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수의사(4)
그날 밤, 헬리콥터를 타고 그녀가 도착했다. 녹색 빛이 감도는 곱슬머리를 가진 영국인, 올리비아였다.
올리비아는 릭스틴 연구소에서 마물 때문에 발생하는 마물병을 치료하기 위한 백신을 개발하는 병리학 박사이다. 누구보다 마물 생리학에 견문이 넓으니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헬리콥터에 내린 올리비아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올리비아! 오랜만이에요!”
올리비아도 나를 발견하고 동그란 안경을 추켜올리며 해맑게 웃었다. 똑똑한 사람이나, 웃을 때는 푼수처럼 웃었다.
“와, 다정!”
따각따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걸어오는 올리비아. 아니, 협곡을 오는데 힐을 신고 오는 걸 보면 올리비아는 자기 영역 외엔 정말 푼수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그녀는 첫 만남 그대로.
내게 신선한 충격을 줬다.
“여전히 이상한 맛이 나.”
내 손등을 핥는 올리비아에, 코를 씰룩거리던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묘한 감정을 집어치웠다. 그녀의 능력을 알기에, 올리비아에게 이건 사소한 인사일 뿐이다.
“그 아이는요?”
포근이를 말하는 거겠지.
나는 숙소까지 안내하며 포근이와 내게 있던 일들을 말해 줬다. 올리비아가 내 말을 너무 집중해서 들어 주는 바람에 말하다 보니 흥이 돋았다. 결국 그날 새벽까지 올리비아와 같은 방에 앉아 대화했다. 나와 올리비아, 모두 평범한 삶이 아니기에 이야기는 꽤 재밌었다.
나는 새벽이 되어서야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손등을 내려다보다가 씻지도 않고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젠장.
*
올리비아의 능력은 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났다. 올리비아의 주도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외부인이자 영국인인 올리비아와 프랑스인 의사들 사이에서 묘한 신경전이 보였으나, 의사들은 곧 올리비아의 능력을 인정하고 명령에 따르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실행한 일은 환경 개선이었다. 나는 공원의 관리자들과 직원들에게 새로 쓴 관리 매뉴얼을 지급하고, 3일 동안 교육했다. 매뉴얼은 내가 직접 타래딱새가 된 경험을 바탕으로, 타래딱새들이 인간들에게 원하는 걸 간추려 놓은 것이다.
털을 자주 뽑지 마라.
일주일에 한 번씩 송진을 지급하라.
타래딱새들이 모이는 곳에 대형 거울을 설치하라.
언뜻 이해하기 힘든 주문도 있었으나, 바스테 병원의 명성 때문인지 쉽게 용납하는 분위기였다.
그다음부터는 내 영역을 벗어났다.
타래딱새들이 사는 환경을 완벽히 제어할 수 없다면 인공적으로 조성해야 했다. 대기 중 마나의 농도를 조절하기 위해 이계의 식물을 심어야 했고, 적당한 수치를 알아내기 위해 세 시간마다 테스트했다. 미세한 차이가 큰 결과를 만드니 허투루 할 수는 없었다.
그동안 나는 타래딱새와 교감하여 털북숭이로 지냈다. 보고는 올리비아에게만 받았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결과를 올리비아에게 건네주면, 프로젝트팀이 개선하는 방식의 작업이었다.
환경을 조정하고 난 후, 타래딱새의 몸을 치료할 약과 영양제를 만들었다. 이쪽 분야에서 중국인 의사가 두각을 나타냈다. 그와 올리비아는 며칠 만에 부족한 마나와 양분을 채워 줄 약을 훌륭하게 만들어 냈다.
임상 실험은 릭스틴 연구소에서처럼 내가 대신했다. 내 털들은 약을 먹을수록 더 윤기 나고 풍부해졌다.
‘타래딱새의 급사는 단지 영양실조였다니.’
‘몸’의 영양분을 말하는 게 아니다.
타래딱새는 마물이었다. 기이한 생물이다. 털을 깎아도 죽지 않지만, 털의 생기를 잃으면 급속도로 몸이 죽어버린다. 사람으로 치면 찰랑거리던 머리를 자랑하던 10대 청소년들이 갑자기 탈모를 겪고, 대머리가 되었다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 버리는, 아주 슬픈 이야기다.
*
마지막 임상 실험을 할 때였다. 몸에 옷을 입지 못할 만큼 털이 북슬북슬 자라나서 팬티도 입지 못했다.
하지만 털이 주요 부위를 다 가려서 부끄럽진 않았다.
“올리비아, 나 좀 봐요.”
약을 주사하던 올리비아에게 왠지 내 털들을 자랑하고 싶었다. 젠장, 교감의 영향이다. 하지만 내 털들을 봐. 사랑스럽잖아.
나는 털기 춤을 선보이며 온몸을 흔들었다. 그러자 하얗고 윤기 나는, 풍성한 털들이 일제히 흔들리더니 민들레 홀씨같이 사방에 뿜어졌다.
그러자 어느 순간 타래딱새들이 몰려들더니, 모두 부리로 딱딱 소리를 내며 나를 칭찬해 주었다.
[대단해!]
[엄청난 털이야. 저 풍성한 털들을 봐. 태양보다 아름다워.]
[저 춤사위는 어떻고! 신나는데!]
딱. 딱. 딱.
풍부한 음악은 아니었으나 엉덩이를 흔들기에는 충분한 비트. 나도 혀로 입천장을 차며 딱딱 소리를 냈다.
“아하하! 내가 이 구역에서 제일 멋져.”
흥이 달아올랐다.
사실 마음 한편에서 ‘미친놈아, 그만둬!’ 라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꾸짖었지만 음악과 털만 있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성은 잠시 가출시키자. 벌써 일주일 동안 녀석들과 교감했어. 나는 이미 글렀다니까.
음하하!
딱. 딱. 딱.
리듬에 맞춰 스텝을 밟아 나갔다.
문득 올리비아의 얼굴을 바라보니 눈이 안경만큼 커져 있다. 그녀가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이끌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어요. 올리비아, 당신의 머리는 아름다워.”
나는 그녀의 머리끈을 풀어 버렸다.
곱슬머리지만 그 덕에 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해초 같은 녹색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춤춰요.”
내 털기 춤에 그녀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크게 당황한 듯하다. 새들의 부리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미친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일하게 내 하트비트를 막을 수 있는 수치심은 이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즐겨요!”
우리들 주변으로 타래딱새들이 둘러싼다. 녀석들도 잔뜩 흥이 나 몽실몽실한 털을 힘껏 뽐내며 춤을 췄다. 내 털과 녀석들의 털이 하늘로 날아가 마치 눈이 내리는 듯했다.
엉덩이를 열다섯 번쯤 흔들었을 때였다. 그녀가 안경을 벗더니 무대 위로 올라왔다.
“에이, 몰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요!”
나는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얘들아! 날 따라 해!”
타래딱새들의 음악은 인간이 즐기기엔 너무 단조로웠다. 나는 교감의 힘으로 녀석들에게 부탁했다. 디스코, 디스코 리듬이 필요해!
[이건 뭐지?]
[이상해. 하지만 신난다!]
내가 부탁한 대로 타래딱새들이 부리로 소리를 낸다. 어떤 무리는 낮은 음, 어떤 무리는 높은 음. 언뜻 듣기로 목탁으로 연주하는 디스코 같았다. 하지만 썩 마음에 든다.
아직 어색하지만 그녀도 꽤 대단한 사람이었다. 역시, 첫 만남에 얼굴을 핥아 주던 사람이다. 금방 수치심을 이겨 내고 음악을 즐기기 시작했다.
같이 엉덩이를 흔들었다.
정신없이. 음악만이 내 길이었어.
뮤직 이즈 마이 라이프.
[예!]
[흔들어!]
[교미의 춤이다!]
그러길 한참.
순간 타래딱새의 말에 제정신이 돌아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녀석들은 이미 본능에 충실해졌다.
나는 힘겹게 타래딱새의 힘을 털어 내고 올리비아를 손을 잡았다. 당장 이 광란의 현장에서 벗어나야 해.
타래딱새가 새로운 역사를 쓸 동안, 우린 베이스캠프로 도망쳤다.
교감의 힘이 잦아들자, 제정신이 들었다. 가출한 이성이 돌아오자 급격한 수치심과 미안함이 몰려왔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차마 올리비아와 눈을 못 마주치겠다.
“미안해요. 방금은… 제 능력의 부작용 중에 하나라서… 아무튼 죄송해요. 저 때문에 올리비아 씨가 이상한 경험을 했어요.”
그녀는 머리카락을 묶으며 대답했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보니 괜스레 더 미안하다. 나 때문에 땀이 저렇게 날 만큼 강제로 춤을 춰 버린 것이다.
“아니요. 재밌었어요.”
올리비아는 재밌다고 말해 줬다.
천사가 따로 없네.
내가 올리비아였다면 뺨이라도 한 대 때렸을 텐데.
“어머, 정말 재밌었다니까요. 시무룩해하지 마요.”
올리비아는 내 턱을 잡고 고개를 추켜올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미안함을 덜어 낼 수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정말인 듯싶었다.
“다행이네요.”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마지막을 못 봐서. 아쉽네요.”
“마지막이요?”
타래딱새들이 새 역사를 쓰는 그 현장? 아직 교감의 힘이 덜 벗겨졌는지 괜스레 뺨이 붉어졌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교미를 나누는 타래딱새들의 데이터는 꽤 도움이 되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한 달 넘게 번식하지 않던 녀석들이 곧장 발정이 난 거 보면 약이 성공했나 봐요.”
그런 의미였군.
나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후 처리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요. 올리비아 씨는 가 보셔야 되죠?”
“네. 하던 일을 멈추고 와서. 릭스틴 연구소에서도 난리예요. 빨리 돌아가 봐야 될 것 같아요.”
그런 중요한 일을 제쳐 두고 내 부탁에 날아온 거야? 조금 감동이네.
나는 약의 효과를 발휘하는 타래딱새들을 관찰하기 위해서 다시 녀석들의 둥지로 가고자 했다.
“정말 재밌었어요! 아쉽네요! 끝까지 못해서!”
베이스캠프로 가던 올리비아가 갑자기 뒤돌아보더니 내게 소리쳤다. 둥지로 향하는 내내 올리비아의 말뜻을 순수하게 이해하기 위해 나는 부단히 노력했다.
*
올리비아가 릭스틴 연구소로 돌아가는 날이 되었다. 그동안 여덟 명의 전문의와 함께 지낸 올리비아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그들에게 이상한 점이 있었나요?”
올리비아는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사타리언 부인으로부터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으니까.
“아니요. 없었어요.”
올리비아가 없었다고 한다.
내가 느끼기에도 너무 잠잠했다.
여덟 명의 전문의는 각자 제 일에 충실했다. 너무나 조용했다. 이번 타래딱새 사건도 환경과 영양분 탓이지, 인간에 의한 재해는 아니었다.
“이번 일도… 무언가, 그때처럼 다른 불순물이 섞여 있는 거군요.”
불순물.
올리비아는 게르반 형제를 말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비아는 내게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정말 스파이가 있다면 결코 만만치 않을 거라고 했다.
헬리콥터가 도착했다.
그녀와 작별 인사를 하며 아쉬운 마음에 말했다.
“바쁘시구나.”
“피차 바쁜 건 마찬가지죠.”
지금 헤어지면 그녀를 언제 만날까. 일단 아직까진 그녀에게 나는 사타리언 부인 소속이니, 마물원에서 일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아쉬워요. 프로젝트의 마무리까지 같이하고 싶었는데.”
아쉽기는 했으나 그냥 해 본 말이었다. 하지만 올리비아가 갑자기 헬리콥터에서 내렸다.
“내가 남는 걸 원해요?”
그냥 반사적으로 그랬을 것이다.
이상하게 입꼬리가 올라가며 고개가 세차게 끄덕여졌다.
그러자 올리비아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짐짓 뻗대는 척하며 말했다.
“아주 바쁘지만, 그래도 이틀은 남을 수 있겠네요. 에헴, 제 이틀분 시간은 아주 값지다고요.”
“남아 줘요.”
나는 확고히 말했다.
그녀가 남아 줬으면 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내게 왔다. 헬리콥터 안의 사람이 무어라 했지만 올리비아는 단칼에 거부했다.
“그리고…….”
올리비아가 남아 줬으면 했어.
“내게 몇 가지 가르쳐 줘요.”
그녀의 지식이 필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