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137화 (137/258)

# 137화 싱숭생숭

나는 원장님에게 으스대며 말했다.

“저, 좀 강해진 것 같지 않아요?”

내가 지금까지 겸손했던 건 드래곤의 옆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교 대상을 바꿔 보자, 내 힘이 결코 무시 못 할 수준이라는 걸 깨달았다. 적기사 갤러해드는 영국 정부의 교섭인이자 분명 국제 사회에서 알아주는 강자겠지. 놈이 방심했다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어쨌든 한 방에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

원장님은 싱긋 웃었다. 화사한 웃음이다. 하지만 곧 나를 같잖게 여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드래곤이 상사임.”

“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지만 원장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마물원에서 단계별로 강한 마물들을 만나 능력을 습득함. 만약 헌터였으면 처음에 객사했음. 또 나와 엮이면 뛰어난 헌터라도 일평생 겪어 보지 못한 기연들을 수차례 겪음.”

“알았어요.”

원장님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무림칠성 중 하나인 도성에게 무공을 배움. 엘프와 드래곤이 합작하여 만든 드루이드를 인간으로서 최초로 가지게 됨. 게다가 영웅과 무용의 신수로부터 검을 받음. 이 또한 마물원이 아니면 평생 겪지 못할 대운이었음.”

“알았다니까요.”

원장님은 한마디를 잘못했다고 사람의 기가 죽게 다다다 쏘아붙였다. 그래, 스스로 강해진 게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원장님이 만들어 준 거다. 인정한다. 하지만 나도 그 많고 많은 수치심을 겪으며 따라간 것이다. 죽을 뻔한 적도 많다. 뻗대긴 싫지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이승을 하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약하면 안 되는 거죠, 들인 공이 얼마인데.”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제 덕이라는 원장님의 말을 인정하더라도 겪은 수모가 생각나 몇 마디를 해야겠다.

나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새끼 샐러맨더에게 젖을 먹임. 마물 아라크네의 출산 도우미도 함.”

원장님은 더 말해 보라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점점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하게 내가 수치심을 느낀 사건들을 읊었다.

“마물들 앞에서 팬티 바람으로 춤춤. 부먹, 찍먹 식성을 알아보기 위해 녀석들이 먹는 음식을 일주일 동안 생식함. 돌고래 마물들… 이건 말하기도 싫고. 진흙도 퍼 먹음. 그 외 죽을 뻔한 적 다수.”

결국 원장님은 피식 웃으며 항복을 선언했다.

“알았어요.”

그러더니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였다. 드래곤의 손도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장하다, 내 가디언.”

이런 칭찬을 바란 건 아니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마치 잘했으니까 칭찬해 달라고 떼쓴 것처럼 되어 버렸잖아. 나는 고개를 숙였다. 누가 내 뺨을 만진다면 뜨겁다고 하겠지.

“원장님 말이 맞아요, 약하면 억울하지.”

원장님은 내 머리카락을 헝클이던 손으로 내 뺨을 살짝 두들겼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내가 원장님에게 낯간지럽게 가디언이 되고 싶다고 소리친 이후부터일까. 역시, 원장님은 달라졌다.

나를 너무 살갑게 대했다.

“먼저 퇴근해 보겠습니다.”

빨갛게 익은 뺨을 들킨 게 부끄러워 나는 서둘러 퇴근을 준비했다. 원장님은 관리실을 나서는 내게 말했다.

“그동안 바빴으니까 수요일까지 쉬고 와요. 그날 오는 손님을 만나면 더 바빠질 테니까요.”

나는 손님이 누군지 물어보지도 않은 채 관리실을 나왔다. 왜 자꾸 이런 감정이 드는지 모르겠다. 원장님은 드래곤이고 나는 인간이다. 요즘 따라 아무리 예쁜 여자를 봐도 아무렇지 않더니, 교감의 부작용인가? 미쳐 가는 것 같다, 젠장.

*

휴가 동안에도 싱숭생숭한 마음은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나는 혼자 화창한 하늘을 보며 동네를 돌아다니다, 카페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먹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커플들을 쳐다봤다. 딱 달라붙어 재잘거리는 남녀.

“으엑.”

커피는 쓰고 케이크는 달다.

그리고 나는 혼자다.

쓴 게 쓰고 단 게 달듯이, 나는 혼자인 게 익숙했다. 누가 내 곁에 있다는 건 어색해.

“게다가 드래곤이라고?”

아직 누가 옆에 있는 게 어색하지 않은 레벨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조금은 심각성을 가져야 할지도 모른다. 교감의 부작용으로 내가 정씨의 대를 끊어 버릴지도 모른다. 물론 ‘정’이라는 성은 보육원에서 붙인 것이고, 엄마, 아빠와 내 조상은 누군지 전혀 모르지만 말이다.

카페에 앉아 내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다. 근 일 년을 돌이켜 보니 점점 허투루 넘어갈 일이 아님을 느꼈다.

“아주 큰 문제야, 비뇨기과에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과거의 경험을 새로 되새기자 확실히 깨달았다. 내게 ‘썸’이 없었던 게 아니다. 나는 절대 왕자병이 아니다. 오히려 이성 관계에 있어선 누구보다 객관적이다.

그러니 내 예상은 맞았다.

올리비아, 곱슬머리의 영국인.

카르네, 나를 ‘빛나는 자’라 불러 준 엘프.

분명 내게 관심이 있었어.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있었을 거야. 하지만 난 어떻게 대했는가?

“블루베리 스무디랑 녹차 케이크 하나요.”

음료와 케이크를 한 번 더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그래, 아무리 임무에 바빴다고 하더라도 너무 무심하지 않았던가? 한번이라도 이성적으로 생각했더라면 조금 더 적극적인 태도로 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론은 육체적으로 따지면 성기능의 문제이고, 정신적으로 따지면 이성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녹차 케이크는 쓸데없이 달아.”

못 하는 것과 안 하는 건 큰 차이다. 지금까지 노력을 안 했더라면, 이제 못 하게 되어 버렸다. 난 케이크를 치우고 스무디를 마셨다. 아메리카노를 시킬 걸 그랬다.

“그런데 유일하게……. 젠장.”

어제 있었던 일이 자꾸만 떠오른다. 난 대체! 그까짓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볼따구니를 몇 번 두들겨 줬다고 왜 이러는 건가.

문득 생각한 건데 이 또한 착각일지도 모른다. 나는 좋아한다는 감정을 잘 알지 못하니까. 어쩌면 이건 원장님, 드래곤에 대한 동경과 존경으로 이성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 하인으로서, 부하로서, 아랫사람으로서 느끼는 감정일지도 몰라.

“그래, 말이 되네.”

아주 예전에 마물원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원장님께 미친 소리를 한 적이 있었지. 여자 친구가 되어 달라고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같잖은지. 어느 날, 개미가 내게 묻는다.

“남자 친구가 되어 줄래요?”

개소리야.

“아직 믿어 보자.”

정말 교감의 부작용으로 문제가 생겼는지, 아님 그저 내 마음이 문제인지는 판단을 미뤄 두기로 했다.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면 언제 그랬냐며 심장이 콩닥거릴지도 모른다.

결국 케이크와 스무디를 다 먹고 집에 돌아왔다.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욕조에 누워 여유를 즐겼다.

씻고 나서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대가리가 커진 단비가 야옹이에게 시비를 걸기 전에 녀석과 놀아 줬다. 야옹이가 일방적으로 폭행해서 단비가 시끄럽게 울면 귀가 아파진다.

생각을 안 하니 머리가 편해졌다.

‘또 컴백했네.’

TV를 틀자 예전에 좋아하던 여자 아이돌 그룹이 신곡을 선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채널을 돌렸다. 동물의 제국 할 시간이네.

*

며칠간의 휴가가 끝난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출근했다. 약간 어색하고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관리실의 문을 열었다.

“왔어요?”

“안녕하세요.”

소파에 앉아 있는 네 명의 사람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입구에서 인사하는 원장님에게 작게 말했다.

“손님들이에요?”

원장님이 대답했다.

“다정 씨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직접 인사 나눠요.”

이른 시간에 원장님이 말한 손님들이 와 있었다. 네 명의 사람, 일단 이종족이 아님을 다행으로 여겼으나 풍기는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어디선가…….’

마나를 느껴 본 적은 있는데 확실치 않았다. 얼굴들은 다 초면이었다.

중간 소파에 앉아 있는 덩치 큰 남자는 금발 벽안의 전형적인 외국인 미남, 그 옆에 앉은 남자는 얼굴은 아직 소년티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몸은 다부져 보였다. 특이하게 머리카락이 보라색이라 남자 아이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사람 맞지?’

혼자 큰 소파를 독차지한 남자도 있었다. 대머리에 얼굴선이 굵직한 서양인 노인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무색하게 덩치는 어마어마했다. 헤비급 이종 격투기 선수보다 더 크다. 프로 농구에서 센터를 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다.

그는 날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왜 초면인 사람의 면상을 보고 실실 웃는 걸까? 이상한 사람이다.

나머지 한 사람은 다른 의미로 이상한 여자였다. 나를 노려본다. 내가 관리실로 들어온 이후로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세 명과 마찬가지로 서양인이었는데 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포근한 느낌을 주는 미녀였으나, 부담스러운 시선 때문에 난감했다.

그중, 덩치가 큰 빡빡이 노인이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솥뚜껑만 한 손바닥으로 내 등을 두들기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크하하핫! 만나서 반갑소. 그래, 당신이 갤러해드를 묵사발 낸 장본인이군!”

난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일격에 쓰러트렸죠.”

내 대답이 마음에 드는지 덩치가 큰 노인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호탕하게 웃었다.

난 태연한 척했다. 살짝 고개를 돌려 원장님을 바라보니 웃기만 했다.

‘영국 여왕과 거래했다며 웃더라니.’

난 금발 벽안의 미남을 쳐다보며 말했다.

“벌서 만나네요, 갤러해드. 아니 라셀레스라 불러 드릴까?”

그는 여전히 끝내주는 목소리와 억양으로 대답했다.

“정말이더군.”

갤러해드는 원장님을 힐끔 쳐다봤다. 그 행동으로 의미는 전달됐다. 그래, 내 뒤에 정말 드래곤 있었어.

“난 란슬롯! 본명은 안 알려 줘요. 나하고도 싸워 본 적 있죠?”

아이돌같이 생긴 소년은 란슬롯, 도피 생활할 때 갤러해드와 같이 날 끈질기게 괴롭힌 놈이었다.

“크하하!”

호탕한 대머리 노인은 가웨인 경.

부담스러운 눈빛의 갈색 머리 여자는 펠리노어 경이었다.

‘아이고, 두야.’

이들은 불과 며칠 전엔 적이던 자들이었다. 심지어 이들 중 란슬롯과 갤러해드하곤 직접 싸운 적도 있었다.

영국 정부를 대변하는 세력, 태양의 기사들. 만약 원장님이 드래곤이 아니었다면 결코 이렇게 한곳에 모일 이유가 없는 자들이었다. 내용이 무엇이든 그들도 드래곤과의 거래이기에 이렇게 모인 거겠지.

원장님은 관리실 바깥으로 날 불렀다.

“대체 무슨 짓을 꾸미기에 녀석들을 부르신 거예요?”

“거래 조건 중에 하나예요.”

원장님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선 저들에게 인정을 받아요. 그 후, 저들과 같이 비밀의 결계에 들어가 탑의 균열을 닫아 줘요.”

하지만 언뜻 들어도 골치가 아픈 일이었다. 인정을 받아? 같이 결계에 들어가? 그리고 균열을 닫아 줘?

대체 뭔 소리야.

원장님은 나머지 일은 그들에게 들으라 말하고, 쏙 빠졌다. 난 며칠 전에 느낀 내 미묘한 감정을 다시 정립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정말 그녀를 좋아한다면, 원망은 하지 않았을 거야, 지금처럼 짜증도 나지 않았을 테고.

*

그들과 난 능구렁이 같았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눴다. 물론 속으론 날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한 짓은 그들 입장에선 천하에 몹쓸 도둑질일 테니.

갤러해드가 말했다.

“캐멀롯의 결계에 금이 갔다.”

그는 내 도움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캐멀롯이라는 곳이 있다. 영국의 외딴 섬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장소이며, 마법사들의 결계란다. 캐멀롯엔 빛 뭉치 신수를 포함하여 보물과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했다.

“삼엄한 경계로 보호받던 거위가 탈출한 건 우리의 불찰이 아니다.”

그러한 캐멀롯은 드래곤의 시선조차 피할 만큼 은밀하고 안전한 곳이었다. 하지만 몇 주 전 생겨난 ‘전이의 균열’로 캐멀롯이 위기에 처했다. 균열은 캐멀롯의 안에서부터 나타났다. 일반적인 전이가 아니었다.

“캐멀롯에 유다의 탑이 나타났다.”

“유다의 탑?”

“또는 솔로몬의 탑이라고도 하지.”

솔로몬의 탑.

마물원에서 일하며 수없이 들어왔다. 미라 마물, 나이트메어처럼 그곳에서 온 마물들을 상대해 본 적도 있었다. 하나같이 인상이 더럽고 사악했다. 마물이라기보다 악마들이 모인 곳이다.

캐멀롯 안에 나타난 솔로몬의 탑은 아주 극히 일부만 전이당했으나 그럼에도 지구엔 큰 위협이었다. 오히려 ‘캐멀롯’이란 결계 안에 나타난 게 다행일까.

“이번엔 실패해선 안 돼.”

캐멀롯을 관리하는 태양의 기사들은 탈출한 신수를 되찾고 캐멀롯의 균열을 닫는 두 가지 임무를 부여받았다. 나로 인해 하나는 물거품이 되었으니 남은 임무는 하나였다.

“균열을 닫는 데 내 도움이 필요하시다?”

삐딱하게 말했으나 갤러해드는 개의치 않았다.

“캐멀롯은 마법사들의 결계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하지.”

녹아드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설득당하는 느낌이다. 물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녀석들을 도와줘야 할 테지만.

“열쇠는 여왕의 허락과 다섯의 영웅.”

다섯의 영웅?

의아해할 때 갤러해드가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 원탁의 기사는 불의의 사고로 네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원탁의 기사는 ‘멀린’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하지.”

신수, 녀석들이 부르길 멀린.

“빌어먹게도 넌 무기를 하사받았다. 네가 마지막 기사, 즉…….”

갤러해드의 목소리는 분에 못 이기듯 떨려 왔다.

“퍼시발이 되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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