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기사단(3)
[하하.]
차분하던 목소리가 웃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이제부터 네 기록들은 지구에서 모두 삭제될 것이다. 지금 당장 의뢰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매장은 멈추지 않아. 우린 널 굳이 죽이지 않는다. 그러나 너의 가족도, 친구도 모두 널 죽었다고 믿게 만들 수 있다. 넌 완전히 고립될 것이다.]
녀석의 협박을 듣고 있을 때였다.
휴대폰의 알림이 울린다.
‘이게 뭐야.’
SNS 계정 삭제, 메신저 프로그램 계정 삭제, 모바일 게임 계정 삭제? 수많은 알람이 오다가 결국 휴대폰도 정지당해 버렸다.
“어떻게 했지?”
[투구의 눈을 봐라.]
자세히 쳐다봤자 미세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있었다. 초소형 렌즈 같았다.
괜히 블랙 교수가 오버한 게 아니었구먼. 그 짧은 몇 초 사이에 내 신분을 파악하고 말소했다고? 첩보 영화도 한 수 접겠다.
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귀찮은 일을 한가득 안겨 준 놈들이 얄밉다.
“그래서 뭐? 이게 다야?”
[너의 신분은 말소되었다. 영국에서 빠져나가지도 못하겠지. 지금 당장 오우거나 타는 냄새나는 돛단배라도 탄다면 모를까.]
“글쎄, 그게 다냐고?”
물론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고통받았을 일이긴 했다. 가족, 친구들 사이에서 강제로 잊힌다는 거잖아. 이렇다 할 친구도, 가족도 없는 나는 상관없지만 말이다. 정말 슬픈 이야기야.
[태연하군.]
잠시 침묵하던 놈이 나에 대한 정보들을 읊기 시작했다.
[고아, 보육원, 성인까지 정부에서 프로그램을 통해 지원받았으며 메신저에 등록된 친구 수 30명. 연락처에 등록한 번호 42명. 그중 절반이 배달 업체. 그래, 넌 원래 잊힌 채 살아가던 남자였군. 정보가 하나도 없어. 능력자로 판단을 받았어도 그 어떤 사후 관리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헌터인데도 시스템에 등록하진 않은 건가?]
역시 녀석은 내가 마물원에서 일하며 통장에 수십억이 있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다. 하긴, 원장님이 관리하는데 아무리 영국 정부라도 드래곤과 관련된 정보는 이 짧은 시간에 얻지 못하겠지.
결론적으로 나에게 아무런 타격이 없다. 원장님에게 말하면 복구되겠지만 말소된 채 살아가도 괜찮다.
[이건 경고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뒤엔 여왕님이 계신다. 당장 교수를 놔두고 떠나라. 의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널 여왕과 태양에 대한 반역자로 여기고 처단할 것이다.]
대답하는 대신 나는 가운뎃손가락을 치켜세우고 투구를 향해 흔들어 보였다.
“너희 뒤에 여왕님이 계신다고? 내 뒤엔 드래곤 있다, 인마!”
이 정도로 겁먹을 거면 드래곤의 가디언을 하지도 않았다.
*
블랙 교수를 싱크홀에서 꺼낸 후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마침내 거위를 숨겨 둔 곳에 도착했다.
‘그 책’의 9와 4분의 3번 승강장처럼 감춰진 입구를 지나자 안락하게 꾸며진 정원이 나왔다. 블랙 교수의 말론 마법사들이 숨어서 차를 마시던 곳이란다.
정원의 가운데, 아마 마법으로 만들었을 작은 연못에 녀석이 있었다.
나는 녀석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이 감각, 이 느낌! 어찌 잊겠는가.
블랙 교수가 연못에서 헤엄치고 있는 녀석을 보며 말했다.
“저 아이가 황금 알을 낳는 거위라오. 겉보기엔 평범한 동물처럼 생겼으나 굉장한 능력을 가지고 있소!”
“정말 거위로 보이십니까?”
“노란 주둥이와 하얀 털, 누가 봐도 거위 아니오.”
나는 콧잔등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나는 블랙 교수가 말한 ‘누가’에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저건 아무리 봐도 거위가 아니잖아.
내 눈엔 그저 하얀빛으로 보였다. 너무 찬란하게 빛나서 그 안을 쳐다볼 수 없었다. 역시 마물이 아니야. 녀석은…….
“응? 다정, 녀석이 먼저 다가오고 있소. 날 부리로 쪼아 대던 까다로운 녀석인데…….”
하얀빛이 연못을 헤엄쳐 다가왔다. 점점 가까이 올수록 나는 숨을 참아야 했다. 휘말리는 마력이 너무 강력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얀빛이 내게 물었다.
[넌 뭘 만들어 줄까?]
대답하지 않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와, 예쁘다.]
내 안의 황금 원숭이 위수 단비는 하얀 녀석이 마음에 드나 보다. 하지만 녀석도 내 기분과 마찬가지로, 감히 손을 뻗어 하얀빛을 만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너도 황금을 좋아하니?]
하얀빛이,
금빛으로 물든다.
빛이 너무 강렬해서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으허헉! 이것 좀 보시오.”
블랙 교수의 호들갑에 천천히 눈을 떴다. 내 앞엔 황금으로 쌓아 올린 산이 있었다. 생김새는 잡동사니처럼 볼품없었으나 진짜 금이다.
“역시 황금 알, 아니 황금 산을 낳는 거위였소! 교수 인생에서 이런 마물은 처음이오! 노, 놀랍구려. 하지만 경이로움보다 두려움이 먼저 드는… 황금을… 이리 쉽게…….”
블랙 교수가 황금을 탐낸다고 하여 탓할 건 아니었다. 뭐, 이 일이 끝나면 보너스로 다 챙겨 가라지.
문제는 녀석이다.
“이 녀석, 황금 알을 낳는 거위 따위가 아니에요. 아마도… 잘 알 순 없으나…….”
그때였다.
콰아앙!
고막을 진동시키는 폭음이 생각을 방해한다. 나는 고개를 돌려 폭발한 벽을 쳐다봤다. 부서진 벽돌을 짓밟으며 거구의 사내가 등장했다.
“투구 너머의 남자가 당신인가?”
마법으로 감춰진 벽을 일순간 폭발시킨 건 폭탄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놈이 든 검 한 자루가 선보인 위력이라는 걸.
나타난 놈은 단 한 명.
“혼자 왔니? ‘기사단’이라며.”
그렇게 말은 했으나 나는 전력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예상하건대 헌터 등급으로 따진다면 규격 외의 마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1급은 우습지.
전신을 감추는 붉은색의 육중한 갑옷. 그러나 움직임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듯 가볍다. 놈의 검 또한 키만큼 무식하게 거대했으나 그 무게가 상상이 안 될 만큼 녀석은 가볍게 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신화에나 나올 법한 전설의 기사 같다.
놈은 투구 너머로 듣던 것보다 더 매력적인 목소리와 말투로 대답했다.
“그 거위는 예로부터 ‘신화’를 만들어 낸 신령스러운 존재.”
그가 내게 걸어오자 엄청 거대하고 흉포한 마물 한 마리를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놈은 ‘하얀빛’이 만들어 낸 황금 산을 잠시 바라보다가 거대한 검을 한 손으로 추켜올렸다.
“여왕의 소유물을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챙긴 자여, 태양의 이름으로 징벌을 내리니 달게 받아라.”
쿠쿵!
검을 내려쳤을 뿐이다.
그러자 물리적으로 발생해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정원의 땅들이 일순간 뒤집혔고, 황금 산은 흙더미에 묻히게 되었다.
“잠깐 있으쇼.”
황급히 황금을 주워 담는 블랙 교수를 마찬가지로 흙 깊숙한 아래에 구멍을 만들어 가뒀다. 이 정도 깊이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안전하겠지.
보장은 못하겠다만.
나는 파르르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말했다.
“자,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온몸이 떨려온다. 물론 겁먹은 건 아니다. 이 빌어먹을 무공의 부작용.
곽운 스승님의 말은 지금까지 틀린 게 없었다. 내가 강해질수록 그 힘을 증명하고자 날뛰고 싶어진다고, 조절하는 법을 배우라고 했었나?
“녀석에게 물어볼게. 어디로 가고 싶은지.”
나는 기사를 무시하고 하얀빛에게 말했다. 녀석은 흙에 뒤덮인 연못이 마음에 안 드는지 내 곁에 와 있었다.
“저 아저씨랑 갈래요? 나랑 갈래요?”
하얀빛이 대답했다.
[저자들에겐 오랫동안, 많은 걸 줬어. 재밌었지만 이젠 지겨워.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너라면, 날 데려가 줄 수 있을 거야!]
“그럼요. 데려가 줄게요.”
[좋아. 너랑 갈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녀석에게 말했다.
“나랑 가고 싶다는데?”
녀석은 싱거웠다.
“거위를 멀리 치워라.”
“역시 싸우려고?”
“네가 강하다는 건 안다. 쌓아 올린 힘에 비례하여 쉽게 포기하지 않겠지. 그러니 전투 불능으로 만든다.”
“크으.”
싸울 수밖에 없네.
스승님은 또 이렇게 말을 보탰다. 만약 호승심을 억누르지 못할 상대라면 도리어 마음껏 덤벼라. 경험은 모두 성장의 양분이 되어 줄 것이다.
검을 뽑았다.
드루이드로 놈의 발밑을 용암 지대로 만들었으나 놈은 가볍게 피해 냈다. 통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다.
“징벌의 기사, 갤러해드.”
“어음, 내 이름은 정다정.”
내 이름은 지금 상황에 맞지 않게 조금 발랄한 느낌이지만 나를 소개해야 했다. 그게 예의라고 느꼈다.
“그게 본명이에요?”
하지만 또다시 물어야 했다.
갤러해드라고? 유명한 중세 기사인 전설 속의 영웅이랑 이름이 같잖아.
그는 대답하지 않고 대검을 들어 올려 전투 자세를 취했다. 나 또한 검을 올려 샐러맨더의 기운을 최대로 이끌어 내 홍식을 펼칠 준비를 했다.
“홍식!”
이글거리는 홍염이 놈을 휘감고, 놈은 그에 맞서 대검을 휘둘렀다.
결코 내 힘은 놈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놈은 강했으나 상대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콰직!
하지만 단지 한 차례 맞붙었을 뿐인데 내 검은 부러졌고, 홍식의 불은 놈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그거 다 아티펙트냐?”
부러진 검을 버렸다.
난감했다. 맞붙는 순간 깨달았다. 놈의 무기와 갑옷은 평범한 게 아니다. 물론 당연히 철로 만들어진 무구들은 아니겠지만 내 예상보다 더 특별한 것 같았다.
내 질문에 놈은 친절하게 대답했다.
“신화 속의 검은 모두 실존하고 있으며.”
그는 십자 모양의 손잡이를 가진 대검을 내게 보이며 말했다.
“이 검은 이상한 띠의 검이라 불리지.”
템발.
젠장, 장비 수준에서 밀려 본 건 처음이다.
내가 기억하는 게 맞는다면 이상한 띠의 검은 아서왕 전설에 나오는 사기적인 검이다. 엑스칼리버와 맞먹는 위력을 지녔다고 했던가? 나는 언뜻 듣기에 허무맹랑한 그의 이야기를 믿었다. 전설의 무기가 사실 실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녀석이 만들어 줬나 봐?”
침착하고 태연하던 적기사 갤러해드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놈! 어디서 들었느냐?”
“역시 그랬어.”
뭐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야.
그게 아니야.
이 하얀빛의 마물, 아니 신수가 자신 힘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니야. 사실 황금을 낳는 게 아니라, 주변의 바람이 황금을 만들어 낸 거였어. 사실 이 녀석의 능력은…….
“대답하라!”
내 말이 갤러해드의 심기를 거스른 것 같다. 놈은 날뛰는 멧돼지처럼 덤벼들었다. 단순한 공격이었으나 문제는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쾅!
드루이드를 사용하여 땅을 꺼지게 했으나 놈은 싱크홀에 빠지는 와중에도 검을 휘둘렀다. 놈의 검은 기이했다. 분명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크악-!
내 몸을 으깨듯 강타했다. 고통을 참아 내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놈과 맞섰으나 그 어떤 힘과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가진 수단으론 놈을 이길 수가 없었다. 놈의 검과 맞서며 갑옷을 꿰뚫을 무기가 없다면.
콰아앙!
갤러해드의 대검이 또 한 번 휘둘러졌다. 마찬가지로 놈의 기이한 검은 거리와 상관없이 내 몸을 짓눌렸다.
마치 만근의 바위가 짓누르듯 중압적인 고통에 순간 정신을 놓을 뻔했다. 놈의 일격이 얼마만큼 강한지 증명하듯 내 주변 일대가 움푹 파였다.
그에 비해 내 부러진 검은 초라했다. 이 검으론 힘을 내지 못해. 놈의 검이 곰의 발톱이라면 내건 햄스터 수준이잖아.
아무리 천하의 맹수라고 한들, 이와 발톱이 뽑히면 무섭지 않다.
놈은 우위에 서 있는 승자의 자세로 늘 그렇듯, 태연하게 말했다.
“죽이진 않는다.”
놈의 대검이 격하게 진동했다.
마무리를 지으려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중 가장 강력한 공격을 펼치겠지.
‘젠장.’
송곳니가 필요하다.
짐승에겐 송곳니와 발톱이 있다. 내가 아무리 마물의 힘을 빌린다 한들, 그에 걸맞은 발톱을 가지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본래의 것과 빌리는 건 다르니까. 필요해, 내 힘에, 형의검에 어울릴, 강력한 발톱이!
“내게 주겠다고 했지?”
아라크네의 힘을 이용해 잠시 놈의 발을 묶어 놓았지만 시간은 많지 않았다. 나는 일렁거리는 하얀빛에게 소리쳤다.
“그럼 줘. 저 새끼 것보다 더 강력한 발톱을! 그래, 이왕이면 지금까지 네가 만들어 낸 것들 중에서, 앞으로 만들 것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센 무기를!”
그 순간 태양이 떠오른 듯 터져 나오는 섬광 같은 빛에 적기사 갤러해드도, 나도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