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124화 (124/258)

# 124화 엘프(3)

카르네가 먼저 퇴근하고, 나는 관리실에 혼자 남아 원장님이 오길 기다렸다.

“퇴근 안 했어요?”

출장에서 돌아온 원장님에게 나는 넌지시 질문했다. 엘프, 대체 녀석들이 뭐 하는 놈들인지.

나는 원장님에게 코카트리스 둥지에서 본 카르네의 신비한 힘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내가 모르는, 또한 지구인들은 모르는 엘프들의 비밀에 대해서 설명해 줬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라면 엘프들은 자연을 벗으로 삼아 살아가는 원시적인 문명을 가졌으나, 마법과 활에 능통한 종족이었다.

하지만 원장님은 엘프들이 고도화된 과학 문명을 지녔으며, 특히 환경을 유지하는 기술 분야는 지구의 기술을 아득히 초월했다고 했다.

“지구의 인간들은 편리를 위해 자연을 파괴했지만, 엘프들은 자연을 위해 시스템을 만들었어요.”

엘프들이 자연을 아끼는 건 맞았다. 하지만 너무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바람에 오히려 섭리를 거슬러 생태계가 불균형해졌다고 한다. 자연이 스스로를 해치는 현상, ‘그린 파라다이스’라 불리는 괴현상이 엘프들의 세계를 덮친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자연의 자가 파괴 현상은 엘프의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었다. 엘프들은 그린 파라다이스를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생태계를 조율하기에 이르렀다. 몇백 년의 세월이 흐르고, 수만 번의 시행착오로, 마침내 생태계를 조율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엘프가 원시 문명을 지녔다는 소문은 완전히 잘못된 오해였다.

“그녀가 새싹을 심기 전, 드루이드라고 말했을 거예요.”

“네. 분명 드루이드라고 말했어요.”

그녀의 힘에 오리하르콘이 반응하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마법인 줄 알았던 그 힘이 사실 과학과 마력 기술의 정수였다.

‘드루이드’라고 불리는 장치는 환경을 조절하는 소형 장치였다. 그린 파라다이스에 의해 탄생한 신비한 생명인 위수들의 힘을 빌려, 주변 환경을 조절하는 기계였다.

위수들의 힘을 빌려야 하기에 오직 엘프만이 사용할 수 있으며, 카르네가 보여 줬던 새싹의 폭풍 성장은 드루이드 중에서도 특별한 드루이드였다.

놀라운 사실이다.

세간에 알려진 엘프들의 신비한 마법들이 사실 과학의 힘이었다니.

물론 위수의 힘을 빌리니 판타스틱 하긴 하지만, 어쨌든 마법은 아니잖아.

“그녀는 어때요? 적응을 잘 할 것 같나요?”

나는 원장님의 질문에 잠시 고민했다. 드루이드라는 신기한 힘도 있고, 마물하고도 잘 지내는 듯하고, 이제 고집도 안 부린다고 하니까.

“네. 잘해 낼 것 같아요.”

원장님이 커피 원두들을 싹쓸이하여 챙기기 시작했다. 저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울 때마다 했던 행동인데.

“그럼 난 다정 씨만 믿고 갈게요. 꽤 먼 곳이라 연락이 안 될 거니까, 알아서 잘해 주세요!”

원장님이 출장을 떠났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고의지? 맞아. 고의야. 나를 멍청이로 아나.’

내가 곤란하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원장님은 멀리 출장을 떠난다. 한두 번도 아니고 벌써 몇 번째야? 부디 우연일 거라 믿고 싶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터지겠어?

*

퇴근길에 옛집에 들러 짐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평소에 혼자 뻘뻘 돌아다니던 야옹이가 같이 따라왔다. 무림에서 있던 일 이후로 녀석과 많이 서먹해졌다. 나는 괜히 장난치며 녀석의 궁둥이를 토닥토닥해 줬지만, 녀석이 내 손등에 스크래치를 내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래 놓고는 내가 삐져서 혼자 앞장서서 걷자, 후다닥 뛰어와 다리에 몸을 비비적거리는 야옹이다. 고양이는 정말 이기적이다. 내가 그렇게 애교를 부린다고 넘어갈 줄 알았나? 하지만 저 부드럽고, 윤기가 나는 검은 털 좀 보라지. 어쩔 수 없이 손으로 등을 쓰다듬어 주니 좋다며 꼬리를 치켜세운다.

젠장, 그래. 내가 잘못했다. 감히 궁둥이를 토닥거린 내가 잘못했지.

무너진 담벼락과 폐가, 쾌쾌한 냄새로 얼룩진 동네. 옛집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감회가 남달랐다. 저 형편없고 무너진 집에 살면서, 나는 얼마나 형편없게 무너져 있었을까.

끼이익 거리는 귀를 아프게 하는 소리와 함께 녹슨 철문을 열자, 먼지가 쌓인 내 옛날 방의 모습이 보인다. 하루라도 청소하지 않으면, 책상에 가득 먼지가 쌓이던 방이다. 몇 년을 비웠으니, 오물이 버리고 간 콜라병을 뒤덮을 만큼 먼지가 쌓일 만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추억이라도 건질까 하고 와 봤으나, 모두 건드리기 싫은 기억뿐이었다. 중고로 구입한 낡은 전기장판과 오래된 컴퓨터가 이곳에서 가장 비싼 것이다.

뽑기 인형과 저렴한 레고 장난감도 몇 개 있었으나, 이때의 기억들은 모두 잊힌 채로 놔두고 싶었다. 나는 미리 알아봐 둔 청소 회사에 연락했다.

모든 물건들을 깔끔히 버려 달라고 주문하며 집에서 나왔다.

저런 곳에서 살았다니, 과거의 나를 생각하자 약간 울적해졌다. 또한 익숙해진 지금의 삶을 돌이켜 보게 되었다. 세상에, 나는 저 때와 얼마나 달라진 거야?

오늘은 오랜만에 애마 람보르를 타고 드라이브를 나가야겠다.

*

옛집에서 나서 음침한 동네를 걷던 때였다. 근처 마물도축 공장에서 매연이 뿜어져 나왔다. 오염된 마나가 섞인 지독한 매연은 악취를 풍기며 주변을 뒤덮었다.

공장을 보는 내 시선이 고울 리가 없다. 망할 새끼들. 환경법을 개정한다고 한 게 벌써 몇 년 전이야? 괜한 위선을 부릴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민폐는 끼치지 말아야지.

냐앙!

그때였다.

야옹이가 갑자기 공장을 향해 달려갔다. 원래 사방팔방으로 잘 싸돌아다니는 녀석이지만, 이번에는 느낌이 이상했다. 야옹이가 마치 공장에 볼일이 있다는 듯 달려간다.

“뭔데?”

녀석을 따라갈 때였다.

콰아앙-!

땅이 흔들릴 만큼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나는 재빨리 몸을 던져 야옹이를 감싸 안았다. 포근이의 기운을 이끌어 내 폭발을 밀어냈다.

냥!

야옹이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고맙다는 듯 인사했다.

물론 야옹이가 이런 걸로 상처를 입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나는 야옹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폭발이 일어난 공장을 쳐다봤다.

“이게 뭔 일이여.”

활활 불타오르는 공장. 화마는 거세게 타올랐다. 연기가 하늘을 가릴 만큼 뿜어져 나온다. 주변 일대를 삼킨 엄청난 폭발이었다.

유독한 매연을 뿜어내는 공장이라, 주변이 공터이기에 망정이지 큰 피해를 낼 뻔했다.

‘무인 공장이라 다행이지.’

공장 옆의 집에서 살며 매연으로 괴로워할 때, 항의를 안 해 본 건 아니다. 문제는 저 공장은 무인 공장이라는 것이었다. 가끔씩 죽은 마물들을 반입하는 운전기사들을 제외하고 공장에 사람은 없어, 항의할 대상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느긋하게 119에 신고하고, 불타는 공장을 구경했다. 자랑하던 최신 기계가 오작동이라도 일으켰나? 재산에 막대한 피해가 났겠지. 하지만 불쌍하기보다 통쾌했다. 쌤통이라는 느낌이다.

냥!

내 옆에서 불을 구경하던 야옹이가 또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녀석이 가는 곳을 바라만 봤다. 또 뭔데 이 녀석아?

“어라?”

화제가 너무 거세서 그럴까.

나는 야옹이가 달려간 곳을 보다가 그녀를 발견했지만, 그녀는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카르네?”

분명 카르네였다.

카르네는 공터에 서서 멍하니 화재가 난 공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수상쩍어 나는 야옹이의 힘을 발휘해 존재감을 숨겼다.

나처럼 우연일까.

아니겠지.

불타는 마물 공장을 바라보는 엘프. 이 상황이 뜻하는 바가 뭐겠어?

위이잉!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나는 119라 생각했지만 도착한 자들은 전혀 다른 기관이었다. 능력자 범죄 전담반을 뜻하는 사냥개 표식이 그려진 장갑차. 쉽게 말해 범죄자인 이종족이나 헌터를 체포하는 특수 경찰들이었다.

이틀 전에 봤던 뉴스가 생각났다.

서울시에서 마물 도축 공장, 연구소가 연달아 폭발했다는 뉴스.

‘범인은 너였구나.’

나는 특수 경찰들을 피해 달아나는 카르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예감이 틀린 적이 없다고 한탄할 경지는 지났다. 점집이라도 차려야 하나 보다.

‘성가셔. 짜증나.’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

*

아침에 관리실의 문을 열자, 먼저 도착한 카르네가 인사를 건넸다. 나는 인사를 나누고 출장을 간 원장님을 대신해서, 몇 가지 오늘 할 일을 브리핑했다. 곧 가을이라 마물 우리에 쌓인 낙엽들도 청소하고, 천고마비의 계절이기에 갑자기 식욕이 늘어난 마물들을 위해 특식도 준비했다.

나는 별일 없는 것처럼 카르네를 대했다.

그녀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똑같았다. 마물 공장을 불태운 것치고 담담한 자세였다.

하루의 일과를 끝마치고 퇴근 전에 같이 다과를 나눴다. 차를 마실 때, 나는 덤덤히 물어봤다.

“어제 왜 그랬어요? 마물 공장 불태웠던데.”

마치 어제 저녁에 식사로 뭐 먹었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평안한 질문, 하지만 내용은 직설적이었다.

카르네는 침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의 찻물을 발견했다. 카르네는 분명 당황하고 있었다.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변명의 자세로 나올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상관없다. 사실 카르네가 마물 공장을 불태웠건 말건 나하고 크게 상관이 없는 일이다. 다만 원장님이 이 일을 아는가 모르는가, 그게 중요했다.

“그럼 누가 했겠어요? 어제 그 자리에 카르네 씨가 있던 걸 제가 봤는데.”

카르네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움찔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복잡한 이야깁니다.”

나는 인중을 긁적이다 어깨를 으쓱했다. 말하기 싫다는 것이다. 굳이 캐묻고 싶지 않았다.

“뭐, 개인 사정이 있겠죠.”

하지만 왜 마물 공장을 불태웠는지는 궁금했다. 그녀는 이종족, 엘프다. 대충 예상은 가긴 하지만 구체적으로 뭐가 불만이었을까?

무림에서 곽운과 대화를 나눈 이후 이세계인들이 지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엘프들은 지구를 어떻게 생각해요?”

내 질문에 카르네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깊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지구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다양하고 많은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카르네가 어떤 대답을 할 지 궁금했다.

한참 후에 카르네가 말을 시작했다.

“우리가 살던 세계에선, 지구를 정원이라 불렀습니다. 또한 다른 세계에선 발할라, 또 다른 세계에선 낙원이라 불렀지요. 상징은 다르나 의미는 같습니다.”

곽운이 해 주던 말과 비슷했다.

지구란 낙원이라는 것.

카르네의 말이 이어졌다.

“어느 날, 구멍이 생겨났습니다. 신을 믿는 자, 믿지 않는 자. 모두가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선지자와 현인들로 하여금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이라 알려졌지요. 비단 다른 세계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북방 세계의 바바리안들에게 지구란 탐스러운 약탈의 부둣가, 수인들에겐 자유로이 뛰노는 대평야. 그리하여 모두가 구멍으로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지구는 모든 존재를 품을 만큼 자비롭진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생명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만 지구에 도착했습니다.”

카르네의 이야기는 마치 신화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전이로 바뀐 세상을 따라가기만 해도 바빴다. 나 또한 마물원에 취업하기 전에는 그들의 사정을 잘 몰랐다. 어쩌면 단지 물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전이에 대한 이종족의 입장은 몹시 흥미로웠다. 문득 옛날에 살던 집을 혐오하던 나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보다 더 나은 곳을 찾는 것. 그건 인간과 이종족도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직접 와 보니 어때요?”

카르네의 목소리에서 후회가 느껴졌다. 그녀는 그늘진 얼굴로 회의적인 대답을 했다.

“고통과 번뇌는 여전했습니다. 우리가 살던 세계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는 이쯤하고 카르네에게 원장님이 돌아오면 상황을 보고하겠다고 말했다. 카르네도 원장님이 돌아오면 다른 이야기를 해 주겠다고 했다.

정말 카르네의 말처럼 마물 공장을 태운 게 그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쉬이 넘어갈 일은 아니다. 카르네도 속사정이란 게 있겠지. 그걸 판단하는 게 ‘고용주‘인 원장님의 몫일 테고.

카르네에게 퇴근하라고 했다.

하지만 카르네는 그새 마츄들과 친해졌는지 녀석들과 있다가 자신이 정리하고 퇴근한다고 대답했다.

폭포가 내리는 천공섬과 복슬복슬한 마츄들은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안정되겠지. 나는 알아서 하라고 말하고 먼저 마물원을 나섰다.

그리고 야옹이의 힘을 빌려 기척을 숨기고 그늘진 나무 아래에 몸을 숨겼다.

‘카르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 다만 불안을 숨겼을 뿐이지.’

카르네와 대화하면서 나는 위수의 말도 들었다. 카르네의 소울메이트, 하얀 원숭이인 위수는 내게 말했다. 그녀를 도와달라고.

어쩔 수 있나.

가만히 앉아 관망할 수는 없었다.

원장님이 나를 믿고 맡기고 갔으니까.

*

잠시 후, 카르네의 주변으로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나타났다. 나조차 감지할 수 없을 만큼 갑작스럽고 은밀하게 나타난 자들이다.

하지만 카르네는 예상했다는 듯 놀라지 않았다. 다만 카르네 안의 하얀 원숭이, 위수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나는 위수의 감정을 읽어 카르네의 마음도 알 수 있었다. 카르네의 불안의 원인이 저놈들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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