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무림(5)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몇 가지 물건들을 사 올 터이니.”
눈빛과는 다르게 그는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줬다. 무공을 가르쳐 준단다.
“여기서 기다립니까? 산에서요?”
“기린이 머무는 곳입니다. 주변에 맑은 기운이 충만하니, 무공을 배우며 기를 받아들이기에 이만큼 수월한 장소는 없습니다.”
하지만 산에 남아서 무공을 배워야 했다. 상당히 불편한 일상이 되겠지만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뛰어난 무공을 배우는 기회는 로또 맞을 확률보다 낮을 테니까.
나는 그의 지시로 나뭇가지를 꺾고 풀들을 모아 간단한 이부자리를 만들었다. 간이 화장실도 만들고, 식탁이라고 바위도 하나 주워 왔다.
잡일이 모두 끝날 때쯤에 곽운이 돌아왔다. 그는 먹을 음식과 목도 몇 자루,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을 가져왔다.
“그럼 간단히 대결을 해 보지요.”
“대결이요?”
“재능을 가늠하기 위함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별거 아닙니다.”
그는 내게 죽도 한 개를 던져 줬다. 검이라고 하면 마물원 일을 하며 자주 사용해 봤지만 사실 ‘기술’이라고 할 것은 없었다. 그냥 찌르고 베고, 그게 다였다.
어색하게 폼을 잡던 그때였다.
“갑니다.”
순식간에 다가와, 목도를 벼락같이 내려치는 곽운.
아니, 씨… 별것 아니라며.
대결은 싱겁게 끝이 났다. 나는 머리 위에 칠괴들처럼 머리 한 개가 더 자라난 것 같았다. 세상에, 혹이 이만큼 커도 되는 거야?
나는 아파서 엉엉 울며 그에게 소리쳤다.
“나한테 왜 그래요. 으흐흑.”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음… 아닙니다. 제가 가늠을 잘 하지 못했군요. 죄송합니다.”
그 뒤로 대결을 몇 번 더 해야 했다. 처음보다는 아니지만 아주 매서웠다. 끝에는 악에 차올라 마구잡이로 덤볐는데 곽운은 아주 쉽게 공격을 받아 냈다.
그는 나와 싸우며 단 한 번이라도 숨소리가 거칠어지지 않았다.
열이 잔뜩 올라 목검을 내팽개치고 풀 마운트를 시도하던 나는 결국 머리 위에 머리가 한 개 더 생기고 말았다.
*
곤륜산은 보통 산이 아니다.
지구의 히말라야나 에베레스트 산을 떠오르게 만든다. 무척 가파르고 넓고 위험했다. 심지어 지구에서 볼 수 없는 각종 기괴한 재난들도 발생했다. 산사태가 ‘아래서부터 위로’ 발생한다든가, 마른하늘에 우박이 쏟아진다든가.
물론 평범한 사람의 범주를 벗어난 나에게 큰 위협은 되지 않았다.
평범하게 등산을 하다면 말이다.
“헉헉, 하아. 후우!”
중턱에서 정상까지 뛰어서 왕복 ‘17’시간.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중턱까지 내려가 벽곡단이라는 맛없는 무림의 간편식을 먹고 다시 정상까지 오른다. 쉴 시간은 밥 먹는 10분밖에 없다. 걸어서도 안 된다. 17시간이란 시간은 아주 타이트했다. 만약 1분이라도 지체한다면 곽운은 사정없이 저녁밥을 뺏어 버렸다.
첫날 이후 매일 시행하는 수련이었다. 이 수련을 첫날에 호되게 치룬 후 곽운에게 물어봤다. 왜 이딴 짓을 해야 하냐고.
그러자 곽운은 육체 능력의 상승이 아니라 오히려 힘을 빼서 기를 잘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젠장,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마치 찜질방에서 아저씨들이 땀을 뻘뻘 흘리는 논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효과는 있다고 하니 군말 없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지옥의 유격 훈련을 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이제 훈련 코스에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17시간의 등산으로 가랑이가 붉게 달아오른 상태에서 세 시간씩 기마 자세. 이것도 기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한다.
잠을 하루에 네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능력자인 나라도 온몸이 욱신거렸다. 아무리 무공을 배우기 위해서라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훈련을 끝내고,
나는 나뭇가지와 낙엽 따위로 만든 잠자리에 누워 생각했다.
‘예전의 나라면 포기했을 거야.’
오히려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졌다. 예전의 나, 아니 평소의 나라고 해도, 이처럼 고된 훈련은 바로 포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독기가 빠짝 올랐다.
야옹이가 힘을 빌려준 것은 정말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기적적인 일이다. 나는 그때 주술에 당해 죽었어야 했다.
칠괴들에 의해 죽음을 겪을 뻔한 나는, 살아남은 후 다시는 그 상황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한, 보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해. 내가 악바리로 이 지옥 훈련을 견디는 이유였다.
이번 일로 격렬하게 느낀 것이다.
적어도 내가 원장님 밑에서 계속 일하려면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이젠 욕심을 부려야 해.’
생각을 더 하고 싶었으나 자는 시간이 아까워 곧바로 눈을 감았다.
*
그의 말을 빌려 ‘힘 빼는’ 훈련을 한 지 2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곽운이 이제 제대로 된 무공을 가르쳐 주고자 했다. 기린이 머무는 동굴 입구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무공을 가르침 받았다.
“상혈의 단전에 화기를 담고 있으니 기천수호문의 이십이 태두이신 화정태광 곽천의 검법을 전수해 드리지요.”
점멸, 단전, 내공, 어쩌고저쩌고.
외공, 내공, 공혈, 즉타, 어쩌고저쩌고.
처음 듣는 개념들이었으나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냥 저 아크로바틱한 동작들을 따라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게 아닙니다. 상혈의 화기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잖습니까! 자, 따라서!”
“따라서!”
“누가 말을 따라하라고 했습니까?
무공을 배우는 건 사실 지구에서 격투기를 배우는 것과 흡사했다. 동작을 따라하고 배우고 외우고 그게 다다.
하지만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다른 점 때문에 무공을 배우는 것에 난황을 겪었다.
‘대체 기를 움직인다는 게 뭔 소리야?’
몸의 외부, 동작을 따라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몸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기의 움직임을 따라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는지 알아야 하지.
나는 완벽하게 그의 동작을 따라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나를 엄하게 꾸짖었다.
“상혈의 화기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몇 번 말합니까?”
그게 대체 뭔데.
“똑같이 따라하는 것 같은데…….”
“말대꾸하지 않습니다. 기를 운용하지 못하는 듯하니 제가 초길을 닦아드리지요. 유도하는 대로 기를 흘러 보내십시오.”
그는 내 배에 손을 얹고 동작을 지시했다. 나는 열심히 따라하며 ‘기’라는 것을 움직이고자 했으나, 배에 가해지는 압박만이 커져 갔다.
윽!
그러다 갑자기 곽운이 내 배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묵직한 충격에 아침에 먹은 벽곡단을 토해 내고 말았다.
“왜……?”
원망스럽게 쳐다보자 곽운은 멋쩍은 표정을 하며 헛기침을 했다.
“힘이 가하게 들어갔습니다. 자, 어서 일어나서 다시 기를 운용해 보십시오.”
아니잖아. 주먹 쥐고 후려 팼잖아.
내가 못 따라한다고 화풀이한 거잖아.
나는 입술을 꽉 깨물고 시린 배를 부여잡으며 일어났다. 젠장, 오기로라도 해내고 만다.
퍽!
“우에엑! 이… 이거! 이거 고의죠?”
“이런, 또 힘이… 그러게 잘하지 그러셨습니까.”
그 뒤로도 곽운의 주먹질은 이어졌고, 나는 먹은 것을 모두 토해 내고 말았다. 결국 훈련이 끝날 때까지 나는 기의 운용을 따라하지 못했다.
훈련이 끝나고, 나는 오물로 엉망이 된 옷을 벗었다. 팬티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으나 벗는 건 실례일 것 같아 참았다.
“하나도 못 따라하겠습니다.”
나는 곽운에게 하소연하듯 외쳤다.
처음에는 내가 둔재인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종’의 차이인 것 같았다.
“제가 인간이라 그런 겁니까?”
곽운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습니다. 무림인과 지구인의 감각은 완전히 다른 영역입니다. 지구인이 우리들에 비해 무공을 익히기 어려운 체질이지요.”
그럼 그렇지.
괜히 ‘유저’들이 헌터들보다 더 값진 대우를 받는 게 아니다. 이종족의 기술을 배우는 건 단순히 자격증을 따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무림인과 지구인은 똑같이 생겼으나, 그 속은 완전히 다르다.
내가 무림인이었다면 무공을 훨씬 수월하게 배웠을 텐데.
“부럽습니다. 무림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강해서.”
투정을 부릴 생각은 아니었다.
단지 훈련이 너무 힘들어 하소연하고 싶었던 것이다. 곽운은 내 말을 무시해도 되었지만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해 줬다.
“우리도 지구인들이 부럽습니다.”
“지구… 우리들을요?”
의외의 대답이었다.
뭐로 보나 무림인들이 훨씬 뛰어난데. 위로라도 해 주려고 그런 건가? 하지만 곽운은 진심인 것 같았다.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인간은 검을 다루는 솜씨도, 강력하고 단단한 발톱도,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와 물속에서 헤엄칠 수 있는 아가미도 없지만, 친화력만큼은 우주 제일이지요. 어쩌면 전이 후의 세상에서 친화력은 가장 큰 무기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전이의 무대가 ‘지구’가 아니라 ‘무림’이었다면 세계는 진작 멸망하고 말았을 겁니다.
”
무림인의 입장에서 들려주는 지구와 전이에 대한 이야기.
“친화력이 뛰어난 지구인들, 그러니 그들이 전이를 버틸 수 있었던 거지요. 전이를 멈출 수 없다면 결국 하나가 된 우주의 패자는… 제 하찮은 견해지만 아마 지구인들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수인, 무림인, 괴종, 엘프, 그리고 용. 그들을 제치고 인간들이 패자가 된다고?
나는 그의 말에 공감하지 않았다.
‘이래서 무림인과 지구인은 다르구나, 많은 게.’
지구인이 패자가 될 수 없다는 게 아니다. 원론적으로 합쳐진 세계에 패자가 존재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승자와 패자를 나눠? 왜 한쪽이 다른 쪽을 지배해야 해?
이런 견해 차이, 내가 인간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곽운이 무림인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지만 분명 두 종간의 차이는 있다.
‘하나가 된 세상에서 원장님이 하고자 하는 일은…….’
나는 조금은 깨달은 것 같았다.
견해를 좁히는 것.
분명 어렵겠지
그게 과연 이루어질까 싶긴 하다. 하지만 모든 세계의 공존을 꾸미는 데에 내 작은 힘이라도 보탠다면, 그건 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일이 될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
그는 나를 가르친 지 삼 일이 지나자, 반말을 쓰기 시작했다.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나는 아직도 기의 흐름은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사소한 단서는 찾은 듯한 느낌이다.
그 단서를 찾아 힘겹게 동작을 따라했다.
“신기하구나.”
한참 땀을 뻘뻘 흘리며 수련하던 내게 대뜸 곽운이 말했다.
“내 살다, 살다 이런 재능은 처음 본다.”
나는 눈썹을 오므리며 그를 바라봤다. 언뜻 곽운이 날 바라보는 눈빛에 한심을 넘어 약간의 경멸까지 느껴졌다. 얼마만일까. 사실 저런 표정을 한 사람들을 나는 많이 겪어봤다. 한참 헌터 일을 알아보던 시절에, 능력자라고 해도 동물과 대화 따위나 한다며 쓸모없는 놈 취급을 받았었지.
마물원 일을 하며 잊혔던 시선이기도 하다. 원장님도 그렇고 엮이는 자들마다 나를 대단하다고 추켜세웠으니까.
“뛰어나다는……?”
당연히 그럴 리는 없지만 나는 애써 농담처럼 말했다. 원장님이 나더러 자꾸 자존감을 가지라고 추켜세우던 효과일까, 곽운의 시선에 약간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곽운은 냉정하게 확인 사살했다.
“아니, 무의 재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체내에 흐르는 막대한 기의 흐름을 조절하기는커녕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지. 그래서 신기하다고 생각하던 중이다. 어떻게 그런 모순적인 상태로 살아온 것이냐.”
그는 내가 강한 ‘내공’을 지닌 주제에 그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며 구박했다.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이 힘은 내가 수련으로 얻은 게 아니다. 마물과 교감해서, 혹은 원장님의 선물로 얻어 낸 힘이잖아.
내 힘이 아닌 게지.
“지구인이라고 쳐도 너무 재능이 없다. 이래선 마른 우물을 파는 것과 같으니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겠다.”
“다른 방법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