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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130화 (130/258)

# 130화 엘프(9)

카르네가 경기장으로 내려왔다. 그녀의 움직임은 날쌘 표범과 같았다. 자신에 차 있는 눈빛은, 다크 엘프 귀족들이 차고 있는 그 어느 보석보다도 아름답게 빛났다.

그에 반해 구탄은 모든 것이 치졸했다. 어쩔 수 없이 수령투를 승낙했기에, 바깥으로 넘실거리는 붉은 기운을 잠재우지 않고 언제든지 발산시킬 준비를 했다. 그는 경기가 시작되면 곧바로 공격할 기세였다.

데엥-! 데엥-!

다시금 승부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러 퍼졌다. 즉시 구탄의 드루이드가 카르네의 발밑을 불태운다. 하지만 카르네는 예상했다는 듯 매처럼 날아올라 하얀 기운을 내뿜었다. 카르네의 힘에 부글부글 끓는 용암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드루이드를 다루는 엘프들 간의 대결은,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마법사들의 대결처럼 보였다.

‘아름답다.’

하지만 카르네와 구탄 사이에 다른 점이 있었다. 구탄은 드루이드의 힘에 의존했으나 카르네는 달랐다. 때로는 빙설에 숨은 벌레를 찾아내는 여우처럼 매섭게 날아올라 구탄을 공격했고, 허겁지겁 도망가는 구탄을 벌집을 공격 당한 말벌처럼 끈질기게 ㅤㅉㅗㅈ아가 혼내 주었다.

대결은 일방적이었다. 구탄이 그동안 카르네와 대결을 무시한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현명함에 기인한 것이었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결코 카르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땅이 얼고, 불타고, 신록이 우거졌다가, 강풍이 불어 닥치길 몇 번. 결국 구탄은 카르네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다.

“지금! 일곱 번째 가지가 첫 번째 바위를 꺾었다!”

승자가 결정됐다.

나는 구탄과 카르네의 대결을 지켜보며 확신했다. 그 누가 이들의 싸움에 딴죽을 걸까? 구탄도 필사적으로 싸웠고, 카르네도 제 힘의 진면목을 선보였다.

수령직을 놓고 싶지 않는 구탄의 욕심과 그동안 이루지 못한 신념에 대한 카르네의 처절함도 느껴졌다. 마침내 카르네가 구탄을 이기고 내지른 환호에, 보는 사람조차 전율이 일어났다.

“말해 두겠다. 난 원로회의의 대변자이자 이끄는 자, 하이 엘프로서 같은 뿌리인 너희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올랐다. 내게 불만이 있는 자, 지금 나와 내게 맞서라!”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이내 어디선가부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카르네를 옹호하던 온건파의 엘프들인가?

“카르네! 카르네!”

놀라운 것은 환호가 점점 퍼져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구탄의 편에서 우릴 비웃던 다크 엘프들마저 카르네의 이름을 연호했다.

“끝났어.”

카르네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수많은 엘프들의 시선에도 겁먹거나 당황하지 않고 당차게 행동했다. 손을 추켜올려 제 승리를 기뻐했다.

“이제 카르네가 이끌겠지.”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들은 대체 뭘까. 약간의 회의감이 들었으나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사실 외부인인 내가 엘프의 사회에 개입해 봤자 얼마만큼 효과가 있겠어.

“카르네! 카르네!”

다크 엘프들이 카르네의 이름을 연호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뺨을 긁적였다. 내가 잘 모르는 부분도 있었나 보다. 어쩌면 예전부터 다크 엘프들은 카르네를 인정하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네.

“카르네!”

나 또한 카르네의 이름을 부르며 새로운 지도자의 탄생에 축하를 보탰다.

*

저처럼 추악하고 구차한 생물이 어디 있었을까. 구탄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또다시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그의 투정을 받아 줄 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그의 외침은 군중 속에서 고독하게 울러 퍼졌고, 다크 엘프들은 아무도 그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쓸쓸하게 퇴장했다.

주인공은 이제 카르네였다.

수령투가 끝난 후 일이 바쁘게 돌아갔다. 정확히는 카르네와 엘프들이 바빴다. 나는 정령정에서 위수들의 처우가 개선하는 것을 주도했지만 그들의 하루에 비하면 한산한 편이었다.

다크 엘프의 도시는 뛰어난 시설을 자랑했으며, 엘프의 기술력으로 얼마든지 시설의 규모를 늘릴 수 있었다. 카르네가 말해 주길 다크 엘프뿐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에 흩어져 숨어 지내던 엘프들도 이 지하 도시에 모인다고 했다.

카르네는 ‘이끄는 자’가 되었다. 지구로 전이 당한 엘프의 상당수는 젊은 풋내기였다.

별다른 일이 없는 한 그녀의 지위는 견고해 보였다.

구탄은 수장직을 박탈당하고 엘프 회의에서 영구적인 제명을 당했을 뿐, 그외의 별다른 제제는 당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카르네를 무시하고 이용한 죄밖에 없는 놈이다. 카르네가 용서하겠다는데, 내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뒤늦게 원장님이 도착하더니(이제는 왜 지금에서야 등장하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일부러 연락을 무시했겠지.) 엘프들과 협력 프로젝트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원장님은 엘프들의 드루이드 시스템을 이용하고자 했다. 엘프의 지식은 전이 이후의 세계에서 꼭 필요한 정보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모든 과정이 불과 몇 주 만에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드래곤과 엘프의 협력을 축하하는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진짜 노래와 춤은 우주 공통이네요.”

파티는 흥겨웠다.

엘프들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흥을 낼 때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문득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나 본 모든 이종족들은 춤과 노래를 좋아했지. 심지어 마물들조차.

나는 파티에서 카르네의 파트너가 되어야 했다. 일단 엘프들에게 우리는 연인 사이였으니까.

나는 카르네를 이끌고 무대 위로 올랐다. 모두가 주목하는 바람에 카르네는 얼굴을 붉혔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 춰 봐요.”

나는 카르네에게 ‘훔바바다’의 춤을 보여 줬다. 하지만 다소 격정적인 춤에 카르네는 질색했다.

“이건 어때요?”

조금은 소프트하게.

타래딱새의 춤을 춰 보였다.

엘프들은 생각보다 고지식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내 춤에 엘프들이 열광하며 따라 춘다. 하지만 카르네만은 시큰둥했다.

“어쩔 수 없지. 내 비기를 보여 주죠.”

나는 그간 마물과 교감하며 배운 모든 춤사위를 접목하여 나만의 댄스로 승화시켰다. 무공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형의검을 가르친 곽운 사부도 이런 의도로 가르친 것은 아닐 것이다.

“아하하!”

결국 카르네는 웃음을 터트리며 춤을 따라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사용 방법이지.

암, 그렇고말고.

카르네와 나는 노래가 끝날 동안 엉덩이를 실룩거렸다.

*

“마물원 후임에서 순식간에 엘프들의 지도자가 되셨네.”

카르네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이곳에 남아 많은 일을 해야겠지. 씁, 꽤 괜찮은 후임이었는데. 카르네는 내가 너스레를 떨며 칭찬하자 잔잔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이끄는 자와 지도자는 달라요. 구탄처럼 오만하게 굴 생각은 없어요.”

“카르네 씨는 잘할 거예요.”

작게 보면 카르네를 도와 엘프 사회를 개변시킨 것이지만, 큰 그림으로 본다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카르네는 엘프들의 대표자로서 전이로 거대해져 가는 지구에 훌륭한 초석이 되어 줄 테지.

“잘 있어요.”

카르네가 다가와 내 뺨에 입술을 갖다 댔다. 나는 이 행동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저 고마움의 표시겠지. 그 이상을 기대하는 것은 멍청이다.

“고마워요. 나의… Φο?βο?(포이보스).”

“네?”

카르네는 대답하지 않고 손을 흔들며 쪼르르 도망쳤다. 포… 포이보스? 그게 뭐지? 번역기도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였다. 지금 상황에 나를 욕할 리는 없을 테니 조금 오그라드는 감사의 표시인가?

*

“저 녀석, 다정 씨에게 볼일이 있는 모양인데요.”

원장님과 나는 공간 이동 마법으로 마물원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어떤 녀석의 방해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또 쫓아왔네.”

위호 정령정에서 몇 주간 일했을 때부터 나를 끈질기게 쫓아오던 한 녀석이 있었다. 뒤통수에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나는 콧잔등을 긁적이며 뒤돌아봤다.

“언제까지 쫓아올 거야.”

저 멀리 원숭이 한 마리가 서 있다. 작은 원숭이, 덩치는 기껏해야 내 손바닥만 하다. 생김새는 마모셋원숭이가 생각났다. 새의 날개 같은 귀의 털이 인상적인 녀석이다.

“반짝아, 살던 곳으로 돌아가렴.”

녀석이 황금처럼 빛나는 털을 가져, 정령정에서 일할 때 반짝이라고 불렀다. 특별히 잘해 준 것은 아니었다. 위수들 중에서도 유별나게 고기를 좋아하는 터라, 소시지 몇 개 더 얹어 줬을 뿐인데.

[고기!]

황금털 원숭이는 내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쫓아왔다. 그러다 원장님을 보며 흠칫 놀래더니 다시 쪼르르 원래 자리로 도망쳤다.

[고기! 고기! 고기!]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고기를 달라고 외친다.

“돌아가. 고기는 나중에 먹을 수 있잖아.”

[고기!]

녀석의 억지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원장님의 시선이 점점 따가워진다. 예전에 그랬던가? 용의 시간을 잠시라도 낭비하게 했으면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고?

위수란 녀석들은 생물의 개념과 약간 달랐다. 흡사 유령이라고 해야 하나, 정령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알맞겠지. 물리적으로 쫓아내는 방법은 힘들었다. 아마 공간 이동 마법을 펼치면 녀석도 뛰어들겠지.

저놈을 확 데려갈 수도 없고.

‘잠깐.’

왜 데려가면 안 돼?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음흉한 속내를 숨기며 녀석을 불렀다. 원장님의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걸어오던 녀석은 가까워지자 우다다 뛰어와 내 몸으로 파고들었다.

‘언제 느껴도 묘한 느낌이야.’

위수가 몸으로 파고드는 기이한 느낌. 사실 느낌은 평소와 별다를 것이 없었다. 내 몸 안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점만 빼면.

[고기 줄 거야?]

나는 씩 웃으며 녀석에게 말했다.

“알았어. 고기 많이 먹게 해 줄 테니까.”

엘프가 위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위수가 엘프를 따른다고 한다. 뭐, 나는 엘프가 아니지만 이것도 녀석이 나를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

“아저씨 따라올래?”

녀석은 내 어깨에서 고개를 빠끔 내밀며 해맑게 웃었다.

[응응!]

원장님이 내 모습을 보더니 한마디를 했다.

“다정 씨. 위수가 엘프들에게 어떤 의미의 존재인진 알고 있죠?”

“네.”

“그런데도 데리고 간다고요?”

“네.”

“역시 내 가디언이야.”

원장님은 흔쾌히 찬성했다.

*

모든 명예와 지위를 잃어버린 다크 엘프들의 전(前) 수장 구탄.

그는 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밤에 비밀스럽게 그곳을 찾았다. 마물의 숲, 거대한 나무 열일곱 그루로 입구를 감춘 그곳은 오로지 구탄만 아는 곳이었다.

그는 오만하고 멍청했지만, 무엇보다 비열하고 야망이 있었다. 구탄은 마지막 수단을 숨기고 있었다. 그 수만 있다면 엘프 수장의 자리 따윈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시선이 모두 하이 엘프에게 쏟아진 지금, 오랫동안 해 온 이 일을 끝맺기에 가장 알맞은 시기라고 생각했다.

구탄은 지구로 전이를 당할 때, 우연히 무너진 세계수에 있었다. 그의 가족과 동료들은 모두 죽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난 구탄은, 곧 제 손에 쥐어진 무언가에 비탄과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기뻐했다. 우연의 우연. 전이의 막대한 힘이 시들어 버린 세계수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처음엔 작은 씨앗에 불과했다.

구탄은 지구에 생겨난 이계 비경을 찾아 씨앗을 심었고, 모든 수단을 사용해 씨앗을 키워 나갔다.

그가 위수들에게 사랑을 받은 것은 사실 그의 힘이 아니었다. 단지 세계수의 씨앗을 만졌기에 몸에 배인 냄새 때문이었다.

세계수는 거대한 나무다.

동시에 위수이기도 했다.

특별한 위수, 그린 파라다이스를 막아 낸 일곱 위수. 저마다 행성의 환경조차 바꿀 수 있다던 신의 위력을 가진 위수들.

하지만 이제 남은 세계수의 위수들은 없다. 카르네는 일곱 번째 가지의 수호자였으나 세계수의 위수를 계승받진 못했다.

구탄은 자신이 ‘여덟 번째’ 세계수의 수호자가 되려고 했다. 세계수가 개화하여 위수가 탄생한다면, 그는 과거에 세계를 구한 영웅의 힘을 얻게 된다. 구탄은 그렇게 믿었다. 세계수의 씨앗만 있다면 나는 진 것이 아니야.

하지만 그는 목격하고 말았다.

“말도 안 돼.”

시들어 버린 세계수.

“이건… 말도 안 돼. 안 돼. 안 돼!”

여덟 번째 세계수.

“위수의 어머니여! 어찌 이리 쉽게 저물어 시든단 말입니까!”

하루가 지나고, 이틀 밤이 되도록 구탄은 절규했다. 진정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의 비탄이었다.

슬픔을 넘어 공허해진 눈빛으로 구탄은 자신의 붉은 거북을 바라봤다. 유일하게 나를 좋아해 주던 위수, 진정한 친구.

“내 부탁을…….”

붉은 거북은 평생의 친구를 위해 마지막 부탁을 들어줬고, 스스로도 자연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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