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엘프(5)
관리실로 돌아오자 원장님이 도착해 있었다. 원장님은 마물원에서 공간 이동 마법이 짧은 시간에 연달아 발동된 것을 이상하게 여겨 돌아왔다고 했다.
“니들 이제 엿 됐다.”
나는 원장님에게 그들의 처분을 맡겼다. 하지만 뜻밖에도 마물원에 침입해 몰래 마츄들을 풀어주려던 놈들을 원장님은 너무 쉬이 놓아주었다. 나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자비를 베풀었어요. 아직 세계수의 언약을 풀지 않았거든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원장님이 말했다.
세계수는 그린 파라다이스로 탄생한 위수들의 어머니라고 하였다. 또한 드래곤들의 지도자가 세계수로부터 힘을 얻는 대신, 드래곤들은 엘프들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맹약을 걸었다고 한다.
만약 자신이 직접 나선다면 ‘드래곤 로드’가 맹약을 어긴 드래곤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테고, 그 상황이 오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며, 분하지만 그냥 넘어가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하였다.
‘드래곤 로드…….’
또 저자가 언급되었다.
저번에 비의 신수 바루나를 몰아낼 때나 무림의 기린을 만날 때, 원장님께서 드래곤 로드를 피해야 하기에 직접 나서지 못한다고 했지. 잘은 몰라도 원장님이 드래곤 중에서도 높으신 양반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듯했다.
‘이대로 끝내진 않을 거야.’
엘프들을 그냥 보내 버렸다.
원장님은 잠자코 있었지만, 나는 이 일이 이렇게 싱겁게 끝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또 나를 시키겠지. 괜찮다. 이번에는 나도 열을 좀 받았다. 녀석들을 혼내 주는 일이라면 기쁘게 나설 생각이다.
“카르네, 다정 씨와 이야기가 끝나면 원장실로 오세요. 감히 용을 속인 대가를 치러야 할 거예요.”
싸늘한 원장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공포를 느꼈다. 저 분노의 대상이 내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카르네도 용의 분노를 느끼고 흠칫 몸을 떨었다. 원장실에서 일대일 대면, 과연 어떤 참극이 벌어질지 나는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원장님은 우선 카르네의 이야기를 들어 보라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어쩌면 이승에서 마시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차를 타 줬다.
“그들은 체인트리스 엘프, 또는 다크 엘프라고도 불려요.”
차를 홀짝이던 카르네가 말을 시작했다.
“지구에 전이된 엘프들 중에 다크 엘프들은 가장 과격한 사상을 지녔어요. 심지어 신념을 위해 동족마저 해칠 만큼.”
엘프들이 세간에 알려진 것에 비해 직접 볼 수 없는 것도 다크 엘프 때문이라고 했다. 많은 엘프들이 다크 엘프를 피해 숨어 지내며 그들을 두려워했다.
“내겐 그들을 막을 의무가 있어요.”
“의무?”
“난 세계수의 일곱 가지. 이끌 자의 운명을 지닌 하이 엘프.”
카르네는 평범한 엘프가 아니었다. 하이 엘프, 다른 엘프들과 달리 태어나자마자 위수의 선택을 받는 비범한 태생의 엘프라고 한다.
“엘프는 공존을 숭배하지만 다크 엘프는 자유를 경배해요. 그들은 단지 자유를 위해 싸우죠, 어리석게도.”
다크 엘프란 놈들은 엘프 세계에서도 과격한 환경 운동가 느낌이었다. 이종족이나 인간이나 선을 넘은 새끼들은 정말 무섭다.
“마물 공장을 불태운 것도 놈들이었군요.”
카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크 엘프를 막기 위해 그 장소에 있었던 것이다. 놈들은 제 신념을 위해 테러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지금까지 우연찮게 인명 피해가 없었을 뿐이지, 이대로 놔두면 심각한 테러를 저지를 수도 있겠지.
“다크 엘프들은 자신들이 지구를 바꿀 수 있다고 믿어요. 오만한 자들, 그럼으로 우리 세계가 멸망에 가까워졌는데.”
“멸망에 가까워졌다니요?”
“대전이가 발생한 이후, 다크 엘프들은 일곱 개의 세계수중 반 이상을 강제로 뜯어냈어요. 그린 파라다이스 이후 탄생한 세계수를 섭리에 거스른다고 판단한 거죠. 그로 인해 전이가 발생했다고… 무지함이 일으킨 대참사예요. 정작 자신들도 위수의 힘을 빌리는 주제에!”
침착하게 말을 하던 카르네가 감정에 북받쳐서 소리를 지른다.
“이번엔 반대로 지구에 거짓된 세계수를 심으려고 해요! 지구를 자신들이 조율할 수 있다고 믿어요! 멍청한 광신도들!”
나는 찻잔을 채워 주며 카르네가 진정되길 기다렸다. 카르네는 몇 번 따뜻한 차를 홀짝이더니, 진정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탁상을 손가락으로 툭툭툭 치다가 머리를 박박 긁으며 말했다.
“일단 원장님에게 가 봐요.”
대충 사정은 알겠다. 하이 엘프인 카르네가 다크 엘프들이 저지르는 만행을 막기 위해, 마물원을 ‘이용’하려고 했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판단할 일은 아니다.
카르네는 머뭇거리며 원장실로 걸어갔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발걸음이 처절해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얼마나 무거울까.
결국 카르네는 원장실의 문고리를 돌렸고,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금 감고 말았다.
*
잠시 후, 원장님과 카르네가 나왔다. 둘 다 멀쩡해 보였다. 원장님은 개운한 표정으로 커피를 탔다.
하지만 카르네는 소파에 앉자마자 두 눈에서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얼굴은 평안해 보이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줄기가 너무 서글퍼 보였다.
“괜… 괜찮아요?”
내 질문에도 카르네는 묵묵부답이었다. 영혼이 빠져나간 듯 초점이 공허했다.
“카르네?”
반응하지 않는 카르네의 어깨를 툭툭 쳐 봤다. 그때였다. 카르네는 소파가 들썩거릴 만큼 격하게 몸을 떨며 무언가를 읊조렸다.
“갈망, 부식, 열일곱…….”
“뭐요?”
그 모습이 퍽 무서워 어깨를 쥐고 흔들자 그제야 카르네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아, 아니에요.”
언제 그랬냐는 듯 카르네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나는 카르네의 눈동자에 깃든 공포를 읽을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원장님은 엄청 산뜻하고 개운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자, 계약은 체결되었으니 카르네를 도와줘요! 내 가디언!”
무슨 계약……?
아니, 궁금해 하지 말자.
싱글벙글 웃던 카르네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
원장님이 말했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용의 가디언으로서 할 일이며, 엄청 어렵고 힘든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일이 옳게 끝난다면 나는 분명 전에 없던 놀라운 힘을 얻게 될 것이며, 자신은 다정 씨를 믿으니 꼭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그다지 기쁘진 않았다. 분명 내가 며칠 전에 원장님의 가디언이 되고 싶다고 말하긴 했었지, 젠장.
거부할 수는 없었다.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원장님이 해야 할 일들을 말해 줬다.
다크 엘프.
지구의 헌터들이 그들을 주시하고 있다고 한다. 뉴스는 제한된 정보를 공개한 것이었다.
이미 전 세계에서 마물 공장을 폭발시킨 게 다크 엘프임을 확신하고 있으며, 헌터 세계에서 다크 엘프들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고 한다. 문제는 다크 엘프들이 대규모 테러 행위를 계속 벌인다면, 국제기구마저 더 이상 묵과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이종족과 인간들 간의 전쟁이 일어날 테고, 다크 엘프와 인간의 대립은 연쇄적으로 다른 이종족 간의 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원장님은 자신이 나서면 쉽게 해결될 문제지만, 만에 하나로 드래곤 로드가 나선다면 단지 종 간의 전쟁에서 그치지 않기에 나설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며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비밀리에 내가 나서 다크 엘프들을 굴복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다크 엘프는 자유를 신봉하나, 그들 스스로는 지독한 위계질서 속에서 살아가요. 지구에서 활동 중인 다크 엘프들의 수장을 굴복시킨다면 어처구니없는 테러행위를 막을 수 있을 거예요.”
다크 엘프는 지극히 모순적인 놈들이었다. 섭리대로 살아가는 걸 추구하면서, 지들끼리는 확실한 위계질서를 나누어, 지위에 따라 막강한 권력을 가졌다. 현 다크 엘프의 수장은 과격한 사상을 지녔는데, 만약 내가 다크 엘프의 수장을 굴복시킨다면 숨어 지내던 온건파와의 분열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다크 엘프 수장.
인간과 달리 엘프들은 넘버원 자리를 꿰차기 위해 권력에 걸맞은 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내가 어떻게 이겨요? 다크 엘프 수장이라면서요. 강할 텐데.”
“그래 봤자 약해요.”
원장님이 나를 과대평가하는 걸까? 원장님은 내가 다크 엘프 수장을 이긴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정말요?”
내가 나를 못 믿어 다시 물어보자, 원장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차, 화났나? 근데 왜 화 내는 거야?
그녀는 살짝 올라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리 인간들에게 특별한 힘이 생겼더라도, 어떻게 이계의 전이에 대응할 수 있었겠어요?”
“그건…….”
“저번에 말했잖아. 세계의 강자들은 지구가 버티지 못해 넘어오지 못했다고. 혹은 강제로 휩쓸린다고 하더라도 ‘케르베로스’처럼 힘을 잃어 버린다고요. 기껏해야 엘프들의 수장, 용의 가디언이 겁먹어서 되겠어요?”
뭐, 용이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다른 한 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다크 엘프가 짐승도 아니고, 힘으로 때려눕힌다고 해서 말을 잘 들을까요?”
원장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안 듣죠.”
“네?”
당황하며 물어봤다.
원장님은 씩 웃으며 카르네를 가리켰다.
“굴복시킨다는 건 힘뿐만 아니라 자존심과 명예를 무너트린다는 것.”
카르네는 흠칫 몸을 떨며 원장님과 나를 쳐다봤다.
“엘프들의 결투는 ‘격’에 맞추어 벌어지지만, 다정 씨는 용의 가디언이기에 격은 충분해요. 남은 건 ‘신분’, 서로 명예를 걸고 싸울 명분이 필요하죠.”
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원장님은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카르네와 결혼해요. 일곱 번째 가지의 수호자이자 하이 엘프의 반려자라면 신분은 충분하니까.”
드래곤과 일하며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마물에게 수유하기, 출산을 도와주기, 마물의 앞에서 춤추고 노래 부르기.
“이젠 하다못해 위장 결혼까지 시키려 드네?”
실수했다. 당황한 나머지 반말을 해 버렸다. 아니, 이 말은 속마음으로 남겨 둬야 했을지도 모른다.
원장님은 내 무례에도 이해한다는 듯 씩 웃었다. 대신 두 번의 말대답은 용납하지 못한다는 듯 확실히 못을 박았다.
“지금 바로 다크 엘프과 접촉할 테니 준비해 두세요. 어색하지 않게 지금 서로 애칭이라도 정해 둬요. 호호호.”
가끔 보면 원장님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 대단해.
나는 괜찮다.
뭐, 위장 결혼이고 서류상 유부남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카르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는 원장님에게 다시 반항했다.
“꼭 제가 나서야 하나요? 것보다 카르네가… 카르네가 다크 엘프의 수장을 굴복시키면 되지 않을까요?”
카르네는 하이 엘프였다. 굳이 내가 위장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카르네가 다크 엘프의 수장을 굴복시킬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
“아니.”
내 질문에 대답한 것은 카르네였다.
그녀의 표정은 씁쓸했다. 나는 그제야 카르네의 울적한 표정의 이유를 깨달았다. 결혼 때문이 아니었구나.
“지금까지 계속 시도해 왔지만 그는 날 가치 없는 존재로 생각해요. 싸울 가치도 없는 존재. 내가 나약해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 이번에도 날 이용하고 속이려고만 했겠죠. 뭐가 하이 엘프란 말입니까. 난… 아무 것도 아닙니다.”
*
대전이 이후, 세계에는 지구의 환경이 아닌 것들이 나타났다. 이종족과 마물뿐만 아니라 지형과 환경도 그렇다. 다크 엘프들의 숨겨진 은신처도 그러했다. 지구의 환경이 아니며 세계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신비한 곳이었다.
언뜻 보아, 녹림이 우거진 대자연의 숲이었다. 하지만 마물이 너무 포화되어 있었다. 보이는 곳마다 마물이 보였다. 숨을 쉴 곳도 없이 마물이 꽉꽉 들어찬 생태계. 걷는 몇 분 동안에도 수많은 마물들이 서로 잡아먹고 잡아먹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크 엘프들이 보였다. 우리를 마중하러 온 다크 엘프들은 화려한 복장을 갖추어 입고, 고개를 숙여 예를 다했다.
다크 엘프들은 숲의 깊숙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나는 카르네를 보며 말했다.
“가 볼까, 허니?”
“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원장님이 애칭을 정하라고 했잖아요.”
“엘프는 사랑하는 자를 그렇게 부르지 않아요.”
“그럼 어떻게 부르는데요?”
카르네는 뺨을 새빨갛게 붉히고, 눈썹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안 알려 줄 거예요.”
한참 걸었을까, 마침내 우리들 앞에 다크 엘프의 마을이 나타났다. 아니, 마을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