 남자다. 그러니 실패해도 부탁한 그들 잘못이지.
“아자…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