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수의사(1)
“오늘도 달려왔어요?”
나는 몸에 붙은 낙엽을 털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어요. 사람이 하늘을 난다는 건 정말 재밌는 일이었어요.”
형의검 경공, 스위프트 덕의 움직임을 흉내 낸 풍종도보의 경공을 배운 이후로, 차를 탈 일이 없어졌다. 출근방법이 달라진 것이다. 몰래 건물 위로 올라가 방방 뛰어다녔다.
환경을 생각하거나 기름 값을 걱정해서 그런 게 아니다. 마물 경주에서도 느껴던 달리는 것의 즐거움. 살결로 느끼는 바람은 쾌감으로 다가왔고, 땅에서 벗어나 하늘과 가까워지는 느낌은 자유로움을 선사했다.
스위프트 덕의 영향도 있겠지만, 달리면서 깨달은 게 있었다.
사실 사람은 무척 뛰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다. 어린 꼬마들이 우다다 뛰어다니는 것도 그냥 좋아서 그런 것이다.
물론 다 큰 어른이 뛰어다니면 다소 경박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기에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오늘 아침에 그러다가 고층 아파트에 사는 어떤 아주머니와 눈을 마주치기는 했지만, 사실 현대 사회에서 이 정도면 늘 있는 수준이다.
손을 흔드니 뒤로 발라당 자빠지던 아줌마는 그렇게 느껴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원장님은 내가 더러워진 옷을 터는 동안 분주하게 움직였다. 원장님이 저리 바쁜 이유는 몇 가지 없었는데, 다양한 물건들을 챙기는 모습이 아무래도 오늘 아침에 출장을 갈 모양이었다.
“며칠 동안 못 올 것 같으니 다정 씨가 알아서 관리해 주고, 오늘 오후에 손님이 찾아올 거예요. 다정 씨의 힘이 필요한 모양이니 잘 응대해 주세요.”
나는 혼자서 출장을 간다는 원장님의 말에 속으로 안도하다가, 이어서 손님이 온다는 말에 눈썹을 찌푸렸다. 이세계 출장보다 낫지만 손님 응대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디 보자, 손님이라고 찾아오신 분들을 생각해 보면 구마 사제, 무림인, 마담 드래곤… 젠장. 하나같이 내 목숨을 위협했던 상황을 자아낸 사람들이잖아.
“이번엔 어느 곳에서 어떤 손님이 찾아오신대요?”
그래도 무림인 수준이면 괜찮아.
제발 드래곤은 아니어라.
“다정 씨도 아는 사람.”
내 질문에 원장님은 나도 아는 손님이라며 말하고, 곧바로 공간 이동 마법을 펼쳐 사라졌다.
홀로 남은 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쩐지 간지럽다 했더니 날아다니며 먼지가 쌓인 모양이다.
아는 사람이라, 누구지?
*
그날 오후, 아쿠아리움 대청소를 끝마친 나는 기진맥진하여 소파에 누웠다. 우리가 워낙 넓어 대부분 청소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정 작용을 하나, 아쿠아리움은 달랐다.
웬만한 나라의 영해만큼 넓긴 했으나 사는 놈들이 놈들이다 보니, 가끔씩 고인 물을 청소해 주지 않으면 마나가 과다하게 쌓여 바닷물이 기화하는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는 일이라고는 순환 장치를 가동시키고, 마물에게 부탁해서 지들이 싼 똥오줌이니 스스로 청소해 달라고 한 것밖에 없긴 했으나, 사소한 트러블을 해결하느라 진이 빠졌다.
“손님이 온다고 했지.”
할 일도 마쳤다. 원장님도 없다.
조기 퇴근이나 하려던 나는 아침에 부탁 받은 일이 생각났다. 할 수 없이 턱시도(원장님은 손님을 응대할 때 필수적으로 복장을 갖추라고 했다.)로 갈아입은 나는 피곤해도 커피를 마시며 버텼다.
그래도 드래곤의 가디언이고 상대는 드래곤의 손님인데 허투루 보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만약 손님이 지랄 맞은 성격을 보유한 자라면, 쉽게 말해서 드래곤이라면, 꾸벅꾸벅 조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몰랐다.
눈을 부릅뜨고 손님을 기다리던 그때였다. 관리실의 문을 두들기며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긴장이 풀려 뻣뻣한 자세를 풀었다.
원장님 말대로 내가 아는 손님이다. 문을 열어 주고 응접실까지 안내했다. 나는 그녀와 간단한 인사만을 나누고, 그녀가 좋아하는 차의 취향을 기억해 커피 대신 탔다.
“마시세요.”
“고마워요. 다정 씨, 오랜만이네요!”
“부인께선 여전히 비늘이 반짝거리시네요.”
“어머, 그걸 칭찬이라고 한 거예요? 사타리언 사이에선 그거 위험한 발언인데.”
나는 깜짝 놀라 사과했다. 사타리언 사이에서 비늘을 칭찬하는 것은 성희롱에 가깝다나. 누가 알았겠어?
손님은 사타리언 사이에서 공주로 떠받들어지며, 윙바레사의 실질적인 권력자인 사타리언 부인이었다.
흔히 그녀의 종족을 부를 때 리자드맨이라 부르지만 내가 경험한 바로 그보다 더 고귀하고 엘레강스 한 분이셨다.
부인은 인간과 결혼한 이종 가정의 1세대이며, 아마 사타리언과 인간의 피가 섞인 자녀를 둔 최초의 이종족일 것이다. 저번에 왔을 때 그녀의 고향과 가깝게 꾸민 마물 사막에서 그녀와 가족들을 가이드 했지. 아이들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아빠의 모습은 내게 이종족과 인간의 사랑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겼다.
“잘 지내세요? 저번에 만났을 때 부군께서 말썽을 부린다고 하셨잖아요.”
그녀의 남편은 마물 사막에서의 경험이 기폭 장치가 되었는지, 뜬금없이 가족을 지킬 만큼 강해지겠다고 수련을 떠났다. 저번에 이 말을 들었을 때 어이가 없었는데 결과는 궁금했다. 결국 포기하고 돌아왔겠지?
사타리언 부인은 내 질문에 한숨을 내쉬며 기다란 꼬리로 팡팡 소리 날 만큼 땅바닥에 내려쳤다.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그이는… 너무 건강해졌어요. 의기소침한 것보단 좋아도 조금 과하다 싶을 때가 있어요. 갑자기 횅하던 머리가 풍성해진 채로 돌아오더니 자신감도 상승해서 저번엔 사타리언 장로님들에게 대들기까지 했다니까요?”
내가 가장 충격을 받은 대목은 남편의 변화 중, 머리가 풍성해졌다는 이야기였다.
전이로 다양한 문물이 뒤섞인 현대 사회에서도 대머리는 불치병이건만!
“머리가 자라났다니… 어떻게 하셨답니까?”
“무공의 효능이라네요.”
무공!
나는 갑자기 일어나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솔직히 탈모가 두려웠다. 요즘 들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인지 정수리가 조금 허한 느낌이 들었는데, 나는 무공을 배웠으니 절대 대머리가 되지 않는다는 거잖아.
“좋은 거 아닌가요? 엄청, 엄청 좋은 건데.”
어째 나와 그녀의 대화는 서로 핀트가 조금 어긋난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그의 머리숱에 대해서 가장 궁금했다. 사타리언 부인은 내 말에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사타리언들이 머리카락이 있는 걸 보셨나요?”
아, 그러고 보니.
“솔직히 말하면 전 그이의 머리가 벗겨졌을 때가 더 괜찮았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가 좋다면 나도 기쁘지만, 하지만… 왜 그깟 머리카락 때문에 성격이 완전히 바뀐 걸까요? 이해할 수 없어요. 인간은 머리카락 따위에 왜 연연하는 건가요?”
어허, 그깟 머리카락 따위가 아닐 텐데. 머리카락. 새의 깃털, 짐승의 털처럼 어떤 중요한 작용은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남녀 할 것 없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부위였다.
단지 외형적인 부분 때문에?
아니야.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야.
아마 부인의 남편이 머리카락이 자란 뒤 대범해지고 용기가 생긴 건, 그 근본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설명은 할 수 없어도, 이해는 가.
이야기는 오랜만에 만난 아주머니끼리의 대화처럼 흘러갔다. 남편 이야기 후에 아이들 이야기. 부인은 아이들이 바르고 밝게 컸다고 했다. 혼혈, 그것도 두 종족의 피가 섞인 터라 걱정했지만 기우였나 보다. 조만간 아이들을 다시 마물원 견학을 보낸다는 둥, 시시콜콜한 대화가 오갔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근황과 안부를 묻는 대화가 끝나고 그녀가 본론을 꺼냈다. 그녀는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내 내게 건넸다. 그 안에는 사진 몇 장과 건물의 설계도, 그리고 서류 등이 있었다.
“이건…….”
대충 읽어 보니 어떤 병원에 대한 기록인 것 같았다. 위치와 설계도, 근무하는 직원과 그들의 이력서까지.
“우리 윙바레사가 지원하는 의료 사업인 이종 의학, 그중 마물 의학을 담당하는 바스테 병원의 주요 자료들이에요. 뒷장에 사업 개요를 읽어 주세요.”
나는 자료들을 읽어 갔다. 흥미로운 내용이라 몇십 분이나 걸렸으나, 부인은 침착히 기다려 줬다. 바스테 병원은 ‘마물 의학’이 주된 연구소이자, 마물을 치료하는 병원이었다.
마물 의사는 사실 완전 생소한 게 아니었다. 마물이 가축화되고 애완화되면서, 근래 새로 등장한 직업이었다. 수의사와 비슷하다. 하지만 따로 자격증이 없다. 마물 의사들은 기본 바탕을 의학적인 지식이 아닌 능력을 기준으로 한다고 들었다. 애초에 마물은 동물처럼 쉽사리 치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마물원에서 일하면서 원장님이 아픈 마물들을 뚝딱 치료하는 모습은 많이 봐 왔지만, 그건 원장님이 드래곤이라서 가능한 일이다. 그마저도 마법으로 치료할 수 없는 이유 모를 상처나 병은 나를 통해서 치료 방법을 찾았다.
서류를 다 읽어갈 때쯤, 그녀가 말했다.
“바스테 병원은 꽤 성공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었어요. 하지만 근래 안 좋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어요. 누군가가 시설을 이용해 불법적으로 잔혹한 연구를 자행하고 결과를 빼돌리고 있다는… 결정적인 건 얼마 전에 연구와 치료하던 마물들이 단체 폐사당한 일 때문이에요.”
부인은 나더러 바스테 병원에 마물 의사로 위장 취업하여 동태를 살피고, 정말 그런 일이 발생하는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여러 번 내부 감사를 실시했지만 알아낼 수 없었어요. 그나마 발견한 건 조그마한 단서,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광범위하게 은폐하고 있다고 봐야겠죠. 어떤 세력인진 몰라도 혼자선 할 수 없었을 거예요. 다정 씨, 다정 씨가 병원을 살펴봐 줘요. 다정 씨의 힘이라면 어려운 일은 아닐 거예요.”
사실 그녀의 말대로 내가 마물 의사가 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마물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들려오기에, 녀석들이 어딘가 어떻게 아픈지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마물 의사들이 특별한 능력을 바탕으로 마물들을 치료한다면, 나는 가장 뛰어난 진단을 볼 수 있는 의사인 것이다.
하지만 능력은 되더라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 그럴싸해야 했다. 아무리 마물 의사라고 해도 나는 의학적인 지식이 없어 자연스럽게 행동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타리언 부인은 별일 아니라는 듯 서류 가장 뒷장의 종이를 꺼내어 내게 건넸다.
“바스테 병원은 일반 의학과 구분하기 위해 독자적인 체계를 사용합니다. 몇 개만 외우시면 연기하는 데 문제는 없으실 거예요.”
종이에 빼곡히 적힌 괴상한 단어들. 몇 개라고? 몇백 개는 되어 보이는데?
원장님은 손님을 응대하라고 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난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해 볼게요. 그럼 실행은 언제쯤……?”
“이틀 뒤요. 다정 씨를 다른 세계에서 유학 온 저명한 교수라고 설명해 놨어요. 처음부터 직급을 팀장으로 하여, 다른 직원들과 사사롭게 엮일 일들은 최소화시킬게요.”
해 놨어요?
내가 부탁을 들어줄 줄 알고 미리 조치를 취해 놨다는 얘기잖아. 역시 부인은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
그녀가 떠나고 원장님에게 보고했다.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란다. 나는 이틀 동안 마물 의학에서 사용하는 생소한 용어들을 외웠다.
영단어도 이렇게 외운 적이 없었다. 이틀 뒤, 나는 머릿속에 구겨 넣다시피 한 마물 의학 용어들을 되새기며 사타리언 부인의 전용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에 있는 바스테 병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