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엘프(1)
대전이 이후, 현대인에게 나타난 좋은 습관들 중 하나는 아침마다 인터넷이든 TV로든 기사를 꼭 챙겨 본다는 것이다. 하루라도 놓치면 정보를 따라가기 힘든 세상이다. 게다가 뉴스가 웬만한 공상 과학의 소설과 영화보다 더 재밌다.
나는 초코 시리얼에 우유를 말아 먹으며, 아침 뉴스를 확인했다.
‘저 오타쿠 용은 점점 대범해지네.’
밤새 다양한 일이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에 메이드 복을 입힌 오타쿠 용은 이번엔 41m 규모의 인도 하누만 동상에 무천도사류의 도복을 입혔다. 미친 용이 지구의 역사가 깃든 랜드마크들을 취향대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저런 걸 보면 우리 원장님은 지극히 평범한 축에 속한다는 걸 새삼 느낀다. 원장님이라서 다행이야.
그 외의 기상천외한 사건 사고가 많이 발생했지만, 그중 가장 내 주목을 끈 것은 평범한 폭발 사고였다.
[오늘 오전 네 시 반쯤 서울 도봉구 마물 도축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있었습니다. 당시 야간 근무 중인 작업자 열일곱 명이 화상을 입어, 인근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며 폭발의 원인으로…….]
“말세야, 말세.”
의문의 폭발 사고가 또 발생했다.
몇 주 전부터 연속으로 발생한 폭발 사고는 큰 화젯거리였다.
미친 용이 날뛰는 세상에서 폭발 사고는 특이할 것 없었지만, 문제는 장소와 수법이 똑같았다는 것이다. 마물 도축 공장, 가공 공장, 마물 연구소. 폭발 사고의 장소는 모두 마물과 관련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상한 건 공장이 무너질 만큼 큰 폭발이 발행한 사고임에도 사망한 작업자가 없다는 것이다.
폭발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으나, 이쯤 되면 전문가들도, 평범한 사람들도 모두 폭발이 고의적으로 일어난 범죄라는 걸 눈치챘다.
범인으로 범죄 행위에 가담하는 능력자들인 블랙 헌터와 지구의 체제에 불만을 가진 이종족들이 거론되었지만, 단서가 없어 추측에 불과했다.
‘설마 또 카르마 새끼들은 아니겠지.’
하도 당한 게 많아 나쁜 짓이 발생했다 하면 범인으로 카르마 길드가 생각났다. 못된 새끼들이지만 조직력만큼은 인정한다. 선상 경매, 마물 경주, 휴양지, 의료 분야까지 별의별 일에 모두 끄나풀이 있었으니.
아침 뉴스를 보고 출근길에 나설 때였다. 예전 집주인한테서 연락이 왔다. 세입자가 왔다고 방에서 짐을 빼달라고 했다.
‘2년이 넘어서야 방이 나가다니 대체.’
워낙 구린 곳이긴 했지.
짐이라고 해 봤자 추억 깃든 잡동사니밖에 없지만, 오랜만에 옛집에 들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체 어떻게 내가 그 집에서 살았나 싶을 정도로 형편없는 집을 보면서, 현재의 풍족함을 다시금 느끼고 싶기도 했다.
*
마물원 관리실이 북적하다는 것은 매우 안 좋은 징조다. 관리실의 문 앞에 선 나는 문고리를 돌리길 주저했다. 안에서 원장님과 대화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손님이다. 큰일이야.’
마물원에 손님이 찾아왔다. 즉 나는 또 괴상망측한 사건에 연루될 가능성이 있다.
이번엔 대체 뭘까.
차라리 위험한 일이면 괜찮다.
제발 수치심을 유발하는 사건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는 굳게 마음을 먹고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원장님에게 인사를 하며, 곁눈질로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는 손님을 스캔했다. 원장님의 손님, 대부분은 인간이 아니다. 이제 익숙해져 어떤 종의 손님이 오더라도 반갑게 맞이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저 손님만큼 난감한 경우는 없었다.
‘엘프? 저거 엘프지? 엘프 맞지?’
귀가 뾰족하다. 눈이 참 크다. 콧대가 날카롭다. 금발의 머리카락이 황금처럼 빛난다. 눈동자가 영롱하다. 사람에게서 나올 색이 아니다. 언뜻 청색처럼 보였으나 자세히 보니 보라색에 가까웠다.
손님의 정체를 알아차리자마자 나는 달려가다시피 하여 엘프의 앞에 섰다. 뭘까, 이 생물은.
아마 어린아이가 세상의 불공평함에 대해 깨닫는 가장 첫 번째 요인은 생김새, 외모일 것이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현대 사회에서는 불공평을 ‘능력’의 유무로 특히 부각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사실 천지가 창조된 이후로 세상은 계속 불공평했다.
그리고 불공평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건 재능도 뭣도 아니다.
외모.
부정하는 자들도 많았다.
외모 지상주의를 비판하는 자들이다. 물론 외모가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결국 달관한다면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기왕이면 예쁘고 잘생기고 멋진 게 낫다는 걸.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다. 동물과 마물하고 교감할 수 있는 나라서 일찍 깨달은 진리이다. 새들은 예쁜 깃털을, 사자는 멋진 갈기를 원한다.
아마 엘프는 그중 불공평의 최고봉이 아닐까 싶다. 놀랍게도 이 시대의 귀족이라 불리는 엘프들은 막상 지구로 전이 당했을 때, 그들 스스로 무언가를 한 건 아니었다고 한다. 그냥 가만히 살아가는데 인간들이 알아서 떠받들어 준 것이다.
하긴 아우라가 다르긴 하다.
나는 저 엘프에 대해서 전혀 몰랐지만 첫인상만으로 호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생각보단 시시한걸.’
‘뱀파이어’와 마찬가지로 엘프들도 연관된 많은 서브 컬처들이 탄생했다. 그중 남자나 여자나 엘프를 만난다면 첫눈에 반해 사랑의 포로가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보니 크게 흥미가 일진 않았다. 그냥 예쁜 엘프. 그뿐이다. 잠깐,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 아무 감흥도 없는 건 이상하잖아. 설마 이것도 교감의 부작용인가? 새는 멋진 깃털을, 사자는 멋진 갈기를 보고 매력을 느낀다면 마물과 뒤섞인 나는 뭐지?
엘프는 예뻤지만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것보다 내가 더 신경 쓰이는 건 그녀의 주머니 안에 있는 어떤 것이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굽혔다.
녀석은 수줍음이 많아 말을 걸어도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괜찮아. 나와 보렴.’
“이분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시는데요? 점점 손을 제 옷 쪽으로 뻗어오는데요? 어떡하죠?”
“괜찮아요. 엘프의 마력에 혹할 만큼 나약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린 것 같군요. 소개할게요. 이 남자가 내 가디언이자 마물원의 직원인 다정 씨예요.”
‘자자, 부끄러워하지 말고 나와 봐. 답답하잖아.’
엘프와 원장님이 무어라 대화를 나누고, 엘프가 내 행동에 당황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하지만 것보다 나는 엘프의 옷 주머니 안에 있는 녀석이 더 궁금했다. 신기한 느낌이 드는 녀석이었다.
부끄럼쟁이 녀석을 끌어내기 위해 몇 번이나 말을 걸었다. 녀석은 결국 마음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주머니가 아니라 몸 안에 있었던 거구나. 신기한 능력인걸.’
머리를 내민 녀석은 작은 원숭이처럼 생긴 마물이었다. 이상한 힘을 지녔는지 엘프의 허벅지에서 불쑥 몸이 튀어나왔다.
“반가워.”
손을 내밀자 부들거리는 손으로 내 손을 맞잡는다. 그리고 천천히 내 팔을 타고 올라왔는데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가벼워도 느낌은 있다. 하지만 이 마물은 마치 질량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어머, 어떻게?”
어깨까지 올라탄 녀석은 제 뺨을 내 얼굴에 비비적거렸다. 그래, 나 나쁜 사람 아니야. 마음을 열자 꽤 애교 많은 녀석이었다.
“마물이 좀 저를 잘 따르는 편이거든요. 얜 어떤 마물이에요? 마물원에서도 처음 보는데.”
내 행동이 무척 당황스러웠는지 엘프의 대답은 늦어졌다. 멍하니 날 쳐다보던 그녀는 나와 원장님을 번갈아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위수… 마물이 아니라 위수라고 불러요.”
“어쩐지 평범한 마물하고 많이 다른 느낌이 들었어요.”
위수가 뭔지는 몰라도 마물하고 다르다. 더 없이 순수한 마나가 느껴졌다. 비교하자면 생물보단 자연 쪽에 가까운 녀석이랄까. 식물과 느낌이 비슷한 녀석이다.
녀석은 다시 팔에서 내려와 엘프에게 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엘프의 몸에 들어간 위수, 겉보기에는 완전히 사라졌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엘프에게서 녀석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당신을 엄청 아끼네요. 친구… 아니, 반려자? 그 이상의 감정이 느껴져요.”
위수는 엘프를 엄청 잘 따랐다.
단지 친구 사이인 수준이 아니다. 마치 포근이와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우정보다 더한 정으로 이어진 것 같아.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제 허벅지를 매만졌다. 그러자 위수가 고개를 내밀어 손길을 느꼈다. 둘의 교감, 서로 행복해 보였다.
엘프는 위수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우리들이 자연을 사랑하니, 자연이 답례를 준답니다. 엘프는 성년식 때 위수와 교감을 나누고 평생을 함께해요.”
엘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고개를 숙였다.
“위대하신 분의 가디언이시여. 세계수의 일곱 번째 가지이자, 조화수호자이며, 팔랑의 딸이자, 누간다의 족장이며, 라손의 자매이자, 구아나의 검과 활인 카르네가 처음 인사드립니다.
“아… 네. 반가워요?”
그러니까 이름이 카르네라는 거지? 엘프들은 인사를 저렇게 쓸모없이 길게 하는 것 같았다. 아예 사돈에 팔촌까지 다 소개하지.
“또한 대전이에 흩어진 마코도의 수양딸이며…….”
진짜야?
원장님이 멈추게 하고 나서야 그녀의 소개는 끝이 났다.
*
인사만 나누고 엘프는 떠났다.
그래서 마물원에는 왜 찾아온 거지?
이해하지 못할 족보만 자랑하고 가 버렸네.“엘프가 왜 찾아왔답니까?”
“임시 직원으로 쓸 생각이에요.”
원장님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원장님은 태연한 얼굴로 한마디를 하고 원장실로 들어갔다.
“마물원 후임이니까 잘 챙겨 줘요.”
그래, 분명 원장님은 마물원에 직원을 더 모집할 생각이었다. 내가 입사할 때부터 천천히 마음에 드는 직원을 더 모집할 거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몇 년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다가 뜬금없이 후임이 생겼다. 그것도 후임이 엘프다.
‘나쁘진 않지만… 당황스러운걸.’
위수가 그녀를 대하는 감정에서 깨달았다. 엘프는 분명 마물원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다.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마물에게 사랑받는 ‘냄새’가 난다. 알려진 바로도 엘프는 자연의 친구며, 마물들을 아낀다고 했으니.
마물원에 어울릴 인재이긴 하지.
“뭘 가르치지?”
문제는 내가 사수로서 뭘 가르치는가였다. 내가 마물원에 처음 와서 한 일들을 떠올렸다. 마츄 우리 관리, 이건 쉽지. 출산 도우미, 난감하지만 어렵지 않아. 새끼 마물 육아. 젠장, 이건 나밖에 못하는 일이잖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퇴근할 시간이 되자 원장님이 내일 일정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해 줬다. 엘프는 내일부터 내 후임 직원으로 출근하며, 같이 데리고 다니면서 마물원의 일을 가르쳐 주라고 했다.
원래 계획은 퇴근길에 옛날 집에 들를 예정이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곧바로 집에 돌아와 엘프에 대해 검색했다. 그래도 후임이니 잘 챙겨 줘야지. 엘프들은 무슨 음식을 좋아하나?
“뭔 죄다 외모 찬양뿐이냐.”
하지만 쓸 만한 정보는 찾을 수 없었다.
*
출근길이 평소와 다르게 몹시 설ㅤㄹㅔㅆ다. 어쨌든 후임이 생겼다. 더 이상 점심시간마다 외롭게 혼자서 밥을 먹지 않아도 되겠지. 엘프도 짬뽕을 먹으려나?
“좋은 아침입니다. 위대하신 분의 가디언이시여.”
마물원엔 미리 카르네가 도착해 있었다. 내게 깍듯이 예를 갖추는 모습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편하게 부르라고 했다.
“편하게 불러요.”
하지만 카르네는 쉽게 호칭을 정하지 못했다. 위대하신 분의 가디언, 위대하신 분의 선택받은 존재, 수호자 정다정 님. 가디언 정다정 님. 모두 껄끄러운 호칭이라 타협점으로 선배라고 부르라고 말했다.
*
아침 회의 시간,
항상 원장님과 단둘이 앉아 할 일을 지시받았지만, 이젠 카르네가 있었다. 원장님에게 지시받은 작업 내용을 카르네에게 설명해 줬다.
몹시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나쁘지만 나도 부려 먹을 수 있는 밑의 사람이 생겼다는 거잖아. 하하하.
오늘 할 일은 코카트리스 둥지를 청소하고, 녀석들을 살펴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