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무림(4)
내 머리 위에는 사라졌던 붉은 구슬이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전과는 달랐다.
‘몸의 상태가…….’
멀쩡해졌다.
아니, 멀쩡한 것은 아니다.
“너 그 모습은 뭐지?”
“뭐지?”
“검은 먹물?”
손을 들어 내 몸을 내려 봤다.
야옹이가 물었던 손이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검은 물감을 칠하거나 피멍이 든 게 아니었다.
마치 그림자에 덮여 있는 듯했다.
“어떻게? 걸을 수 있는 거지?”
“놈이 주술을 파훼했다.”
속박 마법,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미친 행동이었으나 본능적으로 붉은 구슬에 손을 뻗었다. 닿는 것만으로 지독한 고통을 주던 주술, 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놈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모두 파설 주술과 천공 주술을 펼쳐라.”
사망칠괴들이 주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는 그토록 무섭고 두려웠던 놈들, 저항조차 못 했던 주술.
하지만 이제는 위협적이기는커녕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오른손에서 시작한 그림자는 점점 내 몸으로 퍼져 나갔다. 마침내 내 몸은 그림자가 되었다.
거대한 바위가 솟아나더니 내게 쇄도하고, 마른하늘에서 거대한 고드름이 낙하했다.
그에 맞서 나는 걸을 뿐이다.
“통하지 않아.”
“뭐지?”
“위험해, 위험하다.”
사망칠괴들은 당황했다.
이해해. 나도 이해할 수 없으니까.
그림자는 그림자.
실체가 없다.
그러니 지금의 나는 그림자다.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
마침내 놈들의 지척까지 가까워지자, 나는 칠괴 중 가장 가까운 놈에게 손을 뻗었다. 공격이라고 볼 수도 없는 움직임이었다. 마치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놈의 몸을 훑는다.
그러자 놈은 검게 변하여 죽었다.
나는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다음 행동을 머뭇거렸다. 너무 허무했기 때문이다. 죽음에 이르는 그 과정이 너무 생략된 느낌이다. 죽은 자의 얼굴도 너무 편안해 보였다.
이 힘이 어떤 유형과 성질과 개념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저 야옹이의 숨겨진 힘이라는 것만 알았다.
또한 이 힘이 내게 깃들어 있는 이상, 저들은 내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수괴가 당했다.”
“공력을 높여라!”
“방심하지 마라. 저자는 조금 전과 완전히 다른 존재다.”
당황하던 여섯 괴인이 곧바로 반격을 해 왔다. 주술의 그림이 그려지자 내 발밑과 머리 위에서 막강한 폭발이 일어났다.
주변 일대를 날려 버리며 경미한 산사태까지 일으키는 폭발이었지만, 나는 그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올 뿐이었다.
“미안.”
미안하다는 말에 사과의 뜻을 담은 것은 아니다. 그저 나조차 믿기지 않을 현상 때문에 모두 죽어야 하는 녀석들이 조금은 불쌍해져 위로를 한 것이다.
“화괴!”
한 명씩 죽일 때마다, 녀석들은 더 강력한 주술로 공격해 왔다. 놈들의 코에서 피가 터지고, 눈의 실핏줄이 터져 나간다. 내가 한 짓이 아니다. 아무래도 강한 주술을 사용하면 몸에 반동이 오는 듯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 어떤 피해도 주지 못했다. 그림자에 칼을 꽂으면 흙이 파인다. 그래, 이 힘은 그러한 것이다.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나 나는 그림자가 되었다.
이내 네 명의 괴인을 죽이자 놈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도망치는 놈들의 뒤에서 불쑥 나타나 모두 죽였다. 놈들의 그림자에서 내가 솟아났다.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알 수 없다. 그냥 그렇게 하는 법을 저절로 알았다.
괴인들은 살려 달라고 외쳤으나 그들의 처절함과 간절함에도 나는 초연했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괴인을 죽였다. 그의 죽은 얼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야옹이를 바라봤다.
녀석은 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마치 높은 분에게 인사라도 하듯이 아주 정중하게.
녀석을 보던 중이었다.
시야가 아득해진다.
알고 있다. 곧 나는 기절할 것이다.
몸이 뒤로 기울고 잠에 빠지듯 정신은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았다.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기절하는 게 정말 싫어 고함을 내질렀다.
“악!”
하지만 몸은 말을 듣지 않았고 나는 정신을 놓아야 했다.
*
눈을 뜨자 야옹이가 보였다.
녀석은 내 배 위에 앉아 그루밍을 하고 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다가와 혀로 뺨을 핥았다. 손을 뻗어 쓰다듬으려니 꼬리를 살랑거리며 도망치고 만다.
“일어나셨습니까?”
곽운이 소가죽 물병을 건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축였다.
기절하기 전에는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이 고통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일어나자 몸 상태는 쾌적했다.
“놈들은요?”
“시신을 잘 묻어 두었습니다.”
모두 죽었다는 얘기다.
나는 뺨을 긁적이다 기지개를 켜고 간단한 스트레칭을 했다.
“올라가시죠.”
“괜찮겠습니까?”
“무슨 일이라도?”
시치미를 떼자 곽운도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그는 내가 변한 모습을 확실히 봤을 테지만 모른 체 넘어가 주었다.
‘말하지 말랬으니까.’
나는 앞서가는 야옹이를 쳐다봤다. 속으로 애타게 녀석을 불러도 고개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야옹이의 속마음은 들려오지 않는다.
‘넌 대체 뭐냐. 야옹아?’
나는 비교적 담담히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사실 이번 일은 내가 지금까지 겪은 일 중 가장 기묘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야옹이가 한 말을 곱씹어도 도통 알 수 없었다. 보통 궁금한 것은 원장님에게 물어보면 답을 알려 주나, 야옹이가 당부했다. 그녀에게 말하지 말라고. 왜? 이유가 뭐지?
그 점을 제외하고도 이상한 점은 많았다. 야옹이가 언급한 다른 이들이란 것은 누굴까?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문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왜 방금까지 잘만 말하더니 왜 지금은 모른 체야?
나는 후다닥 뛰어가 야옹이를 들쳐 안고 말했다.
“야옹아, 말 좀 해 봐! 말! 넌 대체 뭐야? 왜 말하지 말라는데?”
야옹이의 남색 동공이 점점 커져 간다. 그래, 어디 한번 말 좀 해 봐.
“악!”
야옹이는 친히 발톱을 꺼내시어 내 손가락에 비엔나소시지처럼 촘촘한 칼집을 내 주셨다.
녀석은 수염을 씰룩거리며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더니 도도하게 뒤돌아, 가던 길을 갔다.
“망할 녀석.”
아무래도 오늘부로 나는 녀석하고 어색한 사이가 될 것 같다.
*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무사히 곤륜산 정상에 다다랐다. 성스럽고 신령스럽다는 단어는 아마 이 광경을 보고 만든 게 아닐까 싶었다.
안개를 헤치고 산 정상의 숨겨진 봉우리에 발을 디뎠을 때, 나는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대단해.”
“대단하지요.”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이런 건 마물원에서도 본 적이 없어요.”
그는 내 놀라움을 이해한다는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무림의 대지에 흐르는 용맥의 시발점이자, 무림의 젖줄인 황하가 시작되고, 모든 거산의 산맥의 뿌리가 되는 곳이지요.”
등산할 때에는 몰랐다.
안개와 눈으로 가려져 있으니 알 수가 있었을까.
곤륜산 봉우리는 굉장히 넓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과장을 보태지 않고 백두산 천지의 천 배는 되어 보이는 호수가 봉우리 중앙에서 넘실거리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옥으로 만든 나무들과 꽃들이 울창하게 자라 있었다. 빛나는 태양과 가장 가까운 이곳은, 모든 공간이 옥색으로 찬란했다.
공기도 맑고 시원해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차가운 냉수를 마시는 듯했다.
“신수가 느껴지십니까?”
“아마도요. 이 중에서도 유별나게 느껴지는 곳이 있거든요.”
“과연, 기린이 이곳에서 몸을 회복 중인가 보군요. 우선 이곳을 찾아봤으나 기천수호문은 신수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용의 수호자시여.”
나는 이십 분가량 휴식하고 곧바로 기린을 찾아 나섰다. 신령한 기운으로 그득한 이곳에서도 특별히 빛나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옥 나무로 감춰진 동굴이었다. 지하로 향하는 동굴이었는데, 입구는 몸이 지나가기 힘들 만큼 작았으나 그 안은 무척이나 넓었다.
“이곳에 있어요.”
“저도… 알 것 같습니다.”
곽운은 말을 더듬으며 동굴을 둘러봤다. 동굴 안은 황금빛으로 가득했다. 그렇다고 황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동굴 깊숙한 곳, 무언가가 금빛을 내뿜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저 안의 어떤 존재’가 내게 오지 말라고 경고했기 때문이다.
동굴 안의 존재는 말을 나누기가 힘겨웠다. 간신히 그의 의사를 읽어 낸 나는 저 존재가 곽운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상기된 표정의 곽운에게 말했다.
“곽운, 당신을 불러요.”
그의 뺨이 붉게 물든다. 괴물 주술사들과 싸울 때도 태연하던 곽운이 긴장하며 동굴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사람 머리만 한 동그란 동패였는데, 아무런 장식이 없었다.
곽운이 빛과 가까워질수록 그의 형체가 흐릿해졌다. 이내 내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졌는데, 나는 그가 신수 기린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생겼을까.’
신수는 내게 적대적이지는 않았으나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오지 말라 경고했으니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안쪽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동굴 바깥에서 곽운을 기다렸다.
*
시간이 흘러, 날이 저물고 밤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곽운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동굴 안의 평안하고 신령스러운 기운은 흔들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야야, 말해 봐. 말.”
그동안 나는 야옹이를 괴롭혔다.
뒹굴뒹굴하던 야옹이의 배를 사정없이 매만졌다. 야옹이가 뒷발로 박박 차 댔으나 봐주지 않았다.
결국 야옹이가 날카로운 이빨로 내 손등에 구멍을 냈으나, 나는 지지 않고 녀석이 싫어하는 행동을 했다.
이렇게 괴롭히면 짜증 나서 말하지 않을까 싶었다. 욕을 해도 상관없다. 제발 말을 해다오.
“아야, 아야!”
점점 녀석의 저항이 거셌다.
작은 손이지만 맞을 때마다 퍽퍽 소리가 났다. 결국 냥냥 펀치에 항복한 것은 나였다.
‘고양이는 고양인데.’
하지만 절대 착각은 아니다.
녀석은 분명 말을 했고, 내게 기묘하고 믿을 수 없는 힘을 ‘빌려’줬다.
한참을 밤하늘을 담아 둔 것같이 비밀스럽고 아름다운 녀석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좋아.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어디 끝까지 모른 척하는지 두고 보자고, 이 녀석아.”
*
아침이 밝아 여명에 나무들이 옥빛으로 반짝일 때였다. 동굴에서 곽운이 나왔다. 그는 다소 피곤해 보였으나 표정만은 밝았다.
그는 내게 동패를 보여 줬다.
처음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던 동패였다. 하지만 지금은 사슴의 몸에 외뿔이 달린 기묘한 동물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성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되었어요.”
곽운이 고개를 숙였다.
“기린은 처음부터 우릴 떠나지 않았었습니다. 대전이로 상처 입은 몸을 회복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도록 힘을 비축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는 아직 무림에 터를 잡진 못하나 그의 가호가 깃든 새로운 보구가 있으니, 당분간 무림의 붕괴는 저지할 수 있을 겁니다.”
곽운은 거듭 고맙다고 인사했다. 나는 개운하다 못해 상쾌한 마음으로 활짝 웃었다.
죽을 뻔하고 답답한 비밀도 생겼으나, 일이 좋게 끝나서 기쁘다.
곧바로 호출기를 작동시키고,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물로 샤워하며 차가운 맥주를 마실 생각부터 했다.
아차, 그전에 원장님에게 이번에는 어떤 성공 수당을 받아 낼까 생각해 봐야겠지.
‘좀 더 직접적으로 힘과 관련된다면 좋겠는데.’
이제 돈은 필요 없다. 의약 회사로부터 로열티로 받은 거액이 통장에 그대로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유형. 마물원 일을 보다 수월하게 이행할 수 있는. 주술사와 싸울 때 느꼈던 내가 죽지 않고 적을 압도할 수 있는 ‘힘’을 열망한다.
이렇게 바뀐 걸 보면 나도 능력자이긴 한가 보다. 헌터들이 제힘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이해되지 않았었는데 말이야.
-다정 씨.
원장님은 평소보다 늦게 대답했다. 통신기 너머의 원장님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노이즈도 심해서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지금 지구로 넘어올 수 없어요.
청천벽력.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게 무슨? 왜요?”
-무언가에 의해 공간이 상당히 불안정해졌어요. 강제로 열면 다른 드래곤한테 들킨 터이니 몰래 작업해야 해요.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이동진이 완성되면 연락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지직-!
연락이 끊겼다.
호출기를 다시 작동시켰으나 이번에는 노이즈만 가득하고 원장님과 연결되지 않았다.
나는 곽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그동안 지낼 곳이 있냐고 물었다.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당신은 기천수호문의 은인이십니다. 천하의 도성이 은혜를 담아 둘 순 없지요. 그럼요, 아니 될 일입니다. 무언가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힘이 닿는 한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곽운은 은혜를 갚을 수 있다며 기뻐했다. 나는 그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여, 사실 처음부터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말을 꺼냈다.
나도 배우고 싶었다, 지구의 유저들처럼 이계의 싸움 기술을! 그것도 일격에 바위를 쪼개는 도성의 무공이라면 내가 원하는 ‘힘’이다.
보통 무인들에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은 머리에 칼을 맞기 딱 좋은 소리라고 들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했다.
에헴, 그는 나는 은인이라고 생각하니 가르쳐 줄 수도 있겠지.
“무공을 가르쳐 주시면 안 될… 까요?”
내 말이 끝나자 그는 아주 섬뜩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순식간에 바뀐 기운과 눈빛에, 나는 방금 내뱉은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