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원탁의 기사들 (3)
두 가지 힘을 동시에 형의검으로 사용하는 건 난해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마나’가 문제였다.
처음 교감으로 마물의 힘을 발현했을 때부터 원장님이 말하길, 내 그릇이 커질수록 마물의 힘을 강하게 발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아무래도 두 가지 이상의 힘을 받아들여 형의검을 펼치기엔 내 그릇이 너무 작은 것 같았다.
연습으론 되지 않는다.
결국 나는 과거 현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인생은 실전이야, 엿만아.
*
8일, 첫 대련 갤러해드.
그와 싸울 때 그 힘을 펼쳤다. 홍식을 펼칠 때 대륙거북이의 힘도 같이 끌어모은다. 나는 단 한 번의 공격을 펼치기 위해 몸 안의 기가 모두 빨려 나가는 경험을 했다.
‘이래선 죽도 밥도 아니잖아!’
대륙거북의 힘을 유지한 채 홍식을 펼치자니 샐러맨더의 기운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샐러맨더의 기운을 끌어 올리면 대륙거북의 힘이 사라졌다.
결국 포기하고 원장님한테 조언이나 구해 볼까 할 때였다.
[뾰로롱!]
요즘엔 항상 내 품에서 잠만 자던 단비가 튀어나왔다.
[마법 소녀 단비가 도와줄게!]
젠장, 궁금해서 한 번 본 것뿐인데 그새 따라 하네.
“드루이드는 필요 없어, 단비야.”
“뭘 하려거든 역겨운 짓이라면 이제 봐주지 않겠다.”
내 공격을 얌전히 기다려 주던 갤러해드가 경고했다. 난 단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끌어 올렸던 두 가지 기운을 잠재웠다. 아직 내 그릇으론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난 많은 걸 품어.]
그때였다.
단비의 황금 털이 태양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갤러해드에게도 보였는지 그는 눈을 찌푸렸다.
[너의 뿌리가 되어 줄게.]
태양처럼 찬란한 빛, 단비가 내 몸으로 들어왔다. 평소와 달랐다. 유령처럼 내 몸을 왔다 갔다 해도 아무런 이질감을 남기지 않던 위수인 단비가 확실히 내 몸에 무언가를 남겼다.
“세상에, 너 이런 것도 할 줄 아냐?”
마나가 격렬히 늘어났다.
아니, 마나가 아니라 마치…….
내 몸 안에 새로운 그릇이 생겨난 느낌. 이 안에 힘을 더 담아도 마치 내 것처럼 다룰 수 있을 것 같아.
그제야 난 품을 수 있었다,
샐러맨더의 힘도, 대륙거북의 힘도.
동시에 두 가지 힘을 완전하게 담은 검을 갤러해드에게 뻗었다. 그 순간 붉은 폭풍이 일어났다.
이제 숨을 내뱉는 수준이 아니다.
그래, 비유하자면 태양의 흑점에서 폭발하는 불기둥.
“홍염.”
이기적이었을까.
나도 예상하지 못한 공격, 결단코 이 정도 결과로 이어질지 몰랐다. 확장하는 성질을 가진 대륙거북의 힘이 샐러맨더의 불씨를 키워 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처럼 폭풍같이 크게 만들다니.
갤러해드는 그 매력적인 목소리가 갈라질 듯 소리를 질렀다.
“FU……!”
그의 대검이 휘둘러졌고,
동시에 내 품에 있던 오리하르콘이 빛을 뿜었다.
*
머쓱했다.
결단코 그를 죽이기 위해 이런 무지막지한 공격을 한 게 아니다.
나는 너덜거리며 다 부서진 적기사 갑옷을 걸치고 간신히 서 있는 갤러해드에게 말했다.
“거… 괜찮소?”
다행인 건 그도 최후의 수단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홍염이 갤러해드를 덮치기 전, 품 안에 있던 오리하르콘이 빛나며 그가 마법을 사용했음을 알렸다.
그 후 불기둥을 막는 거대한 얼음벽이 생겨났다. 마법이었다. 갤러해드는 기사임과 동시에 마법사였다. 그것도 순식간에 얼음벽을 만들 만큼 수준 높은 마법사.
갤러해드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입을 오물거렸다. 무언가 욕을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원망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나온 말은 달랐다.
“…합격이다.”
*
캐멀롯.
그곳은 예전부터 존재하던 곳이다. 갤러해드는 캐멀롯이 중세 시대부터 있었다고 주장했다. 믿기 힘든 사실은 아니었다. ‘인어’들처럼 대전이가 발생하기 전에도 지구엔 이미 이계의 신비로움이 있었다.
캐멀롯은 전이 이전에 생겨난 비밀들을 보호하던 곳이었다. 그러다 대전이가 발생한 후, 영국에 모인 마법사들이 여왕과 몇 가지를 거래했고 그 답례로 캐멀롯에 비밀스러운 결계를 마법으로 만들어 줬다고 한다.
이 결계는 오직 멀린의 선택을 받은 다섯 영웅 또는 여왕이 허락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와선 그런 철통같은 보안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다섯 번째 기사가 불의의 사고로 죽어 빈자리가 생겨났고, 내가 거위 마물의 선택을 받은 퍼시벌이 되기 전까진 어쩔 도리가 없었으니까.
‘이젠 신수도 없으니 더 이상 죽으면 안 되겠네’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여왕과의 독대를 마친 갤러해드가 말해 줬다. 이번을 끝으로 결계는 폐쇄한단다.
일주일이 넘도록 여유롭게 대련하던 것과 다르게 막상 임무에 투입되자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우린 곧바로 ‘캐멀롯’의 입구에 도착했다.
입구는 외딴 섬에 있었다.
영국의 외딴 섬에 자리한 허름한 성당. 하지만 그곳의 지하로 향하는 계단은 무척 넓고 깊었다.
마침내 계단의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석문이 나타났다. 이곳이 영국 최대의 비밀이 깃든 캐멀롯의 입구구나.
나는 입구 앞에 서서 넌지시 갤러해드에게 말했다.
“여왕님과는 만나고 싶었는데…….”
임시라도 다섯 번째 기사인 퍼시벌이자 같은 임무를 하는 처지다. 그런데도 여왕님은 날 만나 주지 않았다. 아무리 ‘공식적인’ 여왕님과는 달라 비밀을 유지해야 한다지만, 몹시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검을 들어라.”
원탁의 기사들하곤 조금 친해진 듯했다. 내가 헛소리할 때마다 이제 무시하지 않고 일일이 대꾸해 준다.
나는 갤러해드를 따라 메타소드를 꺼냈다. 다른 기사들도 저마다 무기를 꺼낸다.
“끝나고 같이 펍이나 가자고. 신참에게 유럽 제일의 맥주를 소개해 줘야지!”
가웨인의 말에 난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유럽 제일 맥주는 독일 것이 아닌가요?”
헛소리에도 항상 유쾌하게 웃어넘기던 가웨인은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험악한 표정으로 으름장을 놓으며 내게 영국 맥주의 위대함을 알려 주겠다고 했다.
우린 거대한 석문에 저마다의 무기를 갖다 댔다. 그러자 석문에 양각된 문자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움직이더니 푸른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미안해요, 펠리노어.”
나는 지금까지 나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던 펠리노어에게 말했다. 무슨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다. 날 인정해 주긴 했지만 냉랭하게 대했다. 그럴 만도 하다.
쾌속의 검을 자랑하는 그녀와 싸울 땐 어쩔 수 없이 야옹이의 힘을 빌려야 했고, 가장 깊게 연결된 힘인 만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미안하다고 하면서 몇 번이나 그루밍을 해 버렸던 것이다.
“괜찮아요, 퍼시벌 경.”
처음으로 대답해 줬다. 정말 괜찮은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쿠쿠쿵-!
서서히 열리는 석문을 바라보며 란슬롯이 말했다.
“내가 죽으면 유골은 템즈 강에 뿌려 줘.”
시작도 하기 전에 불길한 말을 한다. 란슬롯의 말에 갤러해드가 대답했다.
“거절한다. 쓰레기 투기는 불법이야.”
날이 선 농담이었으나 그만큼 친한 둘의 사이를 증명하기도 했다.
마침내 석문이 모두 열렸다. 안에서 스산한 공기가 흘러나와 폐를 찔러 왔다. 마치 저승의 문이 열린 것 같다. 저 너머는 망자들의 땅일까.
모두가 망설일 때 나는 혼자 걸음을 내디뎠다. 난 점점 드러나는 캐멀롯의 광경에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대단한 경치이긴 했다.
거인들의 수납장, 혹은 거대 개미들의 개미굴 같다. 캐멀롯의 천장은 고개를 꺾어 봐야 할 정도로 높았는데, 천장을 지탱하는 거대한 중앙 기둥과 기둥에 연결된 복도엔 창고로 사용할 만큼 넓은 홈이 가득했다.
1층의 벽면에 난 홈을 자세히 지켜보자 벽에서 마나가 느껴졌다. 강화 유리보다 단단하겠지. 홈마다 온갖 비밀이 담겨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입술을 깨문 건 거대한 창고의 광경 때문이 아니었다.
“진짜 탑이잖아.”
스산한 공기를 내뿜는 저것.
탑이다, 기껏해야 4층짜리 건물처럼 작았으나 분명 탑이었다. 생긴 건 피사의 사탑처럼 생긴 종탑이었으나 전체적으로 검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허물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솔로몬의 탑에 대한 일화는 모두 비유라고 생각했다. 마물원에서 일하기 전엔 그저 이종족에 의해 전파된 신화였고, 마물원에서 일한 후엔 온갖 사악한 것들이 살고 있는 악의 소굴 같은 느낌이었다.
근데 ‘탑’이란 건 비유가 아니었다. 솔로몬의 탑은 진짜 탑이다.
갤러해드가 말했다.
“유다의 탑은 보통의 균열과 다르다. 저절로 닫히지 않으며 직접 들어가 과제를 이루어 탑을 닫아야 하지. 저 모습 또한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그곳으로 가는 수많은 입구 중 하나만 열렸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케르베로스때 원장님이 그랬다. 솔로몬의 탑이 지구에 모습을 드러냈다면, 지구는 일찍이 멸망했었을 거랬지.
“과제가 무엇인진 몰라. 다섯 명이 들어가도 한 명만 받을 수도 있으며, 다섯 명 모두가 시련을 통과해야 할 수도 있다.”
갤러해드가 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가웨인과 펠리노어가 그 뒤를 따르며 같이 걸어갔다. 란슬롯은 날 보며 싱긋 웃더니 내 팔짱을 끌었다.
“태양은 쉽게 저물지 않는다. 기사의 검은 언제나 하늘을 향한다.”
탑의 입구에서 갤러해드가 소리쳤다.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나올 때도 다섯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 모두 무운을 빈다.”
솔로몬의 탑에 들어가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저 입구로 보이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
갤러해드가 먼저 문턱을 넘었고 가웨인과 펠리노어가 건너갔다. 마지막으로 란슬롯이 넘어가다가 내게 말했다.
“손이라도 잡아 드려?”
난 손을 내미는 척하다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만 믿어.”
란슬롯이 지나가고,
나도 곧 그를 뒤따라 솔로몬의 탑을 열었다.
*
빛.
어둠.
두 가지가 지나고.
눈에 보이는 건 기사 다섯.
“다행이로군. 다섯이 모두 같은 시련을 받는 모양이다.”
갤러해드가 말했다.
“미로군요. 던전인가?”
란슬롯이 말했다.
“으하하, 빨리 통과하자고! 저 길인 것 같군!”
가웨인이 말하고,
“금방 끝나겠네요.”
펠리노어가 말했다.
나는 잠시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주변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완벽했다. 성격, 말투, 생김새까지 모두 완벽했다.
주변을 둘러봤다.
양옆으로 석벽이 세워진 곳이다. 높디높은 석벽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길은 하나였다. 오로지 앞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이 새끼들.’
넘실거린다,
악의에 숨을 못 참겠다.
단비가 화를 내며 소리 지른다.
난 녀석을 진정시키며 메타소드를 꺼냈다.
“자, 그럼 퍼시벌, 네가 앞장을…….”
그리고 검을 휘둘러 갤러해드의 목을 잘랐다. 이내 눈 깜짝할 사이에 벼락같이 검을 내질러 세 기사의 심장을 꿰뚫었다. 네 기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원망에 찬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난 담담히 그들의 최후를 지켜봤다. 참 우습지. 내겐 이미 다 들렸는걸.