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엘프(4)
검은 옷을 입고, 복면을 쓴 괴한들이 인간이 아니란 것을 나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녀석들에게서도 카르네와 똑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위수, 저 자들도 위수를 품고 있어. 놈들이 카르네를 앞장세우고 마츄 우리로 향했다. 그 앞에서 카르네와 놈들 간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윽고 카르네의 몸이 초록빛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어디선가에서 날아온 쇠구슬에 카르네는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철구를 던진 자도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입고,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카르네가 쓰러지자 몇 명의 괴인들이 더 모습을 드러냈다. 카르네를 경계하여 모습을 숨기고 지켜본 듯했다.
나는 감각을 더 넓혔다.
용과 지내며 오랫동안 갈고닦은 날카로운 기감으로 주변에 숨은 모든 검은 옷의 괴인들을 파악했다. 쉬운 일이었다. 놈들의 몸에 깃든 ‘위수’들을 파악하기만 하면 되니까. 숨어 있는 자는 더 없었다. 카르네를 둘러싼 열두 명이 끝이다.
마물원에는 관리실과 우리를 제외하고, 별다른 방범 장치가 없다. 애초에 용이 지키고 있는 곳이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용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는 좀도둑이야 문제될 것 없었고, 용의 기운을 느끼는 침입자라면 아무리 미친 새끼라도 원장님의 잔재된 기운에 겁먹어 도망치고 만다.
‘용이 있는 걸 모르는 걸까? 아니면 용을 무서워하지 않는 머저리들인가.’
놈들은 기절한 카르네에게서 직원용 카드를 훔쳤다. 임시 직원용이기에 별다른 패스포트는 필요치 않았다. 높은 등급의 마물 우리는 열 수 없으나, 마츄 우리 정도는 입장이 가능하다.
나는 놈들의 목적을 파악하기 위해 잠자코 지켜만 봤다. 반절의 인원이 남아서 주변을 살피고 남은 자들이 마츄 우리로 들어갔다. 그 즉시 나는 행동에 나섰다.
흉포한 마물들마저 잠재우는 윙바레사 특제 마취약을 손톱에 바르고, 기척을 숨긴 채 그들에게 다가갔다. 야옹이와 교감하여 고양잇과 동물처럼 날카롭고 뾰족해진 손톱은 순식간에 살점을 파고들어갈 것이다.
놈들은 내가 지척까지 도달했음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수월했다.
단지 놈들의 시선이 내게 닿기 전에, 나는 손톱을 박아 넣는 것만으로 놈들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일곱 명을 제압하는데, 비명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싸움이 아닌 깔끔한 사냥이었다.
쓰러진 놈들의 몸에서 위수들이 나와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는 조용히 녀석들을 바라봤다. 제 친구를 해친 내게 적대하던 위수들은 다시 모습을 숨겼다.
아라크네의 거미줄을 뿜어 놈들의 손발을 묶고 입을 봉인했다. 그리고 기절한 카르네도 거미줄로 결박시켰다. 상황을 파악하기 전까지 카르네를 깨울 필요는 없었다.
재빨리 처리하고 마츄 우리로 들어갔다. 여차하면 놈들의 생사와 관계없이 힘을 쓸 생각이었다. 허리까지 자란 갈대숲에 몸을 숨기고 놈들을 지켜봤다.
‘뭐 하는 거지?’
마츄들이 위험하면 나서려고 했으나, 그런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엘프들은 그저 마츄들을 우리 바깥으로 이끌었다. 마츄들은 멋도 모르고 잘 따라갔다. 나는 놈들이 마츄들과 공간 이동 지점을 넘기 전에 뛰쳐나갔다.
“니들 뭐 해? 나쁜 아저씨들 따라가는 거 아니야.”
마츄들은 내 말에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엘프가 아무리 마물과 친화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 말 한마디에 마츄들은 엘프를 위험한 적으로 생각했다.
“자, 나쁜 아저씨들. 나 좀 봅시다.”
엘프들은 내 등장에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나를 알고 있는 건가? 카르네가 말해 줬을 수도 있지. 놈들은 대꾸 없이 곧바로 공격을 준비했다.
‘저것도 드루이드인가.’
놈들 안에 숨어 있던 위수들이 힘을 발한다. 그러자 엘프 다섯 명의 주변으로 쇠구슬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신기하게 지켜봤다. 공중에서 철가루가 뭉치더니, 카르네를 기절시킨 쇠구슬이 되어 간다. 나를 죽일 요량인지, 쇠구슬의 숫자가 수십 개를 넘어갔다.
슝-!
이내 쇠구슬이 발사된다.
나는 피하지 않았다. 담담히 검을 뽑아 휘둘렀다. 수십 개의 구슬은 손쉽게 갈라졌다.
‘쓰면 쓸수록 익숙해지는군.’
형의검을 배운 이후, 검을 다루는 실력이나 마음가짐이 모두 달라졌다. 가끔씩 검 한 자루로 얼마만큼 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퇴근하고 시간이 남을 때마다 틈틈이 수련을 하지만, 역시 실전 경험이 최고인 듯했다.
놈들은 다시 더 큰 쇠구슬을, 더 많이 만들어 내려고 했다. 똑같이 베어 버릴 수 있지만 너무 시시하다. 놈들은 수련거리도 되지 못해.
검을 집어넣으며 달려갔다.
한 방에 한 놈.
감히 우리 마츄들을 데리고 나가려고 한 괘씸죄를 추가하여, 면상에 주먹으로 자국을 내 줬다.
기절한 놈들을 아라크네의 거미줄로 칭칭 묶었다.
놈들을 질질 끌고 우리 바깥으로 나가자, 정신을 차린 카르네가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왜 가만히 있는 거야! 링링!”
카르네는 위수의 힘을 빌려 드루이드를 발동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하얀 원숭이는 잠자코 앉아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과연, 영리한 녀석이다. 상당히 카르네를 좋아하는구나. 친구가 괜한 말썽을 부리기 전에 똑똑하게 행동했어.
“링링……!”
카르네가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찔리는 게 있는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거미줄로 고치가 된 그녀를 어깨에 들쳐 업었다.
거미줄로 묶인 엘프 열둘을 끌고 와 관리실에 던져 놓고, 카르네를 풀어줬다.
“자, 어디 한번 들어 봅시다.”
나는 그녀의 변명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엘프들 중 한 놈이 깨어나는 바람에, 우선 놈의 말부터 듣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게 생겼네.’
놈들은 엘프이긴 해도 카르네와 달랐다. 백옥 같은 피부가 아니라, 시멘트 반죽처럼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지고 있다. 눈동자도 흰자가 없다. 엘프답게 잘생기긴 했으나 대체적으로 음침하게 생겼다. 사람도 황인, 흑인, 백인이 있듯 엘프도 인종이 다른 건가?
“이봐요. 왜 그랬어요? 마츄들을 훔쳐서 뭐 하려고.”
마물 도둑놈은 입술을 깨물며, 나를 표독스럽게 쳐다봤다. 상당히 고집이 강한 것처럼 보였다. 엘프어로 무언가를 씨불씨불 거렸는데 욕처럼 들렸다. 후, 이럴 때 원장님이 있다면 편했을 텐데.
“진실의 방으로.”
나는 우선 놈을 동료들과 떼어 놓았다. 창고로 놈을 끌고 와 내팽개쳤다. 놈은 겁에 질렸으나, 여전히 표정은 고집스러웠다.
딱히 내가 뭘 하고자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보기에는 상당히 추악하겠지.
“이리 오렴.”
놈의 몸에 깃들어 있던 위수, 작고 검은 도마뱀은 내 말에 모습을 드러냈다.
“로온!”
손을 내밀자 도마뱀 위수가 팔목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무표정하게 엘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착한 아이네. 불쌍해라. 못된 주인을 만나서.”
도마뱀 위수를 손에 쥐고, 포근이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이내 내 손에서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안 돼!”
놈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젠장, 연기라고 해도 내가 너무 못된 놈인 것 같잖아. 위수와 엘프가 서로를 제 목숨처럼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이용했다.
나는 불타는 손으로 도마뱀 위수를 쥐고 다시 놈에게 물었다.
“왜, 뭣 때문에 침입했는지 육하원칙으로 달달 말해 봐.”
놈의 대답이 늦어질수록 불꽃은 더 강렬해졌다. 결국 눈물, 콧물을 흘리던 놈이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포근이의 힘을 거뒀다. 해치고자 하지 않는다면 단지 따뜻하기만 할 뿐인 샐러맨더의 불꽃. 사실 도마뱀 위수가 기분이 좋아서 골골 거렸다는 것을 놈은 몰랐을 것이다.
“불쌍하오. 갇혀 있는 마물들이 불쌍하오! 우린 마물들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고자 했소.”
“뭐?”
이 무슨 생뚱맞은 대답이야.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욕망이 이유였다면 이해했을 것이다. 근데 뭐? 자유를 되찾아 주고자 했다고?
“너, 마물원이 용이 운영하고 있다는 거 몰랐냐?”
엘프는 악을 내지르며 소리쳤다.
“아무리 위대한 자라고 하더라도 오만방자하오! 어찌 자연에 사는 마물들을 우리에 가둘 수 있단 말이오!”
‘이 새끼, 용을 만나 본 적 없구나.’
원장님이 오만방자하단다.
쯧, 하루만 마물원에서 일해 본다면 알 터인데. 용들은 격이 달라.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사는 우리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스케일로 노는 천상계 존재들인데.
나는 당장 놈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 내며 질문했다.
“마츄 우리들 못 봤니? 그게 작은 우리로 보였어?”
“크기는 중요하지 않소. 인위적인 자연이 어찌 대자연을 대신한단 말이오! 마물들은 우리에 갇혀 고통 받고 있소!”
어떤 형님이 그랬다.
멍청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그보다 무서운 게 없다고. 저놈이 가진 신념이 당체 뭘 근거로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더 답답했다.
“니들이 어떻게 알어?”
“알 수 있소. 난 자연의 수호자, 룽페로겐의 후예! 그 아무리 용이라고 할지라도 섭리를 거스르는 일은 용납할 수 없소!”
“아니, 그게 아니라. 니들이 어떻게 아냐고. 마츄들이 불행한지 고통 받는지 어떻게 아냐니까?”
“쉬운 이야기요. 자유를 빼앗겼으니 고통스러울 수밖에!”
“하, 그 새끼 참.”
그러니까 나처럼 녀석들의 마음을 읽을 수도 없는데, 마물들이 고통스러워할 거라는 지레짐작으로 이 짓거리를 했단 말이지.
이왕 이렇게 된 것 끝까지 들어 보자.
“좋아. 그렇다 치자. 그러면 마물들을 풀어놓고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데?”
“대자연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오.”
“지구에 마물들이 자유롭게 하하, 호호 뛰놀 수 있는 대자연이 어디 있지? 헌터들이 눈을 부라리며 돌아다닐 텐데.”
북극해에서도 헌터가 활동하고 있었다.
아직까지 지구에 완전한 대자연은 없다. 전이가 끝난다면 모를까.
“그것 또한 섭리요.”
“뭐?”
“대자연에서 뛰놀다 사냥을 당하더라도, 그 또한 섭리라는 이야기요. 우린 자유를 줄 뿐, 그 후의 처사는 마물들이 알아서 개척해야 하는 법! 그게 자연의 섭리라는 것이요!”
결국 참지 못하고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뭐야. 위선자인 줄 알았는데 그냥 또라이였잖아. 그래. 마물원에 마물이 갇혀 있는 걸로 보였다 그거지.”
짜증이 치솟았다.
마물원에서 일하며, 원장님과 일하며,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데. 놈의 말에 원장님과 내 업적이 우스꽝스러워 졌잖아.
“마물들은 니들과 달라. 왜 지구로 왔겠어? 오고 싶어서 온 줄 알아? 살던 세계가 멸망해서, 전이에 집어삼켜서. 어쩔 수 없이 온 거야. 근데 막상 와 보니 잘못 한 것도 없는데, 막 사냥 당해. 물론 마물들 중에서도 사이코들은 있어. 그래서 놈들이 서로 싸우고 지지고 볶고 하는 건 나도 상관 안 해. 하지만 이렇게 가만히 놔두면 결국 전이가 끝났을 때, 남는 마물이 있다고 생각해?”
원장님이 그랬지.
전이가 끝나면, 인간과 마물과 이종족이 조화롭게 사는 데 마물원이 큰 일조를 할 거라고. 그러기 위한 시스템이라고.
“난 잘 몰라. 원장님이 하는 일이 정말 가능한 일인지 모른다고. 하지만 전이라는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할 수 없다면, 니들처럼 대책 없이 일을 벌이는 게 역효과라는 건 알겠다.”
전이가 끝났을 때, 세상이 모든 걸 받아들일 만큼 성숙해졌을 때, 그 때쯤이면 마물이 자연에서 살아도 될지 모른다. 하지만 확실히 지금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니 해치기밖에 더 하겠어?
“따라와.”
나는 놈을 데리고 마물원을 돌아다녔다. 대해를 옮겨 놓은 아쿠아리움과 드넓은 마물 사막까지.
만약 이 모습을 보고도 마물이 갇혀 있다니 뭐니 하면 놈들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 후 다시 물어봤을 때,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