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무림 (7)
기천 수호문장 곽운은 방에 들어가기 전, 자신의 애검(愛劍)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림의 기물이자 세 살 아이도 휘두르면 손쉽게 강철을 벤다는 천하제일의 검이지만, 곽운은 볼품없는 바닥에 내려놓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한시도 품에서 검을 내려놓은 적 없는 검객이 검을 내려놓는다.
지금 만날 존재가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검을 들고 대면하기에는 지고지순한 존재이며, 설상 검이 필요한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은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곽운은 알았다. 검을 든 것과 들지 않은 것에 차이가 없으니, 곽운은 굳이 검을 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사소한 예의지만 곽운은 현명했고, 그 현명함을 파르바티는 좋아했다.
“왔어요?”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는 검은 차를 건넸다. 곽운은 검은 차를 싫어했다. ‘커피’라고 불리던 것. 하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곽운과 드래곤 파르바티의 대화는 언제나 간결했다. 차를 두 모금 정도 마신 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부탁하신 대로 그에게 무공을 가르쳤습니다.”
“어땠나요?”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기이할 만큼 치중된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외공만 놓고 본다면 제법 소질이 있으나, 결코 무의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둔재입니다.”
파르바티는 단호한 곽운의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무공이란 인간이 배울 수 있는 놀라운 기술이건만, 조금 아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법은 많다고 생각하며 파르바티는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그런가요.”
눈썹을 찌푸리던 파르바티는 곧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비범하죠?”
곽운은 잠시 침묵하다가 강직한 눈빛과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연코, 제가 가르친 제자 중 가장 비범합니다.”
이상한 말이었다.
재능은 없는데 비범하다.
모순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파르바티와 곽운은 진담이었다. 그의 비범함을 직접 목격한 두 존재이기 때문이다.
곽운은 자신이 했던 말을 이어서 몇 마디 보태었다.
“무공은 힘을 표출하는 방법이며, 그 종류가 무공을 배운 자들의 수만큼 많습니다. 같은 무공이라도 펼치는 자에 따라 제각기 달라 완벽히 똑같은 무공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잠시 곽운은 무공을 배우던 남자의 움직임을 생각했다. 생각할수록 기이한 남자였다.
“이를 테면, 무공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야만적이며 본능적이고 다듬어지지 않았지요. 쉽게 가르칠 수 있는 재능이 아닙니다.
스스로 깨우쳐야 할 힘이지요. 모든 무공을 쉽게 배울 수 있는 무인의 재능은 없으나 새로운 무공을 창조하는 개조(開祖)의 재능이니 다듬어진다면, 그의 무공은 새로운 갈래가 되어 갈 것입니다.”
곽운은 확신했다.
정다정이란 이름을 가진 남자는 지금은 보잘 것 없으나 창대한 힘을 이룰 잠재력이 있다고.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노력 외에도 천운과 기연이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작은 씨앗을 심어 놓았으나, 그 힘은 저조차 이해하기 버거웠던 갈래이기에 꽃을 피울지는 모를 일입니다.”
가르침 받으려고 해도 누군가 알려 줄 수 없는 힘. 스스로 깨우치지 않으면 절대 개화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자.
“포장하여 말했지만 결국 무공을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도 없고, 언제 개화될지 모르는 작은 씨앗만을 품은 애송이라는 뜻이군요. 흠, 확실히 키울 맛이 나는 가디언이야.”
그러나 파르바티는 오히려 자신이 가디언은 잘 선별했다고 생각했다.
다소 괴팍한 취향을 가진 파르바티는 그가 알기 쉬웠다면 금방 싫증이 났을 것이다.
그들의 대화는 한 남자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곽운은 파르바티를 오랫동안 알아 왔지만, 변덕스러운 용이 한 명의 인간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인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곽운은 궁금한 게 있었다.
굳이 꺼내지 않으려고 한 호기심이었으나 지금이라면 말을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무공과는 별개로 대체 그가 가진 힘은 무엇입니까? 언뜻 보았을 때 그 힘은… 생과 사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 곽운은 파르바티의 섬뜩한 시선이 자신을 난도질하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으나 그럼에도 눈빛을 마주하기에 본능적으로 공포감이 앞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파르바티는 대답하지 않았다.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곽운도 그녀의 기분이 풀리길 기다렸다.
어색한 침묵이 끝나고, 공기가 다시 부드러워지자 곽운은 다른 주제를 꺼내었다.
“주왕들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무림의 주술사들이 일제히 움직이고 있으니 큰 동란이 일어날 징조로 보입니다.”
파르바티는 대수롭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예상하던 범주예요.”
하지만 이내 곽운이 건넨 물건을 보며 붉은 눈동자에 흥미가 일어났다.
“무림의 주술사들이 지구의 인간과 접촉한 것도 아셨습니까?”
곽운이 건넨 것은 검붉은 물건.
사람의 심장을 말린 것이었다.
역겨운 물건이나 파르바티는 유심히 둘러봤다. 심장의 중앙에는 어떤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심장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주술사의 체내의 모든 장기에 이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양은…….”
파르바티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머릿속으로 다가올 상황을 흥미롭게 그려 봤다. 자신에게는 대수롭지 않지만, 과연 그에게는 어떤 고난이 될까.
심장에 새겨진 문양은 일직선과 디귿 자의 도형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문양.
업의 문양이라고 부르며, 일부에서는 카르마라고도 불리는 문양이었다.
*
원장님이 나더러 곧바로 무림에서 귀환하라고 한 이유, 그건 아주 위험한 임무 때문이었다.
로또 당첨의 여운을 제대로 즐겨 보지도 못한 체 나는 곧바로 다음 임무에 투입되었다. 그녀는 내게는 아주 위험한 일이라도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했다. 하지만 가끔 진지한 표정으로 일의 위험성을 알려 주었는데 그럴 때마다 격이 다른 위협을 느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침에 출근하여 원장님과 회의하던 나는 내용을 들을수록 뚱한 표정을 지었다.
‘무림에 돌아오자마자 또 위험한 임무야?’
그녀가 말하길,
이번에 갈 곳은 아주 위험하고 곤혹스러운 곳이라 당장 시급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내 안전을 위해 뒤로 미루고 있던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무림에서 기린의 기운을 곧바로 찾아내는 내 교감의 힘을 보고 감탄하여, 내가 능히 해낼 수 있음을 믿게 되었다고 했다.
‘그딴 믿음, 접어 두시지요.’
문득 그런 말이 생각났다.
일을 너무 잘하면 안 돼. 못하면 구박을 받지만 잘하면 일이 더 늘어난다. 가장 좋은 건 중간이야. 모든 일은 적당히 하는 게 가장 좋아.
일을 잘하면 잘할수록 좋은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해서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된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몰라도 현자의 말씀이었어.
나는 헛된 저항임을 알면서도 내 의견을 피력해 봤다.
“믿어 주는 건 고맙습니다. 원장님, 하지만 무림에서 개죽음 당할 뻔한 게 며칠 전인데 또다시 위험한 임무라니. 효율적이고 능동적인 작업을 위해 일의 강도를 조정…….”
그녀는 내 말을 무시하고 관리실 바깥으로 나갔다. 머쓱해진 나는 쫄래쫄래 그녀를 뒤따라갔다. 원장님은 마물원의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상당한 마나가 흘러나오는 거대한 쇠기둥이 세워져 있었다. 그 주변으로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언제 이런 곳을 만드셨대.’
이제 아예 공간 이동을 위한 새로운 장소를 마련해 놓은 꼴이, 나를 더 심하게 부려 먹을 모양인가 보다.
“이번에 갈 곳은 어딥니까?”
나는 포기한 채 임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질문에 그녀가 답했다.
“기억나시죠? 대륙 거북이들의 고향, 거수들의 세계. 저번에 그 세계의 주인들에 대해서 말했었죠. 이번에 만나야 할 존재가 그들이에요.”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 같다.
무리 이동만으로 지구에 대재앙을 일으키는 대륙 거북이가 평범한 거북이 수준의 덩치였던 세계.
거수들의 세계.
그곳을 갔을 때 원장님도 조심히 이동했다. 그 세계의 주인들을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서였었지?
하지만 제대로 설명한 적은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원장님을 말을 덧붙였다.
“무량성계(無量成鷄)의 주인들을 칭할 때, 흔히 ‘산신령’이라고도 해요. 불과 얼음 나라의 거인들마저 고개를 높이 올려다봐야 하는 존재. 움직이는 산의 정령이자 마물.”
원장님은 내 기억력을 테스트라도 하듯 그녀가 말해 준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산신령들은 그 거대한 덩치만으로 존재력이 엄청 나 전이를 늦추게 하는 존재들이에요. 아직 지구는 존재력이 강한 생명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했죠?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산신령이 존재하는 이유만으로 전이는 강제되고 있어요. 그 힘을 빨아들이기엔 아직 지구라는 차원이 덜 여물었던 거죠. 하지만 만약 그들 중 한 존재라도 힘이 약해져 전이가 빨아들인다면, 구멍은 커지고 전이는 가속화될 거예요.”
원장님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산신령이라는 놈들이 지구로 전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전이의 구멍이 넓어져 전보다 훨씬 가속화된다는 얘기다.
“그러니 우리가 관리해 줘야죠. 산신령들의 힘이 약해지지 않도록.”
참, 마물원 일을 하며 자주 느끼는 거지만 명분과 대의만큼은 으리으리하다. 기린을 찾는 것도 무림의 존망이 걸려 있다고 하더니, 이제는 지구의 전이가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말하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사실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지도 몰라. 마치 소설 속 주인공들이나 할 영웅적인 일들을.
“어떤 일을 하면 되는 겁니까?”
나는 원장님의 대답을 기다리며 온갖 상황을 상상했다. 산신령들의 힘이 약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할 일. 음, 삼시라도 든든하게 챙겨 주면 되나?
“목욕.”
목욕?
목욕이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나는 산신령들을 씻겨 주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덩치가 산만큼 크다는데 워우, 이태리타월 가지고는 어림도 없겠네.
“때라도 밀어 주면 된답니까? 우리 동네 때밀이 비용 삼만 원 달라던데, 이 손님은 어디보자…….”
내 말에 원장님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꾸짖었다.
“다정 씨는 개미보다 작은 존재가 제 몸을 씻겨 준다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흐유, 그런 목욕이 아니에요. 조금… 과격하고 처절한 목욕이죠.”
*
대륙 거북이 이후 오랜만에 찾은 거수들의 세계, 무량성계. 나는 용으로 변한 원장님의 등에 올라타(뜬금없지만 진취적인 결과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내가 원장님의 등에 올라타다니.) 끝도 없는 산과 숲을 거닐었다.
원장님은 낮게, 그리고 천천히 날았지만 그래도 헬리콥터 속력과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광활하게 펼쳐진 수해와 간간히 우뚝 솟은 거산들은 몇 시간 동안이나 날아다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온 내가 슬슬 배가 고파진다고 느낄 때쯤이었다. 원장님은 작은 언덕에 내리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자, 산신령입니다.”
나는 언덕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과연, 원장님이 산신령은 생물보단 자연의 한 풍경과도 같다고 하더니 완전 언덕과 똑같이 생겼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언덕에 고개를 숙이며 나를 소개했다.
“크흠, 산신령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 드래곤의 가디언인 정다정…….”
그러나 끝까지 소개하지는 못했다. 원장님이 내 목덜미를 잡고는 고개를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왜요?”
물어보자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뭐 해요?”
“산신령님한테 제 소개를…….”
“이 밑의 언덕은 산신령의… 어디 보자, 엉덩이쯤에 위치한 작은 점쯤 되려나? 다정 씨, 산신령과는 처음부터 만나고 있었어요. 흐음, 다정 씨라도 산신령의 마음을 곧바로 읽어 낼 순 없나보군요.”
“…이 숲과 산들이 모두 산신령의 몸이라고요?”
세상에,
나는 방금 산신령의 엉덩이 점에 인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장님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몇 시간 동안 돌아본 광활한 수해와 산들이 모두 ‘산신령’이란 생물이었다니!
“이게 가능한 부분입니까?”
“최초의 우주엔 행성만 한 종족도 있었다고 하는걸요. 자, 난 산신령의 영을 만나러 가볼 테니 다정 씨도 준비해요. 턱시도로 갈아입고 무기도 챙기고.”
시키는 대로 턱시도를 입고 검과 총을 꺼냈다. 하지만 목욕을 시키는 데 무기가 필요하다니. 점점 느낌이 싸해진다.
“이제 말해 줘요. 산신령 목욕이란 게 뭘 하는 건지.”
그녀는 내 질문에 갑자기 숲속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거대한 ‘토끼’ 한 마리가 끌려왔다. 말이 토끼지 크기는 코끼리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